여전히, 김연아
선수 생활을 은퇴한 김연아는 여전히 피겨 스케이팅 곁에 머무르는 스포츠인으로, 기록이 증명하는 영원한 챔피언으로,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셀러브리티 중 하나로 우리 곁에 있다. 그런 김연아에 대한 지지를 멈출 수가 있을까?
한 번 여왕은 영원한 여왕이다. 우리의 피겨 퀸이 스케이트화를 벗은 지 1년이 지났지만, 김연아는 김연아라서 여전히 특별하다. 스스로 특별해지고 싶어 세상에 나서는 연예인과 달리, 스포츠 선수는 남들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살고 싶어도 운동을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주목받는 인생을 산다. 김연아가 선수 시절 마지막 경기인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 참가했을 때도 대한민국뿐 아니라 온 세계가 그녀를 주목했다. 1930년대의 노르웨이 선수 소냐 헤니, 1980년대의 동독 선수 카타리나 비트에 이어 올림픽 2연패 이상을 달성하는 여자 싱글 피겨 선수가 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 부문 총점 200점을 돌파한 최초의 선수, 2007년 세계피겨선수권 쇼트 프로그램 이래 쇼트와 프리 프로그램 총점에서 모두 11번의 세계 신기록 수립, 풍부한 표현력까지 갖춘 ‘토털 패키지.’ 이제 와 생각해보면 당시의 판정 논란과 모든 잡음마저도 김연아라는 드라마를 완성해줄 극적 요소가 아니었을까. 지구 곳곳에서 진정한 승자가 금메달을 빼앗겼다고 분통을 터뜨리며 여왕을 둘러싼 사건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고, 결과적으로 주인공의 공고한 존재감만 더욱 빛났다. 정작 김연아는 “최선을 다했고 잘했기 때문에 만족한다”거나, “끝이 났으니까 끝”이라고 담담하게 말해 우리를 또 다른 감동의 경지로 이끌었다. 여왕의 클래스란 그런 것이다. 그러니 그 겨울 엔딩의 여운은 길고도 길었다.
그 모든 소동과 선수 생활의 짐을 내려놓은 김연아의 천진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지난 2009년, 비시즌 기간 중에도 하루하루 스케줄이 꽉 차 있을 때 <얼루어>와 만났던 김연아는 이제 더 이상 훈련 외 시간을 쪼개 일상을 꾸릴 필요가 없다. 이제는 좀 더 느긋해진 그녀의 분위기를 살려 인위적인 치장은 하지 않고, 특유의 여성미를 포착하는 것만으로도 오늘 촬영은 충분했다. 햇살을 받으며 카메라 앞에 서 있는 모습 그대로 김연아는 예쁘다. 은반 위에서 그녀의 여성미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던 몸의 곡선과 비율은 인위적인 포즈로 과시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다. 원래 근육이 잘 빠지는 몸이라고 하는데, 아직까지는 선수 시절과 비교해도 몸의 변화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가끔 집에서 심심할 때 스트레칭이나 복근 운동을 하지만 아무래도 운동을 잘 안 하게 돼요. 그래서 체력이 좀 떨어졌어요. 생활에 숨 찬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서 집에 들어갈 때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고 있어요.” 김연아가 차분하게 말했다. 오래전부터 계획해왔던 대로 은퇴를 했지만, 막상 예전과 다른 나날을 보내면 그 기분만으로 인생이 새롭게 느껴질 것이다. “운동할 때는 일주일에 6일을 항상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같은 생활로 보냈죠. 그런 점에서는 보통 사람들의 직장 생활과 비슷했어요. 그런데 마음의 여유가 없었어요, 운동을 하고 나면 힘이 드니까. 요즘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늘어지게 쉬기도 해요.”
세상 사람들은 그녀가 은퇴를 하자마자 ‘그래서 이제 뭘 할 건지’ 궁금해했다. 후배들을 챙기는 모습에서 지도자의 길을 점치기도 했고, 대학원에 갔으니 나중에 교수가 되는 건 아닌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기도 했다. 심지어 그녀의 운전면허 소지 여부라도 알고 싶어 한다. 은퇴 즈음 김연아가 앞으로 쉬면서 면허도 따고 여행도 다니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궁금증을 풀어주자면, 운전면허는 아직 따지 못했고, 후배들이 미국으로 전지 훈련을 갈 때 동행하면서 약간이나마 바람을 쐬었다. 김연아의 나이 이제 스물여섯. 김연아는 이미 많은 것을 이뤄냈다.
“사실 제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아직 잘 모르겠고, 다른 데 관심을 둘 여력도 많지 않았어요.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으니까요. 은퇴 후 마냥 한가하게 보낸 건 아니거든요. 대학원에 다니고, 태릉선수촌에서 후배들도 봐주고, 오늘처럼 촬영을 하거나 홍보대사 활동도 하죠. 새로운 무엇에 대한 생각은 아직 안 하려고 해요. 이렇게 현재에 충실하면서 지내다 보면 어느 순간 다른 생각이 들 때가 오겠죠?”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이 끝난 직후 사람들이 다급하게 다음 목표를 물어봤을 때도, 김연아는 당분간 자신을 그냥 놓아두었다. 내려놓는 시간이 쌓이다 보면 ‘그 다음’이 점차 선명하게 다가오기도 하는 법이다.
요즘 가장 재미를 느끼는 일은 훈련 중인 후배들을 만나 조언해주는 것이다. 자신이 잘하는 것과 남을 잘 가르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인데, 재미를 느낀다니 가르치는 일도 그녀의 적성에 맞는 듯하다. 후배들 안무를 봐주고 조언자의 역할을 해주는 건 은퇴를 하기 전부터 마음이 당겼던 일이다. “제가 선수 생활을 해봤으니 경험을 토대로 분명 얘기해줄 만한 게 있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정식으로 가르치는 건 아니고 한발 물러선 자리에서 조언을 툭툭 던져주는 정도예요.” 선수 시절 김연아는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선수와 훈련하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해외에 나갔을 때, 그런 대상이 링크에서 열심히 스케이트를 타고 있으면 건강한 자극을 받곤 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김연아는 후배들에게 선을 지키려고 한다. “제 조언이 꼭 도움만 되는 건 아닐 수도 있어요. 언니, 누나 하던 존재가 갑자기 코치처럼 굴면 저를 어떻게 받아들이겠어요? 조언을 해도 제안하는 식으로 하려고 해요.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말이 많아지면… 으으, 저도 선수 때 잔소리 듣는 건 싫었어요.”
늘 은반 위에서 홀로 빛났던 김연아가 차츰 후배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포착되면서 그녀를 ‘어미새’라고 부르는 팬이 생겼다. 김연아는 선수 시절 자신의 성적에 따라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는 한국 선수의 수가 더 확 보된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고, 후배들에게 큰 무대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다고 말해왔다. 그렇게 고등학생인 김해진과 박소연 선수가 김연아와 함께 소치로 갔다. 김연아에겐 김연아 같은 선배가 없었지만, 지금의 한국 피겨 선수들에겐 그녀가 있다.
그런 김연아가 자신의 타고난 성격을 무심하게 털어놓을 때는 조금 놀라웠다. “저는 도전적인 걸 별로 안 좋아해요. 도전은 이제 그만! 흐흐, 모험보다는 안전한 게 좋아요.” “운동만 해봤기 때문에 운동 외에 잘하는 게 뭔지, 못하는 건 뭔지 아직도 알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제가 사실 ‘귀차니즘’이 조금 있어요. 그런데 가까운 사람들도 제가 계획적이고 끈기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요. 강인하고 완벽주의자라고 여기기도 하고요. 그렇지 않거든요. 누구나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하듯 저의 할 일이 운동이었으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한 것뿐이에요.” 세계 챔피언과 ‘귀차니즘’이라니! 김연아는 자신의 한마디가 자칫 곡해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또한 감정과 사실을 가공 없이 드러내는 담백한 성격이다. 지난해 아이스 쇼 직후 기자회견에서 김연아와 함께 보낸 시간이 인생 최고의 경험이었다고 말한 안무가 데이비드 윌슨은 평소 김연아의 순수함을 자주 칭찬했다고 한다. 감성이 정직하고 순수해서 안무가 자아내야 할 느낌을 오롯이 흡수한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김연아가 나타난 이후에야 ‘트리플 악셀’이니 ‘토룹’이니 하는 기술이 세상에 있다는 걸 알았지만, 감동이란 그런 기술을 ‘클리어’하는 것만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언젠가 방상아 해설위원은 이런 말을 했다. ‘아사다 마오는 잘하고 잘 뛴다. 김연아에게는 다른 선수가 흉내 낼 수 없는 감동이 있다.’ 데이비드 윌슨의 발견대로라면 김연아가 감동의 김연아로 등극하기까지에는 노력과 재능에 더해 타고난 성정까지도 한몫한 셈이다. 뚱한 듯 무표정하게 있다가도 웃을 땐 입이 찢어져라 호탕하게 웃으며, 만화 속 캐릭터처럼 육성으로 “풉” “큭”이라고 감탄사를 뱉는 사소한 모습 역시 김연아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인생에서 가장 꽃다운 시기인 20대 중반을 보내고 있다. 이제 TV를 켜면 자신보다 어린 연예인이 많이 나온다고. 훈련과 시합에 매진하던 사이에 자신이 훌쩍 커버렸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다. “친한 언니와 아주 어릴 때부터 장난처럼 서로 아줌마라고 불렀거든요. 10대 때의 기억이 생생하지만 벌써 20대 후반을 향해가고 있어요. 어느 순간 정말 ‘아줌마’가 될 때가 오겠죠.”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자가 되어버리면 종종 개인의 행복을 누리기가 곤란하다. 의지와 상관없이 인터넷 페이지를 장식하는 뉴스, 때로는 해로운 말들로부터 초연하게 자신의 행복을 지켜야 한다. “어린 나이에 유명해지기도 했고, 주목받는 입장이라는 걸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죠. 특별해지고 싶어서 운동을 열심히 한 게 전혀 아니지만요. 다만 제 모든 걸 투자해서 살아봤으니 앞으로 뭔가를 또 이루고 싶다는 마음은 크지 않아요. 그보다 보통 사람으로, 평범한 여자로도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요. 딱히 불행하다는 생각이 안 들면 그게 행복인 것 같아요.” 다행히 김연아는 의연하다. 평범한 삶에는 언젠가 자기 차를 몰며 여행을 다니고, 편히 시장을 보고, 가족을 꾸리는 일 등이 모두 포함돼 있을 것이다.
피겨 스케이팅 불모지에서 어느 날 그 스포츠의 매력에 눈뜨게 해준 김연아 덕분에 우리는 황홀한 시간을 보냈다. 김연아에게, 진심을 담아 당신이 고맙고 대단한 존재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몇 초간 고개를 숙이며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대단했나요? 그랬을 수도 있지만, 이미 다 지난 일인데요 뭘. 감사한 마음 외에는 별로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해요.” 김연아는 늘 이런 식이었다. 우리에게 감탄할 기회를 주고서 본인은 무덤덤하게 굴었다. 우리는 은반 위를 훨훨 날아다니며 전설을 새기는 소녀를 알게 된 이후로 그저 자랑스러워하기만 하면 됐다. 소치 동계올림픽 프리 경기에서 피아졸라의 ‘아디오스 노니노’에 맞춰 ‘아디오스’를 고하고, 단상에서 내려와 스케이트화를 벗은 선수 김연아. 그러나 그건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다. 그녀는 스포츠인으로, 기록이 증명하는 영원한 챔피언으로,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셀러브리티 중 하나로 우리 곁에 있다. 우리가 그런 김연아에 대한 지지를 멈출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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