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문턱에서 만난 이준기
늘 독특하고 매력적인 작품을 선택해온 이준기의 차기작은 중국의 베스트셀러를 드라마화한 <보보경심 : 려>로 정해졌다. 서른다섯, 배우로도 남자로도 딱 좋은 나이의 이준기를 봄의 문 앞에서 다시 만났다. ▶ 동영상 보기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이었다. 라이더 재킷을 입고 청담동의 한 골목에선 그는 “날씨가 정말 풀렸네” 하고 혼잣말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나의 사랑하는 <얼루어>”라고 인사를 건네는 다정함까지.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몇 년에 한 번씩 그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화보를 찍고, 뉴욕과 캐나다를 여행했으니 그만큼 추억도 있다. 웬만한 여자보다 좋은 피부를 가진 꽃미남과의 이 배우가 사실은 배포가 크고, 의리가 깊은 ‘상남자’ 타입이라는 것쯤은 아는 사이라는 거다. 한 배우의 성장과 한 남자의 성장을 지켜보는 게 꽤 즐거운 일이라는 걸 알려준 이준기. 가만있자, <왕의 남자>가 2005년, <개와 늑대의 시간>은 2007년 작품이었다. 모두가 그에게 열광하던 때부터 지금까지 10년 이상을 열심히 활동한 배우이며 그사이 군대를 다녀왔고, 또 쉼 없이 작품활동을 해오면서도 별다른 스캔들 하나 없었던, 지나치게 모범적인 남자. 작년에만 세 편의 작품을 남긴 이준기는 여전히 소년처럼 웃으면서 이야기했지만, 그럼에도 순간순간 깊은 속내를 드러냈다. 이준기의 봄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지난번 인터뷰 어디서 했는지 기억해요?
음, 캐나다 아니었나요?
캐나다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 안이었죠. 난기류에 시달리며.
그랬다! 전역하고였죠? 많은 꿈을 갖고 있었죠. 나는 다를 거라며. 하하.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게 난기류예요. 뭐든 잃기가 싫은가 봐요.
그사이 시간이 꽤 흘렀는데 많은 일이 있었겠죠?
평범했어요. 매년 작품을 했고. 가장 큰 변화는 내가 나이를 먹은 거죠.
배우가 나이 드는 건 좋은 선물 아닌가요? 특히 남자 배우에게는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이 듦이 작품에서 녹아났음 좋겠어요. 그런 작품을 만나고 싶고요.
작년엔 어땠어요? 난기류의 공포를 이기고 시칠리아, 상하이, 케이프타운 등을 바삐 오간 것 같던데요?
작년에도 쉬지 않고 했거든요. 국내 활동은< 밤을 걷는 선비> 하나지만 그 전에 중국에서 영화 촬영을 하며 상하이에서 한 달 살았고, 시칠리아에서 그들만의 아름다움을 느껴보기도 했죠.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레지던트 이블 6 : 더 파이널 챕터> 촬영을 위해 머문 남아프리카공화국이었어요. 한 달 정도 머물렀는데, 특별 출연이라 부담이 없어서 그런지 무척 재미있더라고요. 촬영이 없어도 현장에 가서 보면서 많이 배웠어요.
밀라 요보비치와 찍은 사진을 봤어요! 첫 할리우드 진출 축하해요.액션 연기를 즐긴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하하, 거창하게 ‛진출’을 말할 건 아니에요. 밀라는 세계적인 배우지만 허투루 하는 것이 없었어요. 장시간 몸을 계속 써야 하기에 피곤할 텐데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이 제게도 자극이 많이 되었어요. 저도 몸을 쓰는 연기를 좋아하는데, 그건 제 자부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부담이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현장에서 더 고집스럽게 합을 맞추려고 하는데 그녀도 마찬가지였어요. 몸을 사리는 모습이 전혀 없고 제 제안도 기꺼이 듣고요.
폴 앤더슨 감독이 직접 당신을 선택했다면서요?
감독님은 어차피 한국어를 모르니까 제가 나온 드라마를 음소거로 설정해두고 표정과 감정으로 저를 읽었대요. 감독님의 아내이기도 한 밀라가 남편이 며칠 동안 랩톱을 끌어안고 내 영상을 보았다고 말해주었어요. 특히 <조선총잡이>와 <밤을 걷는 선비>를 많이 봤다더군요.
당신을 잘 모르는 문화권의 사람에게 새롭게 인정받고 평가받는 기분은 정말 짜릿할 것 같은데요?
나를 캐스팅한 과정을 듣고 너무나 고마웠어요. 아시아에서의 인지도로 캐스팅한 게 아니라고 했죠. 사실 특별 출연의 경우 작품을 보지 않고 인지도로만 캐스팅할 수도 있으니까요. 애정을 가지고 연락을 준 것에 감사했어요. 아니 감동했어요. 내 분량은 많지 않지만 그 경험으로 많은 것을 꿈꾸고 계획할 수 있었기에 좋은 시간이었죠. 어쨌거나 늘 작품을 하지만 매년 아쉬움이 남아요. 이른바 ‘대박’이 터지진 않더라도 좋은 작품으로 만났으면 좋겠어요. 요즘은 내가 욕심이 많다는 생각도 들고요.
시청률에 아쉬움이 많나 봐요. 제일 아픈 손가락인 작품은 뭐예요?
아무래도 <밤을 걷는 선비>죠. 정말 창의적이고 새로운 작품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러모로 설득력이 떨어졌던 것 같아요. 작년에 욕심을 많이 부렸거든요. 완전히 다른 연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전체적으로 봤을 때 시청자들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한 것 같아서 좀 아쉽죠.
우리나라에서 ‘독특한 작품’은 성공하기 어렵죠.
우리나라에서 장르물을 성공시키는 건 쉽지 않아요. 시청자들은 드라마에서라도 밝은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해요. 저는 그래도 그런 작품을 계속 하는 게 맞다고 봐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작품은, 시청률이 안 나오더라도 배우에게는 남는 게 있어요.
그나저나 어떻게 지냈어요? 워낙 작품이 아니면 보기 어려워요! 여전히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지도 않고.
음… 예능을 나가기에는 애매한 위치랄까요? 예를 들어 제 본연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면서 재미를 줄 수 있다면 할 만할 거 같은데 나머지는 제가 그 역량이 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객관식을 준비했어요. 만약 이준기가 이 중 꼭 한 편의 예능에 나가야 한다면? <진짜 사나이>, <삼시세끼>, <런닝맨>, <SNL 코리아>, <냉장고를 부탁해> 중 어떤 것?
꼭 하나를 해야 한다면 <삼시세끼>를 꼽겠어요. 제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요리도 좋아하고, 몸 쓰는 것도 좋아하니까.
촬영이 끝난 후에는 어떻게 지내요?
완전 동면상태예요. 매년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 여행을 가는데 그게 제일 재미있어요. 작년엔 후쿠오카, 재작년에는 오키나와를 다녀왔고, 그 전엔 하와이에 다녀왔어요. 저희 부모님은 쉬면서 다니는 여행을 좋아하셔서 요즘은 일본에 자주 가죠.
예약부터 진행까지 직접 해요?
제가 가족 여행을 준비해보니까 매니저들이 새삼 참 고맙더라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다 ‘매니지먼트’를 해야 하는 거예요. 계획을 짜야 하고, 예약을 하고, 차도 빌리고 그러다 보니 매니저의 수고를 알게 되었어요.
쉬면서 운동도 많이 하나요?
저는 근육 만드는 것보다 뛰어다니는 걸 좋아해요. 활동적인 것. 그래서 작품도 액션물을 고집해서 팬들이 속상해하기도 하죠.
다칠까 봐 걱정하는 것 아닐까요?
그것도 있는데, 좀 알콩달콩한 사랑이야기나 자연스러운 일상을 담은 연기도 보고 싶어 하는데 항상 뛰어 다니니까 아쉬워하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액션을 선호하는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요?
액션도 늘 가능한 건 아니니까요, 액션 연기처럼 신체를 많이 이용하는 연기를 할 수 있는 것도 배우로서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대신 더 힘들고 부상도 수없이 따르죠. 체력이 가능할 때까지는 좀 해보고 싶어요.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건, 이 인터뷰가 마지막일지도 몰라요. 내년부터는 좀 평범한 걸 해보고 싶어요. <보보경심 : 려>는 그렇게 활극은 아니에요. 배우들도 많이 나오고요. 그전까지는 대부분 제가 원톱으로 끌어갔다면 이 작품은 좀 분배가 되어 있어요.
<보보경심 : 려>는 중국의 베스트셀러고, 우리나라식으로 하면 <모래시계>에 비할 만한 초인기 드라마라던데 어떤 역할을 맡았어요?
왕건의 넷째 아들 왕소 역을 맡았어요. 처음에는 왕권과는 먼 왕자였음에도 훗날 광종이 되는 인물이에요. ‘개늑대’라고 불릴 만큼 거친 성격이었다가 아이유 씨가 맡은 혜수와의 로맨스도 있고,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재미도 있죠. 100 퍼센트 사전제작이라 연휴가 지나면 바로 시작할 것 같아요. 궁에 입성하면서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속에서 왕권에 대한 욕망을 가지게 되는 과정이 재미있어요.
중국판 <보보경심>은 봤어요?
10회 분량까지만 봤어요. <밤에 걷는 선비>도 그렇고, 원작 드라마가 있더라도 작품을 이해하는 데 참고할 정도로만 보는 편이에요.
한국판을 맡은 김규태 감독님과는 처음이죠?
작품을 선택한 큰 이유 중 하나가 김규태 감독님이죠. <그 겨울, 바람이 분다> 등이 감독님 작품인데, 영상미가 탁월한 감독님과 함께하면 많이 배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어떤 배우를 생각하고 계신지 먼저 여쭤보기도 했었죠.
당신은 이 작품으로 무엇을 얻고 싶어요?
무엇인가를 얻어야 한다면 결국 시청자의 사랑이 아닐까요? 결국 배우는 관객과 교감해야 하니까요. 스스로는 ‛내 젊은 날의 마지막 사극이다’ 라고 생각하며 광종 역에 몰입하고 있죠.
막 서른이 되었을 때 ‘나이가 들어도 순수함을 잃지 않고 싶다’라고 했었는데, 어때요? 잘 가고 있어요?
순수함은 잘 가고 있는 거 같아요. 점점 더 순수해져서 없어질 거 같아요. 내 자신이 없어질 정도로 투명해지고 있달까….
하하. 어떤 의미예요? 순수함에도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뭐랄까, 오히려 삶이 지극히 단순해졌어요. 전보다 더욱더 그래요. 작품 아니면 개인적으로 쉬는 것밖에 없어요. 쉴 때도 돌아다니면서 레저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집에 있어요.
하지만 누구보다 흥이 있잖아요. 제 휴대폰에는 아직 캐나다 뒤풀이 영상이 있다고요. 아이돌로 데뷔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요.
술 마시면서 노래 부르고 춤췄죠? 그게 순수한 거예요. 이상한 데 안 가잖아요. 지금도 행사 끝나면 한 방에 모여서 놀아요. 어떤 사람들은 어디 유명한 클럽이라도 갔으면 좋겠다 싶겠지만 저는 소박하게 보내요. 그래도 고생한 스태프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어서, 다음에는 클럽을 한번 빌려 보려고 해요. 정말 다음 생에는 아이돌로 태어나야겠어요. 요즘 아이돌 친구들 보면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게 정말 부러워요.
스캔들이 지나치게 없는 거 아니에요? 열애설도 한 번 없고.
너무 없고, 너무 재미가 없죠. 연예인이 스캔들도 빵빵 터지고, 기사는 안 터져도 ‘찌라시’는 좀 돌아줘야 인기가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점점 사람을 대할 때 조심스러워져요. 촬영 끝나면 다 같이 놀자고 나섰는데, 요샌 괜히 불편하게 하는 건가 싶기도 해요. 이것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당신은 열정적이고 그럼에도 늘 겸손하고 예의바르죠. 그런 모범적인 모습이 때로 당신에게 부담으로 다가오지는 않나요?
날 그렇게 좋게 봐주어 고마워요! 그냥 저는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지하게 대할 수 밖에 없어요. 이 모든 것이 가식이라면 인생이 얼마나 괴롭고 끔찍하겠어요? 틀어진 모습을 보일 수도 있겠지만, 진정성을 가진 내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들이 내게 실망하고 등을 돌린다면 정말 가슴이 아플 것 같네요.
이 인터뷰가 끝나면 이준익 감독의< 동주> 시사회에 간다면서요. 두 사람은 여전히 특별한 인연인가요?
특별한 인연이죠. 제가 이렇게 ‛열 일’ 하는 배우로 살게 해주신 분이죠. 한동안 연락을 못 드려도 집 나간 자식 챙기는 아버지처럼 절 바라봐주세요. 감독님이 제 은인이라고 말씀드리면 나무라세요.“ 다 네가 한 거니까 인마 딴 데 가서 그런 소리 좀 하지 마!”라면서. 요즘 젊은 사람들과 친구처럼 지낸다고 저한테도 친구처럼 지내자고 하시는데, 어서 다음 작품에 절 캐스팅해달라고 졸라야겠어요!
곧 설인데 설은 어떻게 보낼 생각이에요?
설 당일에 가서 친척들 인사하고, 조카들 세배 받고 세뱃돈 주죠.
결혼해야 세배를 받을 수 있는데….
결혼, 하고 싶어요. 이제 서른다섯이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 말이죠. 결혼한다고 생각하면 겁만 난다니까.
결혼까진 아니어도 어느덧 선배가 되었어요,
예전에 절 아기처럼 보시던 선배님들도 이제 동료 연기자처럼 대해주시죠. “준기 너도 이제 많이 했지?” 이런 식이죠. 그만큼 더 부담감도 있어요. 이번 작품은 젊은 배우들이 많아요. 어린 친구들보다 솔선수범하고 잘해야죠. 나이가 많고 경력만 많다고 선배는 아니니까.
현장에서 잘 챙겨주는 좋은 형이라던데요?
요새는 현(변백현)이가 너무 좋더라고요. 후배들 다 두루두루 챙기는데 특히 현이가 눈길이 가요. 그래서 말 한 마디를 해도 현이한테 하게 돼요. 집이 바로 옆이라서 자주 보는데 연기 경력도 짧으니까 더 잘 챙겨주고 싶고, 보면 자꾸 웃음이 나요. 저도 나이가 먹었나 봐요, 진짜.
올해 계획은 다 세웠어요?
<보보경심 : 려>를 찍으면서 다른 것을 모색해야 할 거 같아요. 올해는 좀 더 공격적으로 하고 싶어요. 그간 드라마 쪽에 치중했으니, 오랜만에 영화 작업도 해야겠어요. 우선 왕건의 넷째 아들로 멋지게 살아보려고요. 왕이라니! 얼마만의 신분상승인지!
- 에디터
- 허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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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서진, 김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