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쉽다. 쉽게 보고, 쉽게 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보는 드라마는 무엇일까? 다섯 명의 칼럼니스트가 지금 보고 있는 작품과 기대되는 작품에 대해 말했다.

엄마의 채널
50대 후반의 엄마가 보는 드라마가 내가 보는 드라마다. 그녀는 올드 스쿨형 TV 시청자다. IPTV, 온 디맨드, 유튜브, 넷플릭스 등등과 전혀 상관없다. TV를 켜고 리모컨을 돌려서 보던 채널의 정해진 시간대 드라마를 본다. 엄마 세대를 보면 전통적 방송 편성의 힘을 알 수 있다. 익숙한 시간대의 익숙한 이야기를 선호한다. <더 겟다운>이나 듣도 보도 못한 일본 드라마를 보는 내 주변의 친구들과 엄마의 세계는 아주 멀다. 주말에 가끔 엄마 옆에 앉아 뭘 보는지 살핀다. 그녀는 요즘 <불어라 미풍아>를 본다. 만둣집에서 일하는 여자가 <삼시세끼> 나온 남자에게 어색한 말투로 말한다. “우리 이혼혀유.” 저게 뭐지? 무슨 상황이지? 저건 어디 말이지? 나는 엄마에게 묻는다. “저게 무슨 상황이에요?” “모른다.” 응? 매번 본다면서 왜 모르지? <불어라 미풍아>는 한국형 익스트림 페이소스 드라마에 속한다. 즉 ‘막장 드라마’로 불린다. 탈북녀 미풍(임지연)과 인권변호사 장고(손호준)가 천억원대 유산 상속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도 사랑에 성공한다. 아직은 성공하지 않았지만 드라마 종영이 가까워지니까 곧 미풍이가 이길 것이다. 나는 엄마의 세계를 이해하려 <불어라 미풍아>를 본다. 이런 드라마의 엉성한 전개에도 이유는 있다. 회상 장면이 많은 이유는 엄마 같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열심히 보지 않기 때문이다. 엄마는 이런 드라마를 “그냥 틀어둔다”고 표현했다. 마늘 빻으며 TV를 보는데 멸치국물이 다 우려졌으면 가스레인지를 끄러 가야 한다. <불어라 미풍아>는 장면을 놓쳐도 걱정 없다. 등장인물이 계속 지난일을 말 해준다. 회상도 친절하게 반복된다. 젊은 시청자들은 이걸 ‘고구마’ 라고 부른다. 이런 드라마에서는 답답하고 고생하는 여자 주인공과 악역이 있다. <불어라 미풍아>에도 미풍이를 엄청나게 괴롭히는 신애가 있다. 갈등 구조가 익숙하면 보기에도 편하다. 바보처럼 당하는 여자주인공은 드라마의 종영쯤엔 확실히 복수한다. 신애도 분명히 나락으로 떨어진다. 엄마에게는 서사의 디테일과 치밀한 묘사보다는 어렴풋이 아는 이야기가 나오는 게 더 중요하다. <불어라 미풍아>를 보며 깨달은 게 많다. 엄마에게 막장 드라마는 일종의 엘리베이터 음악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집 안의 공백을 메우는 시청각 콘텐츠다. 아들은 자기 일과 자기 여자 만나기에만 바빠서 집을 비운다. 평생 애들 키우고 일만 하다 거실에 혼자 남은 엄마는 뭐가 좋고 나쁜지를 떠나 뭘 골라야 하는지에 대한 취향의 선택지 자체가 없다. 그때 가장 눈에 띄는 건 가장 익숙한 줄거리와 가장 자극적인 전개다. 의아했던 장면의 맥락은 이랬다. 탈북녀 미풍이는 우여곡절 끝에 장고와 결혼한다. 장고는 미풍이와 살려고 런던 연수 기회까지 마다한다. 장고 엄마는 미풍이를 찾아가 “내 아들 앞날 막지 말고 이혼하라”고 일갈한다. 미풍이는 그 말을 듣고 장고에게 순순히 이야기한다. “ 우리 이혼혀유”. 나는 뭔가 싶었던 것이 엄마에게는 큰 위화감이 없다. 엄마와 나 사이엔 그 정도의 거리감이 있다. 마지막으로 이 드라마의 아주 흥미로운 지점은 탈북자 여자주인공이다. 탈북자 여주인공이 전면에서 로맨스 서사를 이끄는 건 내가 알기로는 <불어라 미풍아>가 처음이다. 런던에서 막스 앤 스펜서의 단골이었던 북한의 엘리트 계층 태영호 전공사도 <불어라 미풍아>를 열심히 봤다고 했다. 그저 그래 보이는 막장 드라마에도 중년의 취향이나 미묘한 남북 정세 같은 동시대적 징후가 들어 있다. 그 재미와 엄마 옆에 있어야 한다는 알량한 의무감에 <불어라 미풍아>를 본다. 미안하지만 오래 곁에 있지는 못한다. – 박찬용 (<에스콰이어> 피처 에디터)

소문난 잔치의 결과
큰일 났다. 200억원 넘게 들이부었다는데, 당최 돈을 어디에 썼는지 모르겠다. 다만 배우의 높은 몸값만 추정될 뿐이다. SBS 수목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를 둘러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2004년 MBC <대장금> 이후 13년 만의 드라마 복귀인 이영애를 내세우고도 흥행 빨간 불이 켜졌다. ‘기본적인’ 홍보를 했다가 된서리를 맞는 형국이다. <사임당>은 남들 하는 만큼 뿌린 자화자찬 홍보 자료가 과한 ‘ 언론 플레이’라는 역풍을 맞았다. 대중의 기대는 그만큼 컸다. 상당히 어지럽고 어수선한 전개지만, 구조는 사실 단순하다. 고달픈 워‘ 킹맘’ 서지윤(이영애)이 우연히 사임당(이영애)의 비망록을 발견한 후 조선으로 시간 이동하면서 시작된다. 사임당의 빛나는 예술혼, 진보적이고 주체적인 사상, 그리고 불멸의 사랑을 전하겠단다. 문제는 개연성이 심하게 떨어지고 배우들의 연기까지 어설퍼 몰입도가 낮다는 점이다. 탄탄하지 못한 얼개, 현대와 조선을 이어주는 조악한 컴퓨터 그래픽은 또 어떤가. <대장금>과 같은 묵직한 이야기를 기대했던 중장년층에게 이영애가 출연하는 퓨전 사극은 낯설다는 분위기다. 그렇다고 젊은 시청자들에게 소구력 높은 반짝이는 드라마가 아니다. <별에서 온 그대>를 시작으로 <시그널>, <푸른 바다의 전설>, <도깨비>까지 너무도 많이 본 시간 이동 설정은 <사임당>의 강점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비교 대상만 될 뿐이다. 게다가 엄청난 제작비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간접광고(PPL)는 공해 수준이다. 이야기에 좀 집중하려고 하면 이영애가 광고 모델로 활동하는 제품들이 툭툭 튀어나와 맥을 끊어놓는다. 이 드라마는 당초 문화와 여성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잘못 소비된 ‘현모양처 사임당’을 바로 세우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학자들의 평가가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율곡 이이를 비롯한 4남 3녀를 인격과 학식, 예술혼이 뛰어난 인물로 키워낸 어머니이기 전에 천재 화가라는 공통의 인식이 존재한다. 조선을 구태의연한 유교의 나라로 만들어 지배를 정당화하려 했던 일제, 민족주의적 영웅으로 추앙해 독재를 공고히 하려 했던 군사정권을 거치며 사임당은 ‘민족의 어머니’ 가 됐다. 그래서 사임당을 재조명하겠다는 출발은 좋았다. 이영애에게 거금을 안기며 안방극장에 복귀시킨 제작사의 과감한 베팅과 부가 사업 추진력은 인정받을 만하다. 그런데 딱 여기까지다.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시청자들을 만족시키기에는 이 드라마 한참 부족하다. 제작진과 배우 모두 안일했다. 심지어 평일프 라임 시간대 드라마로 흔치 않은 긴 흐름의 30부작이다. 갈 길은 멀기만 한데. – 표재민(한국PD연합회 PD저널취재팀장)

회사에서 생긴 일
<도둑비서들>이라는 소설이 있다. 맨해튼의 거대 언론사 ‘타이탄’ 에서 박봉을 받고 일하는 여성 비서들이 회사의 눈먼 돈을 횡령해 학자금 대출을 갚는 이야기다. 학자금 대출만 갚고 손 털려던 주인공은 횡령에 ‘연대’하겠다는 비서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꼬리 자르기에 실패한다. 그 다음부터는 통제 밖이다. 횡령은 저임금 여성 비서들의 학자금 대출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 둔갑하고 주인공은 ‘뉴욕을 바꾸는 25인’이 된다. 어쩐지 <김과장>과 겹쳐진다. 한탕 해먹고 튈 생각이었던 프로 삥땅러 김성룡이 본의 아니게테 ‘헤란로의 의인’이 된 것처럼. 시청률 7%로 평범하게 출발한 <김과장>이 매주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동시간대 1위를 이어가고 있다. 어디 하나 안 썩은 데 없는 이 좋은 대한민국에서 ‘열삥(열심히 삥땅)’을 모토로 ‘성실’하게 해먹어온 김 과장은 부패한 대기업의 분식회계를 위해 경력직으로 채용된다. 필요할 때 쓰고 버릴 용도였던 김 과장은 허랑한 임원들의 욕받이, 즉 경리부에 들어와 고용자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피고용자의 모습으로 영웅이 돼 간다. 그의 의로운 행적은 이러하다. 유흥비로 탕진한 회장아 들의 영업비 지출 내역을 승인하지 않는 반려 의인, 노조 탄압과 맞서는 노조 의인,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데,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비서였던 광숙이를 외면하지 않는 동료 의인! 회사는 누구에게나 먹이사슬로 존재한다. 먹고 먹힌다. 쓰고 버린다. 먹고 쓰는 사람들의 회사와 먹히고 버려지는 사람들의 회사는 다르다. <김과장>이 직장인들의 공감대를 얻으며 시청률 고공행진을 기록하고 있는 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먹히고 버려지는 사람들이 꿈틀거리고 대꾸하고 맞서고 싸우기 때문이다. 경리부 에이스 윤하경 대리는 매일같이 듣는 본부장과 회계부장으로부터의 막말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대든다. 의인 김 과장 위에 돌직구 윤 대리가 있는 셈이다. <도둑비서들>이 회사의 돈을 착복하는 데 개의치 않았던 건 성추행, 저임금 등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조직에 이골이 났기 때문이다. 그들의 횡령이 소득불평등과 직장 내 성차별에 대한 풍자였듯이 <김과장>은 생계를 볼모로 이뤄지는 직장에서의 악습과 구태하고 폭력적인 상하관계에 대한 유쾌한 하극상이다. “과장님, 열삥하세요!” 극중 광숙이가 김 과장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분식회계니 탈세니 하는 말들 앞에서 열삥은 차라리 순정하게 들린다. – 박혜진(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