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 없이 보낸 하루
소음도 디톡스가 가능할까? 연희동 앤트러사이트에서 보낸 고요한 하루의 기록.
정적을 파는 공간
오늘도 집 앞 카페로 향했다. 형형색색의 유혹을 피해 업무 집중도를 바짝 높이는 것이 이 여정의 주된 목적이므로, 노트북이나 휴대폰, 그 외 내키지는 않지만 꼭 필요한 물건을 꼼꼼히 내 몸에 싣는다.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서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작은 업무 환경을 조성하고 나면, 좋아하는 음료와 디저트를 주문한다. 이 여정까지는 ‘출근’치고 꽤 낭만적이다. 다만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몇 배는 증폭되어 들리는 소리가 순식간에 참기 힘든 소음으로 변한다. 물론 그 누구에게도 잘못이 없다는 걸 잘 안다. 이곳은 업무를 위한 공간도, 도서관도 아닌, 카페니까. 실제로 도서관에 방문해본 적이 있지만, 숨막히는 분위기는 싫다. 그렇다고 공유 오피스에 들어가기에는 비용이 부담스럽다. 결국 몇 번이고 장소를 옮겨 다니며 내 컨디션에 맞는 공간을 찾다가, 우연히 ‘정적을 판다’는 콘셉트의 카페 리스트를 발견했다.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해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나와 주파수가 잘 맞을 것이 분명했다. 대부분, 사진을 담는 소리와 말소리를 삼가달라는 안내 문구가 벽에 붙어 있는 것은 물론, 자연과 공간이 적절한 조화를 이뤄 사유와 사색을 즐기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중 앤트러사이트 서교점은 공간을 채우는 배경 음악이 없어 커피를 따르는 소리까지 들린다고 했다. 물론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므로 도서관처럼 고요하지는 않지만, 작은 기척이 적당히 들리는 정도라고. 넓은 통유리창으로 계절이 변화하는 풍경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것도 이곳의 장점 중 하나인데, 이건 앤트러사이트 연희점과도 닮았다. 겨울이 눈앞에 다가온 어느 아침 10시. 노트북을 들고 서교점 대신 연희점으로 발걸음을 재촉한 것은, 조용하고 고즈넉한 동네 분위기를 닮은 공간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빛을 흡수한 검정의 고요를 담은 건물 입구의 유리문을 부드럽게 열고 들어서자, 공간의 깊숙한 곳까지 가득 들어찬 가을볕이 다정히 나를 반겼다.
빛과 그림자
앤트러사이트 연희점 1층은 테이크아웃 고객을 위한 공간이다. 따라서 오전에는 에너지가 느껴지는 배경음을 선곡하기도 한다. 노출 콘크리트 벽 아래 펼쳐진 긴 평상은, 테이블과 의자 역할을 동시에 하는데, 이곳에서 따뜻한 볕을 느끼며 혼자 커피를 기다리거나, 동행과 한 방향으로 나란히 앉아 통유리창 너머 연희동의 일상을 엿볼 수도 있다. 천천히 둘러보기 위해 일단 블렌딩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앤트러사이트 하우스블렌드는 공기와 꿈, 파블로네루다, 나스메소세키, 버터팻트리오, 윌리엄 블레이크로 매일 다르게 준비된다. 추천 블렌드는 다크로스팅의 다양한 플레이버를 느낄 수 있는 윌리엄 블레이크. 진하고 무게감 있는 단맛을 느낄 수 있다. 산뜻하고 부드러운 질감을 느끼고 싶다면, 공기와 꿈을 택해도 좋다. 모두 아메리카노와 라테 등 다양한 메뉴로 즐길 수 있고, 커피와 잘 어울리는 파운드 케이크와 레몬 마들렌도 준비되어 있다. 단, 디저트 메뉴는 계절에 따라 바뀐다.
긴 평상 뒤로는 커피 교육이 이루어지는 랩실과 거대한 로스팅 기계가 자리한다. 바로 옆에는 거대한 문이 위치하는데, 이 문을 힘껏 열면 2층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만날 수 있다. 앤트러사이트의 대표는 연희점에 대해 이렇게 덧붙인다. “직관적인 느낌을 살리되, 불필요한 요소는 최대한 배제하고, 자신만의 시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1층에서 스태프에게 주문을 하고, 2층으로 올라가 자리에 앉으면 직접 자리로 서빙되는 방식입니다. 바리스타의 움직임은 고객이 음료를 받을 1층을 제외하고는 2층 주방 내부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카페’라는 공간이 갖고 있는 움직임과 소리를 배제해 정적인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2층 역시, 통유리창 너머로 연희동의 일상과 그날의 날씨 등을 느낄 수 있는데, 이것들은 각자의 움직임을 갖고 있습니다. 정적인 동시에 동적인 요소를 모두 갖춘 이곳을 찾아오는 모든 분들이 이런 요소를 온전히 즐기고 돌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언뜻 들으면 서교점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연희점은 서교점과 다른 비밀을 숨기고 있다. 바로 ‘검은 통로’라 불리는 그림자 공간이 그것이다.
자기만의 방
두텁고 거대한 1층의 문을 열어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순간, 적막과 함께 어둠이 찾아왔다. 단절과 어둠에 조금 익숙해졌을 때,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길지 않은 복도를 따라 걷자,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 역시 최소한의 조명을 사용했다. 예고 없이 만난 검은 통로는 생각보다 신선한 감정을 안겨주었다. “다소 어두운 통로를 거쳐 계단을 조심스럽게 걸어 올라가면, 다시 넓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 빛이 하나의 사유를 만들어내길 바랐어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마주했을 때, 잊고 있었던 어떤 감각을 깨우길 바라는 마음으로 의도된 공간이죠.” 대표의 말을 들으며,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자기만의 방>을 떠올렸다. 방문을 닫으면 외부의 소음은 차단된다. 하지만 여전히 공간은 외부의 세계로 연결되어 있다. 사람은 어울리면서도 혼자이고 싶어 한다. 홀로 있으면서도 어울려 살아간다. 하지만 진정한 열매는 침묵과 고독 속에 핀다고 했다. 사색과 사유를 통해 성장을 도모하는 자기만의 방. 짧은 순간이더라도 검은 통로를 걷게 된다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며 걷기보다는 홀로 걸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계단을 올라 다시 문 하나를 밀었더니,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1층의 풍경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어두운 조명과 직선과 곡선을 사용해 꾸며진 2층은, 오렌지색의 긴 평상과 긴 테이블이 자리한다. 이는 베이크 패널 소재로, 소재 특성상 빛에 의해 점차 색이 진하게 변한다고. 변화와 성장에 대한 앤트러사이트의 의지를 상징하는 오브제이기도 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좌석은 통유리창을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연희동의 가을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좌석에 자리 잡은 뒤, 그제야 노트북을 펼쳤다. 바쁘게 일을 하다가도 틈틈이 작은 커피잔을 손에 꼭 쥐고 몇 분간 멍하니 통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은희경 작가의 <빛의 과거>를 읽기도, 눈앞에 놓인 레몬 마들렌에 온전히 집중하기도 했다. 이은주 작가의 시에 등장하는 ‘파도가 종알대도 편히 누운 수평선’처럼 ‘고요를 수북이 쌓아놓고 흥청망청’ 썼다(<소음 디톡스> 中).
덧붙여, 앤트러사이트를 조금 더 재미있게 즐기는 방법도 있다. 그날 기분에 따라 지점을 선택해 방문하고 각 공간의 색다른 매력을 느껴보는 것. “앤트러사이트 전 지점은 하나의 결을 가지고 있지만, 각자 방향성과 특징을 달리합니다. 따라서 서교점만 가던 사람이 한남점을 가면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거나, 연희점을 가던 사람이 서교점으로 향하기도 합니다. 어떤 지점에서 마셨던 커피를 다른 지점에서 마시면 다르게 느껴진다는 재미있는 피드백도 듣곤 합니다.”
다음은 어떤 지점이 내 목적지가 될까? 집으로 돌아와 소소한 고민을 하는 밤, 유튜브에서 ‘백색소음(안정감을 주는 좋은 소음)’을 검색했다. 오늘은 ‘비 오는 소리’가 좋겠다. 반복해서 버튼을 누를 필요 없이, 3시간, 5시간 등 시간별로 재생을 할 수 있어 좋다. 마치 클렌즈 주스를 마시듯 말이다. 아, 이만하면 오늘의 소음 디톡스는 꽤 성공적인 듯하다.
주소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 135 문의 02-332-7991
RECOMMENDATION
1 오프셋커피
이름처럼 ‘일상으로부터의 간격’을 추구하는 카페. 5인 이상 입장이 제한된다. 노트북과 카메라 등 전자기기 사용과 대화를 자제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오롯이 커피를 즐길 수 있도록 한다.
주소 서울 중구 다산로20길 7 문의 @offsetcoffee
2 이이엄
차를 주문하면 2명이 가도 1인용 차 도구를 내준다. 차를 우리고 향을 음미하며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차분한 공간.
주소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9길 3 문의 @_eeum
3 대충유원지
바 형태의 테이블이 중앙에 크게 자리해 저절로 조용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혼자 가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붉은색 벽돌 인테리어가 인상적이다.
주소 서울 마포구 월드컵북로6길 37 문의 @daechung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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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랜스 에디터
- 황보선
- 포토그래퍼
- CHA HYE KY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