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산이 마주한 강릉으로 향했다. 구름이 노닐다 간다는 신선의 땅, 안반데기를 걸었고, 싱그러운 생기가 가득한 제철 음식을 맛봤으며, 바다를 내려다보는 6성급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즐긴 신선놀음이었다.

1 경포대와 어우러진 씨마크호텔의 인피니티풀, 2 코스를 맛볼 수 있는 씨마크호텔의 셰프스 테이블. 3 여유로움이 가득한 안반데기 풍경. 4 바다를 끼고 달릴 수 있는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 헌화로. 낭만이 숨쉬는 7번 도로다. 5 중앙시장의 명물, 아이스크림 호떡. 6 헌화로 근처 맛집인 항구마차에서 맛본 겨울 제철 가자미회 무침. 7 씨마크호텔의 더 레스토랑에서 찾은 제철 보양식, 영양솥밥. 

1 경포대와 어우러진 씨마크호텔의 인피니티풀, 2 코스를 맛볼 수 있는 씨마크호텔의 셰프스 테이블. 3 여유로움이 가득한 안반데기 풍경. 4 바다를 끼고 달릴 수 있는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 헌화로. 낭만이 숨쉬는 7번 도로다. 5 중앙시장의 명물, 아이스크림 호떡. 6 헌화로 근처 맛집인 항구마차에서 맛본 겨울 제철 가자미회 무침. 7 씨마크호텔의 더 레스토랑에서 찾은 제철 보양식, 영양솥밥. 

 

 

 

지도를 펼치면 강릉은 한반도의 등줄기에서 찾을 수 있다. 서쪽으로는 태백산맥이 뻗어 있고, 동쪽으로는 동해가 이어진다. 가을이 되면 기암 괴석으로 뒤덮인 제왕산으로 시작해, 산 전체가 돌로 싸여 있는 석병산, 북두칠성의 기운을 품은 칠성산, 노추산과 동대산, 피래산 등 넘실거리는 산봉우리들이 노랗고 붉은 옷으로 갈아입는다. 뜨거운 여름으로 기억 되던 해변은 가을을 맞이해 한적한 깊이를 뿜어낸다. 울창한 송림병풍과 조화를 이룬 동해안의 대표 해변으로 꼽히는 경포해변, 수심이 얕고 바닷물이 맑은 주문진해변, 소금강과 진고개로 연결된 연곡해변, 최고의 일출을 담아내는 정동진해변, 아스라한 풍경의 옥계해변은 또 어떤가! 마디마디마다 다른 느낌의 해변을 헤아리자면 그 수가 20개에 이른다.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산과 바다에서 온 풍요로운 맛을 생각하니, 출발 전부터 흐뭇함이 밀려왔다.

강릉으로 향하는 길에는 촉촉한 가을비가 내렸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계절의 온도가 한 뼘쯤 더 달라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해발 685m의 고도에서 깎아지른 듯한 계곡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 대관령에는 하얀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다’는 문장 그대로였다. 달려야 할 차는 비상등을 켜고, 조심스레 기어나갔다. 눈앞에서 안개가 걷힐 때마다 시시각각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마치 겹겹이 다른 강릉의 신비로운 풍경을 급히 보다가 체하지 말고, 천천히 음미하며 삼키라는 하늘의 배려 같았다.

구름 위의 땅, 안반데기
아침 일찍, 강릉에 온 이유인 안반데기부터 찾았다. 여행작가들에게 ‘대한민국에서 나만 즐기고픈 여행지’를 물었을 때, 하나같이 극찬한 동네이기 때문이었다. 이유인즉, 어느 방향이든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그들의 설명은 솔깃했다. 안반데기는 백두대간의 우묵한 고지대에 터를 잡은 하늘 아래 첫 동네다. 고루포기산과 옥녀봉을 잇는 해발 1100m 능선쯤에 있다. 안반데기의 ‘안반’은 떡메로 반죽을 내리칠 때 쓰는 오목하고 넓은 통나무 받침대를, ‘데기’는 평평한 땅을 일컫는다. 1965년부터 산을 깎아서 개간하고 화전민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됐다. 그래서 이곳은 국내 최대 고랭지 채소 재배 지역이기도 하다. 산이 곧 배추밭이고, 배추밭이 곧 산인 묘한 곳이다. 강릉시 왕산면에 속하지만, 강릉시내보다 횡계에서 더 가깝다. 차를 타고, 격한 S자 라인 능선을 부지런히 올라야 한다. 어지러움을 동반하는, 쉽지 않은 길이었다. 어제와 다르게 하늘은 눈이 시릴 만큼 화창했다. 구름 위의 동네를 걸으려던 꿈은 파란 하늘로 만족해야만 했으니,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준비성 없는 여행객을 꾸짖는 호된 찬 바람을 헤치며, 강릉바우길 17구간에 속한 안반데기 운유(雲遊)길을 걸어 올라갔다. 백두대간을 따라 경포와 정동진을 지나는 운유길은 안반데기 구간 6km와 고루포기산 구산 4km를 합쳐 20km에 달한다. 운유촌에서 멍에전망대를 거쳐 피득령, 일출전망대, 성황당을 찍고 되돌아오는 6km 코스를 쉬엄쉬엄 느리게 걸으면 3시간이 걸린다. 들숨과 날숨이 거칠게 오갔다. 그리고 다리에 힘이 풀릴 때쯤 일출전망대에 다다랐다. 기다렸다는 듯이 탄성이 터졌다. 사방 거칠 것이 없는 풍경이 압권이다. 두 발 아래 펼쳐진 산자락을 내려다보고, 푸른 하늘을 마주 보는 경험이라니! 수확 중인 진초록의 배추밭과 황토밭, 저 멀리 하늘과 맞닿은 동해가 눈앞에서 어우러진다. 마치 한 폭의 수묵화 같았다. 파란 하늘 아래, 하얀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모습은 어딘지 이국적인 느낌까지 자아냈다. 자연이 연출하는 장관도 멋졌지만, 척박한 땅을 일궈낸 사람들의 땀을 생각하면 저절로 경건해지는 순간이었다.

 

바다를 닮은 길
이어 정동진 7번 국도를 향해 달렸다. 심곡항에서 금진항까지, 바다를 끼고 달리는 헌화로는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다.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과 풍경을 앗아갈 듯 넘실거리는 에메랄드 빛깔 바다, 하얀 파도의 조화가 예술이다 싶더니, 이어 평온한 백사장이 잔잔하게 드리워지고, 다시금 웅장한 기암괴석이 거칠게 모습을 드러낸다. 숨이 막힐 듯 변화무쌍한 풍경이었다. 그 매력을 셈하자니 2.4km의 길이 너무나 짧게 느껴진다. 다시 조용한 어촌마을인 심곡항으로 돌아와 헌화로의 입구로 들어섰다. 여기서는 절벽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에서 바닷바람 맡으며 천천히 걷기를 권한다. 나무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확 트인 전망과 함께 아담한 정자 헌화정이 나타나는데, 특별한 일출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는 숨은 절경지로 꼽힌다. 안반데기와는 또 다른 시원함이 마음에 스민다. 저 멀리 바다에는 서핑보드에 몸을 싣는 서퍼가 있는가 하면, 낚싯대 하나를 드리우고 묵묵하게 인생을 낚는 외로운 강태공이 있다. 바다와 절벽사이를 자전거를 타고 질주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바다의 숨결이 맞닿은 길을 즐기는 방법은 저마다 달랐다.

 

1 씨마크호텔의 더 레스토랑에서는 대관령의 신선한 우유로 만든 치즈케이크를 볼 수 있다. 2 씨마크호텔의 백미, 기품 넘치는 한옥채인 호안재. 3 경치를 바라보며 맛을 음미할 수 있는 셰프스 테이블의 테라스.  4 경포대앞 맛집 독도야의 제철 광어 물회. 5 안목해변의 미락식당을 유명하게 만든 대게 칼국수. 6 창녕 조씨 종손이 복원한, 모내기철 일꾼들의 밥상인 못밥. 7, 8 서지초가뜰에서는 직접 수확한 제철 농산물로 밥을 짓는다. 멋진 한옥에서 가지를 말리는 풍경이 여유롭다.

1 씨마크호텔의 더 레스토랑에서는 대관령의 신선한 우유로 만든 치즈케이크를 볼 수 있다. 2 씨마크호텔의 백미, 기품 넘치는 한옥채인 호안재. 3 경치를 바라보며 맛을 음미할 수 있는 셰프스 테이블의 테라스.  4 경포대앞 맛집 독도야의 제철 광어 물회. 5 안목해변의 미락식당을 유명하게 만든 대게 칼국수. 6 창녕 조씨 종손이 복원한, 모내기철 일꾼들의 밥상인 못밥. 7, 8 서지초가뜰에서는 직접 수확한 제철 농산물로 밥을 짓는다. 멋진 한옥에서 가지를 말리는 풍경이 여유롭다. 

 

 

제철의 가을 식탁
헌화로를 달리다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노란 천막의 밥집 항구마차다. 풍경에 눈이 홀리면 쉽게 지나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가로이 바다를 즐기던 주인 아저씨에게 강릉의 맛을 추천해주십사 부탁하자, “다 맛있지만 그중에서도 지금은 가자미회 무침이 최고다”라는 답이 돌아온다. 10월부터 12월까지, 가자미는 제철을 맞이한다. 가자미뿐 아니라 다양한 생선이 이맘때가 되면 수온 하강의 영향을 받아, 생선살에 윤기가 흐르고 탄력이 살아 있는 참 맛을 낸다. 특히 가자미는 단맛이 나고, 오독하게 씹는 촉감이 좋아진다. 가자미회 무침에 <한국인의 밥상>의 최불암 아저씨가 소주 다섯 병을 마셨다는 안주, 대게 칼국수를 함께 상에 올렸다. 새콤달콤한 가자미회 무침을 덜어 참기름과 김을 뿌린 밥에 석석 비비고는 볼이 터질 정도로 크게 한 숟가락을 떠 넣었다. 입에 감칠맛이 쩍쩍 달라붙는다. 11월부터 살이 올라 본격적인 맛을 낸다는 대게를 넣고 끓인 칼국수를 번갈아 뜬다. 찬은 소박하지만 맛깔스러웠다. 그는 수요일마다 가게 문을 닫고, 가족들과 밭을 일군다고 했다. 가지 조림과 배추김치, 깍두기, 양배추, 마요네즈에 버무린 사과와 배까지 직접 키운 채소와 근처 항구에서 갓 잡은 해산물이 함께 식탁에 오른다. 71년간 한결같은 맛을 낸 안주인의 손맛을 보니 그의 자부심은 당연해 보였다.

6성급 호텔에서 파도소리를 듣는 밤
지난 6월, 강릉에는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호텔 현대 경포대 부지에 국내 최초 6성급인 씨마크호텔이 들어선 것이다.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리처드 마이어가 설계를 맡은 것부터 화제였다. 일단 로비에 들어서면 경포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벽난로 앞에 놓인 테이블과 암체어가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와 에로 사리넨이 디자인한 것인 만큼 공간은 작품으로 채웠고, 인증받은 친환경 소재를 사용해 간결하게 빚어냈다. 일회용 플라스틱이 아닌 나무 소재의 칫솔 어메니티, 다이슨 선풍기, 코코맡 침구만 봐도 그 세심함이 느껴진다. 경포대의 수평선과 합을 이루는 인피니티 풀을 즐기지 못한다고 해서 아쉬워 하진 말자. 겨울에는 따스한 자쿠지가 있으니까. 도시 한옥 건축가 황두진이 설계한 한옥동 호안재 또한 백미다. 울창한 소나무에 둘러싸인 수려한 경관은 모던하게 재해석한 품격 있는 한옥의 특별함을 배가시킨다. ‘나비가 편안하게 쉬는 곳’을 뜻하는 호안재의 이름과 참 잘 어울린다. 씨마크호텔의 모든 객실 전망은 바다를 품는다. 밤바다에 나 홀로 떠 있는 기분은 어쩐지 홀가분했다. 바다가 코앞이라 파도소리만 들린다. 우아하고 조용한 하루의 마무리였다.

이튿날, 호텔에서 야심 차게 준비한 파인다이닝 셰프스 테이블과 더 레스토랑을 확인할 차례다. 이곳에서는 모두 강원도의 기후와 토양, 물의 특성이 조화를 이뤄 만들어낸 무공해 제철 식재료를 활용한다. 평창의 갈비, 강릉의 전복, 속초의 문어, 양양의 송이, 화천의 밤, 홍천의 잣, 철원의 오대쌀이 모여 관동 영양찜으로 완성되는 식이다. 연어 스테이크가 아닌 양양의 산천어 스테이크와 풍미가 깊은 삼척의 오곡쌀 버섯 리조토를 만날 수 있다. 여기에는 곰취와 참나물처럼 제철의 갖가지 나물 반찬이 곁들여진다. 강원도의 전통 요리법과 일류 셰프의 손끝이 만나, 정갈하고 건강한 재료 본연의 맛을 탁월하게 살려낸다. 물론 이 모든 맛의 조화는 아름다운 경포대를 바라보며 음미할 수 있다. 흠 잡을 곳이 없었다.

양반집 종부의 맛
강릉시 난곡동 일대를 일컫는 서지골은 예부터 쥐가 곡식을 모은다고 할만큼 넉넉하고 풍요로운 마을로 유명했다. 강릉 지역에서 유명했던 양반 가문인 창녕 조씨 일가가 조선 중기 임진왜란을 피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조선 말기에 지은 전형적인 양반가옥의 종가는 드넓은 논밭에 둘러싸여 있다. 대대로 전통을 이어온 9대 조씨 종손이 운영하는 서지초가뜰은 강릉시가 지정한 전통 한식점 1호이다. 모내기철 일꾼들에게 낸 못밥과 농한기에 이웃들과 화합하고자 나눠 먹은 질상을 복원해 선보인다.

모두 종가가 직접 텃밭에 농사를 지어 완성한 밥상이다. 장도 직접 담근다. 가자미 식혜로 담근 묵은지를 비롯해 초당두부에 갖가지 나물과 전, 해산물, 장아찌 등 10여 가지 반찬이 따라 나온다. 질상에는 쑥과 호박, 대추, 밤을 넣고 찐 씨종지떡이 추가된다. 모판에 뿌리고 남은 볍씨를 찧어 만든 떡인데, 곡식이 소진돼가던 모내기 철 귀하게 여기며 만든 전통식이다. 맛있는 밥상은 잘 키운 쌀 한 톨에서 시작된다는 종부의 신념은 맛에서 잘 전해진다. 300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송죽두견주를 빼놓으면 서운하다. 댓잎과 솔잎에 다섯 가지 곡식을 섞어 빚은 약주에 진달래꽃을 동동 띄워 한 잔 나누니, 풍류란 이런 것인가 싶다. 은은한 솔향과 쌉쌀한 뒷맛이 어우러진 술을 들이켜며 하늘을 바라본다. 황금빛 들판과 내리쬐는 가을 햇볕에 말리는 가지, 집 앞에 핀 코스모스가 시야를 메웠다. 낡았지만 기품 있는 대청 마루에 앉아 가을바람을 들이마신다. 주인아저씨가 마당에서 딴 홍시를 서울 가는 길에 여행 친구 삼으라며 손에 쥐어준다. 직접 만든 식혜도 챙기라는 조언을 잊지 않는다.

강릉에서 얻은 것은 눈과 마음의 정화였다. 황홀한 자연은 눈을 씻어주었고, 생기가 넘치는 가을 제철의 식탁은 배를 채워주었다. 마음을 토닥여준 것은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의 인정이었다. 그동안 바쁘게 흘러왔던 일상의 쉼표를 강릉에 남기고 돌아섰다. 아쉬운 발길은 다음의 쉼표를 기약하며 다독였다.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