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에 지쳐가는 입맛을 깨울 단 하나의 무기는 바로 시원한 여름 국수다. 다섯 명의 칼럼니스트가 애정을 듬뿍 담아 여름 국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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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 그것은 맑고 투명하며 천상의 식물을 착즙기로 짜낸 것처럼 청량하다. 비가 그친 새벽, 숲 속의 옹달샘에 찾아온 요정처럼 사뿐히 입술을 대면, 작년에 마신 술까지 다 깨고 눈이 뜨인다. ‘내 몸의 70%를 차지하는 수분은 피가 아니라 이 육수거든.’ 망상하며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을 움켜잡고 육수를 들이켜면 대번에 짭짤하고 감칠맛 도는 여운은 사실은 그것이 고기로부터 나온 향기롭고 진한 것임을 수줍게 고백한다. “찬 육수 추가요!”를 외치고 다시 차고 맑은 육수가 처음만큼 채워지면 그때부터가 면을 맛볼 때다. 곱게 말린 타래를 젓가락으로 슬슬 풀고, 젓가락 한 번 떼지 않고 면을 식도로 꽉 채워 넘기면 서걱이는 면은 거뭇한 곡물향을 입안에 채우며 밀려 들어간다. 이쯤 해두고 이만 논현동 평양면옥에 갈까? ‘장충동 계열’ 중 가장 기분 좋은 서비스로 일정한 맛을 내주는 영원한 클래식이다. 평양냉면에 서투른 친구와 함께라면 두말할 것 없이 우래옥에 간다. 고깃국 같은 진하디진한 육향이 낯설지 않아 초심자의 불안한 심기를 달랜다. 냉면의 드넓은 스펙트럼을 이해하는 나의 종족, 냉면요정족과 함께라면 무삼면옥도 좋은 선택이다. 각종 버섯으로 감칠맛을 보탠 연약한 육수에 봉평메밀을 매일 제분해 뽑는 면의 조화. 꽤나 낯설지만 분명 마력 있다. – 이해림(푸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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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냉면 ‘중국냉면을 좋아함’이라는 것은 울면을 좋아한다는 것만큼이나 괴이하며, 미식계의 대세가 된 평양냉면에 비하면 이상한 취미 정도로 치부되기 좋지만 그럼에도 나는 중국냉면을 먹기 위해 여름을 기다린다. 중국냉면의 맛은 부드러움에 있는 것 같다. 평양냉면의 메밀향이나 함흥냉면의 쫄깃쫄깃한 맛 대신 중국냉면을 먹을 때에는 적당히 탄력 있고 통통한 면발이 입안을 부드럽게 채운다. 육수는 닭 육수 또는 쇠고기 육수가 기본인데, 여기에 말린 해삼이나 해파리, 관자같은 중국식 고급재료가 올라간다. 취향껏 가감할 수 있는 땅콩 소스는 고소한 맛으로 균형을 이룬다. 우선 정석대로 잘 만든 중국냉면 한 그릇부터 먹어보길. 신라호텔 팔선의 중국냉면은 섬세하고 꼼꼼하다. 중국식으로 절인 채소가 고명으로 살짝 올라가는데, 이 절임이 한 수다. 만만치 않은 가격이지만 언제나 즐겁게 지갑을 꺼내게 된다. 정석은 아니지만, 잃어버린 맛을 찾고 싶을 때에는 마담밍의 냉짬뽕을 종종 먹는다. 중국냉면을 기본으로, 여기에 매운 육수와 특제 다대기로 엄청나게 매운맛이 클라이맥스로 몰아치지만, 다 먹은 후에는 이게 여름이다 싶은 맛이다. 같이 중국냉면 먹으러 갈 사람? – 허윤선(<얼루어> 피처 디렉터)

 

소바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백화점에 가는 날은 지하 푸드코트에서 냉소바를 먹는 선물같은 날이었다. 결국 나는 ‘라면보다 소바!’를 강력 주장하는 ‘소바 덕후’로 성장했다. 메밀소바 맛의 80%는 ‘단짠’의 상징인 쯔유가 결정한다. 짠 듯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내 초딩 입맛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점심 메뉴로 냉소바를 먹을 결심을 했다면 회사 앞 가로수길 미미면가로 향한다. 소규모 식당이지만 이미 맛집으로 소문이 자자해 오전 11시 30분에는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서야 미미면가의 한켠에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최근에는 리모델링을 해 바(Bar) 자리도 늘어나 ‘혼밥’하기도 부끄럽지 않다. ‘최애’ 메뉴는 튀김을 올린 냉소바. 면에 쯔유를 부어 먹는 ‘일체형 소바’, 즉 붓가케소바다. 늘 가지튀김과 새우튀김 냉소바 사이에서 갈등한다. 물론 원한다면 토핑을 추가할 수도 있다. 쯔유에 송송 썬 쪽파와 부드럽게 간 무, 와사비와 김까지 더해지면 한 폭의 조화로운 그림 같다. 여기에 달게 절인 방울토마토까지 합세하면 ‘미미면가의 소바를 한 번도 먹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는 전설을 이해하게 된다. 일체형 소바가 아닌 면과 쯔유가 따로 나오는 ‘츠케소바’를 먹을 때는 면발이 촉촉한지부터 확인하자. 뜨거운 물에 면을 삶고 재빨리 찬물에 잘 비벼 씻은 것은 탱탱하고 부드러워 쯔유에 잘 흡수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뻣뻣하고 말라붙기 쉽다. 쯔유와 잘 어우러지지 않은 소바는 당연히 싱거울 수밖에 없다. 역삼동의 엔가와 냉모밀은 또 어떤가? 매장에서 직접 최상급 가쓰오부시로 쯔유를 만든다. 이곳에서는 넓적한 볼에 커다란 얼음을 동동 띄운, 정수리까지 찡하게 전해지는 시원한 소바를 맛볼 수 있다. 면발 역시 이슬을 머금은 잎처럼 촉촉하고 양까지 푸짐하다. 오늘은 좀 더 멀리 소바 탐험을 떠나볼 생각이다. 광화문의 ‘미진’으로! – 황보선(<싱글즈>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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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회 8년 전 제주의 한 식당을 취재할 때의 일이다. 방문 전 섭외 전화를 걸어 주인에게 촬영용으로 물회 한 그릇 내줄 것을 청했다. “가만 보자, 자리물회는 이미 끝났고, 기자 양반 올 때쯤이면 한치나 어랭이가 철일텐데 뭐, 그날 상태 봐서 결정하시든가.” 물회면 물회지 자리는 뭐고 어랭이는 또 뭐람. 뱃사람들에게는 물회가 일종의 달력이라는 걸 그땐 몰랐다. 자리에서 한치로, 한치에서 어랭이로 물횟감이 옮아가는 것은 곧 계절의 추가 기우는 것과 같다는 것을. 물회를 먹을 때면 갓 잡은 생선에 자투리 채소를 넣고 장(醬)과 식초를 버무려 숟가락으로 푹푹 떠먹던 어부들을 떠올리곤 한다. 그렇게 스스로 운치를 돋우며 생선 기름이 밴 새콤한 국물을 목구멍으로 훌훌 넘기다 보면 팔팔한 바다를 통째 들이켜는 기분이 든다. 서울에서 즐겨 찾는 곳은 세 군데 정도. 물횟감으로 흰살생선만 사용하는 서울의 여느 식당과 달리 영덕회식당은 물가자미(미주구리)와 청어 세꼬시를 섞어 낸다. 둘 다 저렴한 막회지만 물회로 먹으면 입에 착착 감긴다. 속초항 뱃머리는 속초항에서 당일 직송한 자연산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은혜로운 식당이다. 광어 세꼬시를 넣은 이곳의 물회는 말 그대로 물회의 정석. 마지막으로 한라의 집은 제주에서 매일 비행기로 재료를 공수하는 곳이다. 제철 맞은 한치물회는 물론, 자리돔 철에는 자리물회도 맛볼 수 있다. – 강보라(<루엘> 피처 디렉터)

 

콩국수 평소보다 학교가 일찍 끝나는 시험 날에는 엄마와 함께 집 근처의 칼국수 집으로 향하곤 했다. 그 칼국수 집은 허름한 건물 5층에 위치했는데, 늘 늦은 오후의 잔잔한 햇살과 함께 기억된다. 평소에는 주로 바지락과 팥칼국수를 먹지만 여름에는 꼭 여기서 파는 콩국수를 먹어야 했다. 콩국물의 살짝 비리면서도 무심한 듯 담백한 맛이 얕게 뿌려진 미숫가루의 고소한 맛과 섞일 때, 그리고 아삭거리는 오이의 식감과 찬물에 헹궈진 면발의 쫄깃함이 서로에게 완벽하게 녹아들 때 자연스레 탄성이 터진다. 면을 한참 먹다가 젓가락을 잠시 내려두고 콩국물을 몇 숟갈 뜨면 그 진하고 깊은 맛에 또 한 번 반하고 만다. 가장 좋아하는 곳은 여의도에 위치한 진주집. 강원도산 대두를 사용해 다른 곳보다 걸쭉하면서도 곱게 간 콩물 때문이다. 시청에 위치한 진주회관은 콩국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가봐야 하는 성지 같은 곳으로 하루 평균 4천 그릇의 콩국수가 팔리는 전통 있는 집이다. 달착지근한 맛을 좋아한다면 대치동의 맛자랑으로 향할 것. 마치 생크림처럼 크리미한 콩물로 유명하다. 고명으로 토마토가 올라간다는 게 꽤 특이하다. – 정지원(<얼루어> 피처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