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속 아름다움을 걸친 새로운 우아함
산천초목을 지나 이제는 바다로 간다. 심해의 푸른빛과 물고기, 산호초, 조가비 등 바다 세계의 아름다움을 담은 의상이 신비로운 바다 한가운데로 우리를 이끈다.
수많은 생명의 무리가 반짝이는 자연은 패션의 이야기를 풍요롭게 만드는 원천이다. 옷에 꽃을 피우고, 하늘의 색을 입히고, 야생 동물이 뛰노는 밀림을 만들고…. 사람과 자연은 패션이라는 공간 안에서 자유롭게 소통한다. 이번 봄/여름 컬렉션은 그 다채로운 자연의 향연 중에서도 바다의 오묘한 아름다움에 집중하고 있다. 물고기의 유연한 움직임을 포착한 페플럼 실루엣, 햇빛에 반짝이는 물고기의 비늘과 모래알을 닮은 시퀸 장식, 산호와 진주를 소재로 한 액세서리, 깊고 짙은 심해와 하얀 조가비를 표현한 감도 높은 색상의 의상들은 가까이 접할수 없는 바닷속 생태계의 경이로움을 수면 위로 꺼내 보이기 시작했다.
봄은 화려하고 풍요로운 패션의 정점이다. 몇 시즌 동안 계속된 미니멀리즘 무드의 강세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기운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다행히도 이번 봄/여름 컬렉션은 흐드러지게 핀 꽃과 부드러운 파스텔색을 입은 의상이 그 빈자리를 채운다. 그런데 문제는 그새 익숙해진 단정함을 벗고 금세 로맨틱한 새 옷으로 갈아입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거다. 특히나 간결한 세련됨에 과하지 않은 여성스러움을 얹고 싶은 이들에게는 형형색색의 꽃무늬 원피스가 완벽한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그 간극을 좁히는 데에 이번 시즌 바다 모티프 의상이 중요한 역할을 해낼 것으로 보인다. 신비로운 수중 세계를 표현한 디자인의 가장 큰 매력이 바로 여성스러운 우아함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간결하게 떨어지는 실루엣에 더해진 물고기의 지느러미와 꼬리를 닮은 헴라인, 물결치는 파도를 연상시키는 페플럼(Peplum, 허리선 아래에 주름 잡은 천을 이어 붙이거나 러플처럼 천을 늘어뜨리는 것) 장식은 여성의 우아함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사용되었다. 또 레이스 위를 수놓은 진주 장식과 하늘거리는 시폰과 오간자를 이용한 쿠튀르적인 장식은 로맨틱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햇볕이 내려앉은 물속 세상을 연상시키는 반짝이는 시퀸 장식은 온화한 화사함을 담아내고, 흰색과 은색, 창백한 파란색 등 바다에서 영감 받은 은은한 색감은 봄의 경쾌함을 세련되게 연출한다. 꽃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밀림의 동물처럼 힘이 세진 않지만, 신비로움과 나긋나긋한 우아함으로 시선을 모으는 이번 시즌 바다 모티프 의상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걸치는 또 하나의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이번 시즌 해양생태계의 보고, 바다로 뛰어든 대표적인 디자이너는 샤넬의 칼 라거펠트다. 샤넬 쇼가 열린 파리 그랑팔레는 아름다운 수중궁궐로 분했다. 바닥에는 하얀 모래를 깔고, 그위에는 커다란 조가비와 산호초, 돌멩이, 소라를 세웠다. 온통 새하얀 샤넬의 수중궁궐을 걷는 모델들은 마치 인어공주 같았다. 겹겹이 이어 붙인 오간자와 시폰 주름 장식은 모델이 걸을 때마다 물속에서 흔들리는 해초처럼 나풀거렸고, 목선과 가슴, 허리 등에 장식한 촘촘한 진주는 조가비를 표현한 의상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산호로 만든 클러치백과 산호 굽을 단스트랩 슈즈, 바닷속 돌멩이처럼 연출한 진주목걸이, 빛에 투과되고 반사된 심해의 오묘한 푸른빛을 담은 세라믹 팔찌 등 샤넬 컬렉션 곳곳에는 바다의 향취가 살아 숨쉰다. 알렉산더 맥퀸의 사라 버튼은 보다 신비로운 바다 생물체를 수면 위로 불러냈다. 물고기 지느러미 모양의 헴라인을 소매 끝과 허리 끝, 때로는 앞섶 끝에 이어 붙이고, 손으로 하나하나 찢어 만든 시폰과 레이스로 바닷속에 살고 있는 각종 해초류를 생동감 넘치게 재현했다. 또 진주와 비즈 장식을 알알이 박은 드레스로 햇빛에 반짝이는 파도와 모래를 표현하는가 하면, 전체를 산호 장식으로 이어 만든 드레스도 보여준다. 이 추상적이고도 예술적인 바다 모티프 장식들은 허리를 조이고 어깨를 부각한 실루엣과 만나 마치 바다에서 온 미래의 여전사 같은 느낌을 내기도 한다. 설령 입지는 못하더라도 바다 세계에 심취한 사라 버튼의 경이로운 상상력과 손길만큼은 꼭 한번 감상해볼 만하다.
보다 현실적인 소통을 택한 디자이너도 있다. 가오리의 지느러미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지방시, 물고기의 유연한 움직임에 주목한 스텔라 맥카트니와 입생로랑, 바다 생물을 프린트와 장식으로 사용한 베르사체, 물고기 꼬리처럼 연출한 헴라인을 곁들인 베라왕 컬렉션이 그 좋은 예다. 지방시는 헤엄치는 가오리의 지느러미를 형상화한 페플럼 장식을 흰색과 연한 핑크색의 좁다란 의상에 포인트처럼 활용했는데, 가오리의 역동적인 꼬리짓을 살린 재단이 압권이다. 또 컬렉션 후반부에 등장하는 시퀸 의상들은 햇빛에 반짝이는 은빛 바다의 한가로운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스텔라 맥카트니는 특유의 간결한 선에 물고기의 유연한 곡선미를 담백하게 드리웠다. 부드러운 실크 소재와 만난 곡선의 헴라인과 물고기 비늘을 모티프로 한 듯한 도트무늬는 한층 입체적인 미니멀리즘의 세계로 안내한다. 베르사체의 날렵하고 글래머러스한 의상은 불가사리와 해초를 담은 프린트, 잠수복을 연상시키는 소재와 커팅 장식들 덕분에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입었고, 21세기에 인어공주가 환생한다면 이런 옷을 입고 있지 않을까 상상하게 만들었다. 입생로랑과 베라왕은 페플럼 장식을 적극 활용했는데, 특히 스트링으로 조여 연출한 베라왕의 스커트 자락은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의 지느러미와 꼬리를 떠올리게 해 더욱 우아해 보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강렬한 색감과 과장된 선을 배제했다는 것과 상·하의의 색을 통일했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옷으로 표현된 바닷속 세상은 한층 더 은은한 아름다움을 품게 되었다.
이번 시즌 바다 모티프 의상을 통해 사람과 자연은 또 한번 소통을 시작한다. 바다를 담은 의상을 걸칠 때에는 적당한 균형을 유지해야 과해 보이지 않는다. 바다 생태계가 건강한 균형을 유지해야 아름다울 수 있는 것처럼. 프리드리히 니체가 한 말이 생각난다.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본다.
- 에디터
- 박선영
- 포토그래퍼
- KIM WESTON ARNOLD, Na Kyung Hw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