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채의 깊은 생각과 꿈
첫눈엔 소녀 같다. 그녀에게는 그런 풋풋하고 청결한 시간이 느껴진다. 하지만 아마도 눈치 채게 될 것이다. 마음속에서 설탕처럼 가만히 정제되고 있는 깊은 생각과 꿈을 말이다.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 어쩌면 정은채, 그리고 해원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들이다.
그녀가 그렇게 키가 클 줄은 아무도 몰랐다. 패션 디자이너들이 일장춘몽처럼 꽃을 펼쳐놓은 프린트 의상을 입고 슈즈까지 신었을 때, 스튜디오의 모든 사람은 정은채 공주와 열 몇 명의 난쟁이 신세를 피할 수 없었으니까. “분명히 5년 전엔 171센티미터였는데, 지금은 172센티미터가 되었어요. 성장판이 아직도 활동하고 있는 걸까요? ” 사소한 예를 들자면 그녀는 늘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그 어려운 균형점을 지키고 있다. 키가 커서 좋은 것도 아니고, 큰 키가 싫은 것도 아니다. 그냥 정은채였다. 필요 이상의 호들갑이나 발랄함은 없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소녀 같았다. 감독들도 정은채의 맑고 차분한 얼굴과 목소리에 반한 걸까? “유명하지 않아서 편해요”라고 말하지만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반대의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영화 <초능력자>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두 남자 강동원과 고수 사이에 선 것도 그녀였고, 올봄만 해도 작가주의 감독으로 불리는 홍상수와 이재용이 나란히 그녀를 선택하지 않았나. 이 두 편의 영화의 헤로인으로 그녀는 곧 국제 영화제가 열리는 베를린으로 향할 예정이다. 촬영이 끝난 후 인터뷰는 카페에서 페퍼민트 차 두 잔과 함께 이뤄졌다. 스태프들은 자리를 비웠고, 정은채의 단정한 목소리는 밤의 자락을 따라 이어졌다. 여전히 그녀의 입술은 우리가 선택한 컬러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런 컬러는 거의 발라본 적이 없어요, 라고 그녀가 말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였다. 우리는 정은채의 다른 면을 발견하고 싶었고, 다른 모든 사람이 새삼스럽게 그녀를 발견하길 바랐으니까. 붉은 입술은 그 신호였다. 국토대장정과 페이크 다큐, 예술 영화를 오가고 매니저도 누구도 없이 손에 훌쩍 여행가방을 손에 쥐고 영화제로 떠날 수 있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그녀니까.
얼마 전 일주일 동안 국토대장정에 참여했다는 이야기 듣고 놀랐요. 도대체 왜 당신이 한계령을 넘게 된 거예요?
SBS에서 만든 파일럿 프로그램 <행진> 촬영이었어요. ‘국토대장정’을 하면서 찍는 리얼 예능이에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 친해진 이선균 선배가 같이 가자고 제안해서 참여하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엄청 힘들었어요. 강원도 철원에서 양양까지, 한계령을 넘어서 횡단을 하는데, 차로는 정말 금방 가는 거리예요. 나중에 차로 넘는데 분하더라고요.
힘들면 앰뷸런스를 타지 그랬어요. 한사코 안 탔다면서요.
타도 되는데 괜한 오기를 부려서 저도 많이 힘들고, 주변에 걱정도 많이 끼쳤어요. 삼일째가 가장 힘들었어요. 무릎이 바로 탈이 나더라고요.
왜 계속 걸었어요? 혹시 포기를 모르는 여자예요?
다른 멤버들은 다들 재미있는 성격이에요. 저는 재미있는 말도 잘 못하고, 할 수 있는 건 조용히 걷는 것밖에 없더라고요. 취지가 6박 7일 동안 걷는 것이라 저는 꿋꿋하게, 씩씩하게 끝까지 걷자고 생각했어요.
그 결과로 한 달 동안 무릎 치료를 받아야 한다면서요?
운동 선수도 아닌데 재활치료를 다 받고 너무 부끄러워요. 그런데 다른 스태프 분들도 지금 다 병원 다니고 있대요.
이 모든 것을 시작한 이선균 씨가 잘해줬겠어요.
좋은 병원을 추천해주셨어요. 하하. 그래서 완전히 병 주고 약 준다고 했죠. 그래도 덕분에 재미있었어요. 언제 또 해보겠어요? 힘들어서라기보다는, 단 한 번의 경험이라는 것의 무게가 다르잖아요.
2월 28일에는 당신의 두 작품이 동시에 개봉하죠. 또 그 두 작품으로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 참석하고요. 그것도 두 번 경험하기는 어려운 일 아니겠어요?
저도 정말 신기해요! 설레기도 하고요. 그런데 한 분 더 있어요. 류덕환씨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도 잠깐 나왔거든요.
사람들이 ‘해원’의 이름을 많이 틀리더라고요.
‘혜원’이라고 많이들 생각해요. 사실 극중 이름이 원래 ‘혜원’이었어요. ‘홍상수의 열여덟 번째 영화’로만 부르다 영화 제목이 정해지면서 ‘해원’으로 바뀌었는데 이게 훨씬 좋은 것 같아요. 역시 감독님이다, 했죠.
처음에 제의를 받았을 때에는 어땠어요?
원래 홍상수 감독님 영화를 좋아했어요.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기회가 닿을까? 마음속으로만 꿈꿔왔는데 그게 정말 제게 온 거죠. 감독님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냥 바로 캐스팅이 된 거예요. 얼떨떨하면서도 재미있고 그랬어요. 촬영 전에 감독님과 이선균 선배, 다른 배우들과 자주 만나서 하루 종일 놀곤 했는데 그 기간이 꽤 길었어요.
만나면 주로 뭘 해요?
늘 술 마셨어요. 낮에 만나든, 저녁에 만나든 저희는 늘 술과 함께였어요. 좋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요. 작품 얘기는 전혀 안 해요. 그냥 서로 뭐하고 지내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연배도 훨씬 높고 감독님이니까 제겐 어려운 분인데, 감독님은 참 친구 같아요.
<오!수정>, <옥희의 영화> 이후 제목에 여주인공 이름이 들어간 세번째 영화가 되었어요. 책임감의 무게가 좀 달라졌겠는데요? 당신이 바로 해원이니까요.
촬영 다 끝나고 제목이 이렇게 정해지니까, 어깨가 무겁기도 하고 이선균선배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런 건 신경도 안 쓸 분이에요. 정말 털털하고 쿨하시니까요.
이번에는 어디에서 주로 촬영했어요?
서촌과 건국대학교, 남한산성에서 촬영했어요. 서촌이 정말 좋았어요.
홍상수식 즉흥 촬영은 어땠어요?
감독님 촬영 스타일이 어떤지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촬영에 들어가려니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대사도 그날 다 외워야 하고 그게 부담이 많이 되더라고요. 하지만 또 다음 날 촬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좋았어요. 오늘만 생각하면 되니까요.
발상의 전환인데요!
보통 촬영장 가면 내일 어떻게 할까 생각이 복잡해서 잠을 잘 못 이루는데, 홍 감독님 영화는 현장에서 다 부딪히는 대로 하니까 오히려 부담이 덜한 거예요. 감독님도 워낙 배우가 의도한 연기를 하는 걸 싫어하세요. 처음 대본 받아서 놀란 듯한 그런 느낌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홍상수 영화의 여주인공은 살짝 당돌한 구석도 있고, 살짝 나사가 풀린 구석도 있고, 또 신경질적인 면도 있죠. 당신에게도 그런 면이 있어요? 사실은 그게 아주 평범한 우리 모습 같거든요.
음…약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영화 속 여자들이 사실은 평범하다고요. 누구나 각자의 고민거리가 있고, 각자의 방식으로 그걸 표현하잖아요. 해원은 매우 진정성 있는 캐릭터예요.
이번에는 그 고민이 사랑이에요? 학생이 강사를 사랑하잖아요.
해원의 고민도 여러 가지예요. 이번 영화는 조금 슬프기도 해요. 멜로적인 면이 강해졌고 해원이 처해 있는 상황이 밝지만은 않거든요. 그런데 의외로 완성된 영화 시사를 하는데 재미있더라고요! 감독님이 늘 가진 유머 코드가 이번에도 이어져요.
홍상수 감독님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는 ‘노개런티’ 아닌가요?
모든 배우는 노개런티로 알고 있고, 그 이후에 작품이 잘되면 러닝개런티를 배분해서 받아요. 그런 시스템으로 알고 있어요.
그럼 돈 대신 뭘 얻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사람들을 얻었죠. 홍 감독님 그리고 감독님 영화를 늘 함께하는, 진짜 식구 같은 사람들이요. 감독님이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셨는데 가장 마음에 와 닿은 건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라’라는 거였어요. 그말대로였어요. 배우들이 노개런티로도 시간을 내서 함께하는 이유가 다 있더라고요. 배우들 한 명 한 명 배려해주고, 지금까지 영화에 출연한 분들과도 사석에서 만날 기회가 많았는데, 다 공통적인 코드가 있는 것 같아요. 소탈하고 사람냄새 나는 분들이었어요. 물론 술도 잘 하고. 하하
아무래도 저예산이면 현장에서 배우를 배려할 수 없잖아요?
스태프까지 다 합쳐도 총 열 명이 안 되었어요. 홍 감독님 영화 중에서도 최소였대요. 최소 인원과 최소 기간. 7회 차로 모든 게 끝났어요. 적응하니까 단출하니 편하고 좋더라고요. 옷도 제 옷 편하게 입고, 헤어 메이크업도 안 하고. 지금 영화를 찍고 있다는 게 아니라 그냥 얘기하고 있으면 카메라가 들이대는 느낌이라, 최소한의 인원이 장점이 되었어요.
7회 차 만에 단편도 아닌 장편 영화가 완성되는군요!
정말 되더라고요. 정말 다 ‘원 슛, 원 테이크’라서.
이재용 감독의 새 영화에도 출연했잖아요. 제목이 아주 유쾌해요.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라니.
스태프도 정말 많고 배우도 정말 많고, 과연 이걸 영화화할 수 있을까, 모두가 그 생각으로 우왕좌왕했는데, 어떻게 편집을 해서 또 영화가 됐다는 게 정말 신기했어요. 영화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어요. 저희들끼리는 사실 감독님이 주인공이라고 해요. 계속 감독님이 나오거든요!
<여배우들>의 판이 커지고, 혼란은 더 가중된 건가요?
이번엔 완전히 아수라장이 된 느낌이에요! 이재용 감독님은 재미있는 걸 좋아하고, 새로운 시도를 즐기시는 것 같아요. 이 영화는 시놉시스도 없고, 대사도 없었어요. 감독님이 ‘이런 거 할 건데, 뭐 재미있는 거 재미있게 한다고 생각해. 그런 거 좋아하니?’ 하고 부담 없이 물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부담 없이 재미있는 걸 좋아한다고 말씀드렸죠. 그래서 하게 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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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허윤선
- 포토그래퍼
- 유영규
- 스탭
- 스타일리스트 | 이지영, 헤어/김선미(고원), 메이크업/신애(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