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을 쪼갰다

생애 첫 통장을 서랍 속에 감춰두고 꺼내 보던 유년 시절 이후, 통장이 이토록 소중하게 느껴지는 날이 또 올 줄 몰랐다. 재테크 서적의 조언에 따라 통장을 나누고 생활한 3개월 동안, 무슨 일이 생겼을까?

무려 스마트폰 뱅킹의 시대가 도래한 지금도 통장의 위엄은 여전하다. 재테크 서적 검색창에 ‘통장’을 입력해보자. <4개의 통장>, <인생을 바꾸는 10년 통장>, <언니의 비밀통장>, <내 통장 사용 설명서>, <부자 통장 가난한 통장> 등등 관련 도서가 쏟아져 나올 테니. 신용카드 고지서마저 이메일로 받는 시대에 통장이라니! 물론 기껏해야 잔액과 입출금 내역을 확인하는 용도로 쓰이던 통장의 역할은 달라졌다. 21세기의 통장 사용법은 다음과 같다. 여러 개의 통장을 만들어 쪼갤 것, 그리고 돈을 나눠 담아 돈의 흐름을 파악할 것. 이 단순해 보이는 방법에 어떤 효과가 있길래 모두 이구동성으로 통장을 쪼개라고 하는 걸까? 호기심을 품고 통장 쪼개기의 대열에 합류하기로 했다. 놀라운 것은 통장을 쪼갤수록, 자꾸자꾸 돈을 모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통장, 어떻게 쪼갤까? 통장 쪼개기에 앞서 우선 가지고 있는 통장을 점검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급여통장이었다. 월급이 들어오는 것은 물론, 신용카드 대금, 핸드폰 비용, 월세 등 온갖 지출이 빠져나가고, 주거래 은행의 체크카드와도 연계된 통장이다. 실질적으로 내 모든 돈은 이 통장을 거쳐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셈. 여기에 대학생 때 사용했던 통장, 예전 직장에서 만든 통장까지 총 세 개가 내가 가진 통장의 전부였다. 하지만 이 두 통장은 안 쓴지 오래. 그나마 은행도 다 달랐다. 어쨌든 간에 통장을 나눠야 한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통장 쪼개기의 유행을 불러일으킨 서적 <4개의 통장>을 펼쳤다. ‘평범한 사람이 목돈을 만드는 가장 빠른 시스템’이라는 달콤한 부제를 단 이 책이 말하는 4개의 통장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급여통장’은 매달 급여를 포함한 수익금이 들어오고, 각종 공과금등이 빠져나가는 통장이다. 그리고 생활비를 비롯한 변동 지출 관리용인 ‘소비통장’,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비상금과 예비 자금을 관리하는 ‘예비통장’, 적금과 펀드 등 투자 관리를 위한 ‘투자통장’이 더해진다. 보다 구체적인 조언을 얻기 위해 통장 쪼개기의 달인인 후배도 만났다. 프리랜서로 일해 수익이 불규칙한데도 3년 만에 5천만원을 모은 후배의 통장 개수는 총 6개였다. ‘급여통장’에 해당하는 ‘수입통장’, 적금으로 빠져나가는 돈을 넣어두는 ‘투자통장’, 생활비를 사용하는 ‘소비통장’ 외에 개인적인 목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통장을 세 개나 더 가지고 있었다. 비상금 통장인 ‘예비통장’은 없었지만 필요한 지출액을 각 통장으로 자동이체하고 ‘급여통장’의 잔액은 늘 0원으로 유지한다는 점, 그리고 각 통장은 목적 외에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는 기본 원칙을 지키고 있었다. 평소 돈이 없다던 후배의 말은 단지 그의 ‘소비통장’에 돈이 없다는 말일 뿐이었던 것. 순간 지난 4년간 대신 내준 밥값과 술값이 떠올라 억울함이 솟구쳤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앞으로는 나도 이렇게 살 테다!

통장 개설에 나서다 우선 급여통장에 편중된 통장의 기능을 나누기로 했다. 급여통장을 만능 통장으로 사용해온 지난 4년간 계좌이체를 걸어둔 곳이 워낙 많아 매달 이체되는 총액이 얼마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공과금과 월세를 비롯, 할부가 끝나기 전에 분실하는 바람에 이전 할부 대금까지 갚아야 하는 휴대폰 요금, 각종 후원금과 공기청정기 렌털 비용처럼 매달 빠져나가는 비용과 실비보험금까지 합치니 이미 60만원이 훌쩍 넘었다. 자동이체금액을 매월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 당분간은 휴대폰 소액결제도 하지 않기로 결심! 급여통장은 이제 ‘급여’와 ‘이체’ 기능으로만 사용해야 하기에 연결되어 있던 체크카드는 해지하고, 새로 개설할 ‘소비통장’의 체크카드를 발급받았다. 물론 사용하고 있는 체크카드의 인출 계좌만 변경해도 됐지만 새로 시작하는 기분을 내고 싶었다. 지출액을 파악하기 쉽도록 체크카드 문자 서비스도 잊지 않고 신청했다. 비상 사태에 대비한 ‘예비통장’은 증권사에 다니는 친구들의 의견을 종합해 CMA를 개설하기로 마음 먹었다. 목돈으로 묶어둘 수 있고, 수시입출금도 가능한 데다가 하루만 넣어둬도 이자를 준다는 점, 예전과 달리 예금자 보호도 된다는 설명에 끌렸다. 그 다음 발길이 향한 곳은 나의 주거래 은행이었다. 사용하지 않는 다른 은행의 통장들을 버리고 주거래 은행에서 ‘투자통장’과 ‘소비통장’을 개설하기로 한 것. 월급을 받은 다음 날, 바로 ‘급여통장’에서 ‘투자통장’으로 저축액이 자동 이체되도록 했다. ‘투자통장’으로 이체된 저축액은 가입해 있는 정기적금과 보험저축으로 각각 이체될 예정이다. 복잡하게 들리지만, 몇 장의 서류만 작성하면 남은 것은 은행 창구 직원이 알아서 척척 처리해주니 겁먹지 말 것. 하지만 문제는 ‘소비통장’이었다. 지난달 카드대금과 저축 등 지출액을 계산하고 나니 ‘소비통장’에 넣을 돈이 생각보다 적었던 것이다. 급여통장에 남은 돈을 전부 소비통장으로 이체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달을 생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하는 수없이 예비통장인 CMA에 매달 20만원씩 넣으려던 계획도 일단 미뤘다. 계좌는 있는데 넣을 돈이 없는 현실이 서글펐다.

실패로 돌아간 첫 달 4개의 통장에 돈을 나눠 담고 난 후의 심정은 방청소를 깔끔하게 마친 후 느끼는 기분과 비슷했다. 예전에는 매달 각기 다른 결제일마다 야금야금 돈이 빠져나가는 통에 어느 순간 잔액이 ‘0’이 되는 경우도 많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결제대금일과 출금일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어차피 각자의 몫을 하는 통장으로 빠져나갈 테니까. 매달 생활비로 써야 하는 금액이 얼마인지 알게 되니 절약도 자연스레 따라왔다. 하지만 처음 우려했던 것이 곧 현실로 닥쳤다. 도무지 ‘소비통장’에 이체한 돈으로 남은 한 달을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에는 통장 쪼개기를 시작하면,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깨고 신용카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껴야 된다는 압박감과 신용카드를 쓰고 있다는 죄책감, 두 가지 중압감에 시달리다 보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기껏 개설한 CMA에 한 푼도 넣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도 화가 났다. 통장도 쪼갰고, 생활비도 이전 달의 2/3 수준으로 절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빠듯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원인은 통장을 쪼개기 전의 재정 상태를 따져보니 금세 나왔다. 갑자기 든 적금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딸의 재테크를 보다 못한 아빠의 제안으로 들기 시작한 월 50만원 짜리 적금은, 내가 45만원을 내고 아빠가 5만원을 보태 50만원을 채워주는 놀라운 이율의 ‘아빠 적금’이었지만 어쨌든 매달 45만원이라는 고정 지출이 생긴 것은 같았다. 함께 사는 동생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원하던 회사에 비정규직으로 들어간 바람에 월세를 내가 조금 더 내기로 한 것도 부담이 됐고, 마침 건강보험료를 추가 납부하라는 국가의 부름마저 떨어졌다. 매월 약 9만원씩 3개월을 내야 하다니! 갑자기 생겨난 이 추가 지출은 나름의 당위를 갖고 있다. 하지만 통장 쪼개기는 돈의 흐름을 파악하고 절약하게 해주는 것이지 없는 돈을 만들어주는 건 아니다. 그런데 두 달 전보다 60만원이 훌쩍 넘는 고정 지출이 생겼는데도 막연하게 ‘아껴 쓰면 어떻게 되겠지’ 라고만 생각했으니 생활비가 부족할 수밖에. 정확한 수입과 고정 지출액을 꼼꼼히 따져보지 않고 계획에 없던 적금을 시작한 것이 후회됐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대로 신용카드를 계속 쓴다면 다음 달 ‘소비통장’에 입금할 수 있는 돈은 더 줄어들 것이다. 지출액을 ‘소비통장’을 통해 곧바로 가늠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신용카드 대금을 따로 계산하게 되니 ‘소비통장’의 의미도 없어졌다. 갑자기 닥친 이 총체적 난국에 현금 융통을 위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얼마 되지 않은 금액이지만, 갖고 있던 적립식 펀드를 환매하기로 했다.

통장 쪼개기의 흐름을 타다 다행히 적립식 펀드는 약간의 수익을 남기고 환매할 수 있었다. 약 반년 전, 적립식 펀드를 해보라던 은행 창구 직원의 권유로 소액으로 들었던 펀드가 이렇게 기특한 역할을 할 줄 몰랐다. 돈은 역시 모으고 봐야 한다는 것, 은행은 자주 드나들수록 좋다는 것을 또 한번 느꼈다. 가입한 지 3개월이 지나면 수수료 없이 환매할 수 있는 데다가 수익률도 10% 정도 났기 때문에 차라리 CMA가 아닌 적립식 펀드를 ‘예비통장’으로 사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법의 통장인 줄 알았던 CMA는 막상 개설하고 나니 손에 쥔 목돈이 거의 없는 내겐 크게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익숙하지 않아 사용법도 불편했고, 인터넷 뱅킹 이체 수수료가 처음 1년만 무료인 점 등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이 많았다. 물론 ‘예비통장’은 정기예금을 이용하는 것이 정석이긴 하다. 적립식 펀드가 늘 원하는 환매 시점에 상승세를 타는 건 아니니까.

일단 현금이 생기니 숨통이 좀 트였다. 펀드 환매금을 잠시라도 CMA에 넣어둘까도 생각했지만 어차피 당장 생활비가 필요했기 때문에 원래 목적대로 ‘소비통장’에 넣고 남은 두 달간 잘 분배해서 사용하기로 했다. 펀드를 환매한 덕분이기는 하지만 혈관에 깨끗한 피가 흐르는 것처럼 원활하고 투명해진 통장들을 보니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통장 쪼개기의 가장 큰 장점은 목적이 다른 돈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하던데, 아닌 게 아니라 통장을 볼 때마다 적금만은 결코 건드리지 않겠다는 각오를 했다. ‘급여통장’의 급여는 여전히 통장을 스쳐 지나갔지만 ‘어쩌다 보니’가 아니라 스스로 예측하고 배치해놓은 대로 돈이 빠져나가는 건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비로소 내 급여가 카드사나 보험사의 것이 아닌 내 자산이 된 것 같은 이 근사한 느낌!

통장을 쪼갠 지 세 달째 통장을 나눈 후 두 번의 월급을 받았다.‘급여통장’의 잔액이 ‘0’을 유지하는 것에도 익숙해졌고, 다행히도 예전 휴대폰의 남은 할부금과 건강보험료 추가 납입분이 끝난 덕에 생활비에도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지난 9월 신청해 일년간 분납 중인 소액대출금 상환까지 완료하면, 본의 아니게 개설하자마자 휴면 계좌가 되어버린 CMA 계좌에도 원래 계획했던 금액을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통장을 쪼갠 지 세 달째, 가장 뿌듯한 것 중 하나는 신용카드 사용이 줄었다는 것이다. 물론 정해진 금액만을 사용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지난달에는 여러 달 전에 미리 비행기 티켓과 숙소를 예약해두었던 일본 여행을 고민 끝에 취소했다. 현지에서 사용할 현금이 없는데 굳이 떠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신용카드와 여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예전이 그립기도 하지만 이제는 이것이 옳은 소비라는 것을 안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일단 통장과 한번 친해지고 나니 돈을 나눠 담는 일이 더 이상 어렵게 느껴지지 않더라는 거다. 앞으로 좀더 여유가 생기면 함께 사는 고양이 두 마리와 부모님 댁의 강아지가 아플 때를 대비한 ‘반려동물 통장,’ 앞으로 줄줄이 이어질 지인들의 결혼식에 대비한 ‘축의금 통장’도 만들고 싶다. 물론 실패한 일본 여행을 만회하기 위한 ‘여행통장’도 통장 위시 리스트에 올려뒀다. 여윳돈을 어디에 쓸까가 아닌, 어떻게 모을까를 먼저 생각하게 된 것만으로도 엄청난 변화다. 통장 쪼개기는 기대하지 않았던 수익을 가져다주는 마법의 재테크는 아니다. 하지만 돈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고, 자연스럽게 소비보다는 저축을 권유하는 가장 현실적인 재테크 방법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매달 순수하게 ‘아껴서’ 모은 돈이, 그 어떤 금융 상품에 가입하는 것보다 안전하고 심지어 수익률도 높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에디터
    피처 에디터 / 이마루
    포토그래퍼
    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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