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웅, 의연하게 당당하게
박기웅의 홈런은 9회 말에 터졌다. 그의 20대를 야구와 같은 선상에 놓고 보자면 말이다. <각시탈>의 기무라 순지와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리해랑 이후 그는 드디어 ‘유망주’라는 수식어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20대를 고스란히 배우로 살아낸 스물아홉의 박기웅은 이 모든 변화에도 놀랍도록 의연하다.
오늘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가 당신이던데요?
트위터에 올린 내용이 화제가 된 거였기 때문에 조금 당황했어요. 주원이가 출연한 <굿닥터> 1회를 본 소감을 어제 올렸는데 그 내용이 오늘 기사화 되었더라고요. 문제가 될 만한 내용도 아니었고, 그럴 위험이 있는 걸 올리지도 않지만 자꾸 기사화되니 트윗을 올리는 게 조심스러워지네요.
기사를 읽고 트위터에 들어가보니 제법 자주 글과 사진을 올리는 편이더군요.
팬들을 위해서죠. 특히 해외 팬들은 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적잖아요. 해외 팬들로부터 자주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기웅 씨 트위터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거든요. 얼마 전 일본 팬미팅에서는 제가 트위터를 시작한 지 1주년이 되었다며, 그 동안 올린 트윗과 사진을 스크랩한 책을 팬에게 선물 받기도 했고요.
<은밀하게 위대하게> 이후 팬들이 훨씬 늘어났을 것 같은데요?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개봉한 후 연령층이 낮은 팬이 많이 생겼어요. 하지만 일본에서 기폭제가
된 건 <풀하우스2>예요. 시청률도 좋았고, DVD도 판매 1위에 올랐다고 하더라고요. 게다가 제가 그 동안 작품을 워낙 ‘찔끔찔끔’해왔잖아요. 은근히 오래된 팬이 많아요.
‘찔끔찔끔’이라고 표현했지만 정말 꾸준히 작품을 계속해왔어요. 연기자로 데뷔한 스무 살 때 부터 지금까지 우여곡절도 많았죠?
소속사와 문제가 생겨서 극단에 들어가 바닥 청소를 하며 연기를 다시 배우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CF에서 춘 ‘맷돌춤’으로 주목받으면서 <동갑내기 과외하기 레슨2>라는 제작비 45억원짜리 영화의 주연을 덜컥 맡기도 했죠.
그 CF를 통해서 당신을 알게 된 사람이 참 많아요. 지금도 박기웅 하면 ‘맷돌춤’ 이야기를 할 정도로요. 갑작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나요?
어릴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늘 ‘초연해라’, ‘흔들리지 말아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어요. 그런데도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저는 꽤 아등바등했던 것 같아요. 손을 조금 더 내밀면, 조금만 더 뻗으면 뭔가가 잡힐 것 같은 느낌을 계속 받았죠.
<동갑내기 과외하기 레슨2>는 전편 같은 흥행을 거두진 못했죠.
맞아요. 게다가 그 직후에 스크린쿼터제 폐지 논란을 비롯해 한국 영화가 침체기에 빠졌거든요. 촬영하기로 한 영화 두세 편이 연속으로 엎어지는 일이 생겼죠. 제법 예산이 큰 영화들이었는데도요. 그러면서 TV 드라마를 시작하게 됐어요.
드라마보다는 영화를 계속하고 싶었던 건가요?
꼭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영화와 TV 드라마는 참 다르잖아요. 영화 한 편 찍었다고 드라마도 잘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영화에서 주연을 했다고 출연하는 드라마가 다 잘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언젠가 부터 이 일이 정말 좋아지더라고요.
반전이네요.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어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좋았어요. 그러면서 이 일을 오랫동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요. 원래 미술을 전공했어요. 그림도 꽤 잘 그렸고, 예체능 지망생 중에서는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도 제법 한다고 생각했는데 대입에 실패한 거예요. 때마침 길거리 캐스팅을 당했고, 홧김에 연기를 시작했죠.
홧김에 연기를 시작한 것치고는 무척 성실했는걸요? 작품을 많이 한 편인데, 이유가 있나요?
저는 그때그때 그 나이 때마다 하고 싶은 역할이 참 많았어요. 그런데 배역의 크기나 역할을 따지면서 하려다 보니 제약이 너무 많더라고요. 그래서 고르거나 따지지 않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던 것 같아요. 한 해에 미니시리즈만 네 편 한 적도 있으니까요.
손을 조금만 더 뻗으면 뭔가 잡힐 것 같아 아등바등했던 때도 있었어요. 지금은 즐기면서 하려고 해요.
아등바등할 때나, 맘 편하게 할 때나 결과는 비슷하더라고요.
요즘은 배우들도 전략적으로 작품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너무 많은 작품을 한 걸 후회하지는 않나요?
전부 제가 하고 싶어서 했던 거라 후회는 없어요. 그때 작품을 하면서 만난 스태프나 배우들과의 인연도 정말 소중하고요. <각시탈>의 윤성식 PD님과는 제 첫 드라마 출연작인 단막극 <드라마시티 – 러브 헌트, 서른 빼기 셋>에서 만났고, <남자이야기>도 함께 했죠.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나 캐릭터는 무엇인가요?
모든 캐릭터를 아끼지만 지금도 정말 좋아하는 캐릭터는 <남자이야기>의 안경태예요. 자폐 성향이 있는 천재 해커 역할이었는데, 송지나 작가님 작품이었죠. 드라마 세 편을 연달아 하고, 허리디스크가 올 정도로 지친 상태였는데도 역할이 무척 맘에 들어서 무조건 하겠다고 했어요.
<굿닥터>의 주원 씨도 자폐 성향이 있지만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레지던트 역할이죠? 그래서 그 역할이 더욱 각별하게 느껴졌던 거로군요.
트위터에 ‘주인공 캐릭터의 다양성이 인정받을 수 있게끔 이끌어주시는 제작진에 박수를!’이라고 썼어요. 안경태를 연기하면서 참 행복했고, ‘언젠가 이런 캐릭터가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진짜로 그런 드라마가 나온 거잖아요. 연출을 맡은 기민수 PD님을 워낙 좋아하기도 해요. <추노>에서 촬영 B팀을 담당하신 분인데 단역이었던 저를 정말 인상적인 캐릭터로 만들어주셨어요.
<두 사람이다>, <각시탈>, <풀하우스2>, <은밀하게 위대하게> 등 만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에 유독 많이 출연했어요. 우연인가요?
만화 원작의 캐릭터 설정이 특이하고 재미있어서 더 마음이 갔을 수는 있겠네요. <각시탈> 이후 방송 3사에서 드라마 대본을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도 예전 소속사와 마찰을 빚으면서까지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리해랑을 택한 건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밴드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남파간첩 역할을 대체 언제 어디서 또 만날 수 있겠어요?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만약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리해랑을 택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런 점이 당신을 의연해 보이게 해요. 화제가 되는 것 자체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예능이나 토크쇼에도 거의 출연하지 않았죠?
배우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살기 위해 연기를 하는 거지, 연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아닌 것 같거든요. 일이니까 할 때는 최선을 다하지만 제 생활은 또 따로 있어야 해요. 회사원이 퇴근 후의 시간을 즐기는 것처럼 말이에요.
당신만의 시간이 꼭 필요한 거군요.
전략적인 신비주의는 나쁘지 않아요. 그건 선택이죠. 그런데 유명하건 아니건 간에 사생활을 포기하는 사람들은 아예 전부 포기해버려요. 불편하니까 밖에도 안 나가고, 자기를 꼭꼭 싸매는 거죠. 그런데 저는 그러고 싶지는 않거든요. 예전에 박지성 씨가 인터뷰에서 ‘축구는 잘하고 싶지만 유명해지고 싶지는 않다’고 했던 적이 있어요. 그 말에 정말 공감해요.
난생처음으로 예능 프로그램 고정 출연을 결심했다면서요. SBS <심장이 뛴다>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방금 말했듯이 드라마와 영화가 잘됐다고 해서 나를 싸맬 생각은 없어요. 그런데 트윗 하나도 기사화되다 보니 약간 조심스러워지는 거예요. 이 프로그램에 출연해 배우로서 제 생활을 보여주는 게 편해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첫 번째 이유예요.
그럼 두 번째 이유는요?
개인적인 이유인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제가 TV에 나오는 것을 워낙 좋아 하세요. 그런데 다음 작품도 드라마가 아닌 영화가 될 것 같거든요. 예능이 두 분께 TV 속 제 모습을 보여드리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어요. <진짜 사나이>가 군대로 갔다면, <심장이 뛴다>는 소방서에 가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실제 구조대처럼 구조체험을 할 예정이에요.
구조대원이 된 박기웅을 만날 수 있겠군요! 20대 남자로서는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나요?
이것저것 하는 건 많아요. 농구를 좋아해서 고등학교 친구들과 만든 농구팀 하나, 연예인 농구 하나, 총 두 개의 농구팀에 소속되어 있죠. 축구도 하고, 기타도 치고, 여전히 그림도 많이 그려요. 좋아하는 사이트에 올라온 사진을 보고 따라 그리곤 해요.
20대의 끝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은 어때요?
앞의 숫자 2가 3이 되는 게 크게 중요한 것 같진 않아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는 선배들도 주변에 무척 많고요.
20대를 떠나보내면서 후회되는 일도 없어요?
몇 년 전에는 개인적인 여행을 한 번도 못 간 게 문득 후회됐어요. ‘내 20대는 뭘 한 거지?’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요. 실컷 열심히 일해놓고 나서 뭘 했냐니요! 지금 돌이켜 보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죠. 지금은 여유가 많이 생겼어요. 일하러 어디를 갔다고 해도 정해진 스케줄을 제외한 시간은 여행인 거잖아요. 매니저, 스타일리스트, 스태프들은 모두 저와 친한 친구고요. 틈틈이 즐길 수 있는 때마다 즐기며 살려고 해요. 이 즐길 수 있는 때마다 즐기며 살려고 해요. 아등바등할 때나, 맘 편하게 할 때나 결과는 비슷하더라고요.
- 에디터
- 패션 에디터 / 박정하, 피처 에디터 / 이마루
- 포토그래퍼
- 안형준
- 스탭
- 헤어/ 승렬(에스휴), 메이크업/나래(에스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