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배우와 인생, 백윤식
배우 백윤식은 항상 곧은 자세로 느긋하게 말한다. 말 끝에는 항상 웃음이 있다. 충무로의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모두 그에게로 간다는 소문은 아무래도 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좋은 배우가 되려면 먼저‘ 휴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상냥한 눈웃음은 그대로였다.
작년 겨울 촬영한 영화 <관상>이 드디어 9월 개봉이죠?
촬영할 때 눈이 너무 많이 왔어요. 눈만 와? 눈 오고, 비 오고 하느님이 날씨를 안 봐주시더라고. 제작자 쪽에서 힘들었을 거예요. 한번은 촬영장가다가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고속도로 입구에서 철수한 적도 있고. 그래도 잘 끝냈어요. 원래 사극 작업이 좀 어렵고 힘들잖아요?
이번에는 김종서 장군 역입니다. ‘김종서’라는 걸출한 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했나요?
그분이 장군, 무관으로 알려져 있잖아요. 그런데 알고 보면 문신으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무과까지 섭렵하신 분이에요. 문무를 다 가진 분인 거지. 북진정책을 단단히 하고 변방, 전방 생활도 많이 하셨고. 알면 알수록 대단한 분이더라고. 학교 다니면서 역사 공부 할 때에는 장군으로만 인식이 박혀 있었거든.
왕권을 노리는 수양대군과 필연적으로 대립하게 되는 인물이죠.
정치는 피도 눈물도, 혈육도 없다는 걸 보여주죠. 이게 배우 입장에서는 접근하기가 굉장히 좋은 캐릭터들이에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고, 드라마에서 반복해서 다루어진 이야기에 ‘관상’이라는 새로운 소재를 어떻게 버무릴지 궁금해지더군요.
<관상>은 허구와 역사적인 사실을 ‘관상’이라는 재미있는 주제에 접목한 거죠. 관상이라는 게, 운명철학이에요. 만약에 이 사람이 이렇게 생겼는데, 여기다가 흉터를 만드는 식으로 ‘작업’을 하면 운명을 바꿀 수가 있는거죠. 송강호가 관상을 보는 사람이고, 김혜수가 그 작업을 하는 사람이고. 문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틀림없는 신하인 김종서에게 단종을 맡기죠. 김종서는 충성으로 단종의 왕권을 지켜주는 작업을 하는데 관상은 그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일종의 ‘트릭’이 되어요. 또 수양대군은 수양대군대로 모사를 하고요.
김혜수를 제외하고는 주요 배역이 모두 남자로 채워져 있어요. 송강호, 이정재, 조정석, 이종석…. 특히 수양대군을 맡은 이정재와는 첫 작품 아닌가요?
처음인데 참 잘 맞았어요. 대화도 많이 했죠. 워낙 잘생기고 훤칠한 체형을 가진 건 알았지만, 같이 작업을 해보니까 내실이 좋은 친구고 좋은 품성을 가졌더라고. 겉보기에는 ‘멋쟁이’인데 현장에서 보니까 품성이 굉장히 다소곳하고 포근했어요.
당신은 ‘호랑이상’으로 이라면서요? 혹시 관상 좀 볼 줄 아시나요?
나는 사실 관상이 아니라 ‘족상’을 잘 보는데…. 하하! 아무래도 배우는 많은 사람의 인생을 연기하고, 아주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까, 뭐랄까, ‘감’라고 해야 하나, ‘촉’이라고 해야 하나…. 사람을 잘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관상이 뭘까? 결국에는 통계 아닐까? 이렇게 생긴 사람이 이렇더라는. 관상은 몰라도 사람은 잘 보는 편인 것 같아요.
사실 영화의 결론은 정해져 있죠. 처음에 시나리오 봤을 때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요?
결국에는 수양대군이 이긴다는 것을 알지만, 그 과정을 절묘하게 손을 댔고, 그 과정이 재미있었지.
감독하고 처음에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요즘에는 작품 준비를 2~3년씩 하잖아요. 대부분 시나리오, 우리는 책이라고 부르는데, 책을 보내면 감독들이 만나자고 해요. 일단은 자연스럽게 만나서 책에 대해 얘기하고, 감독은 감독 입장에서 왜 내가 필요한지에 대해 얘기해주는 그런 상견례를 하죠. 제작이 결정되고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갈 때는 서로 좋은 아이디어 같은 것들도 편하게 얘기하죠. 이번 한재림 감독은 이게 세 번째 영화인가? 전작이 <연애의 목적>, <우아한 세계>. 재미있는 소재 가지고 잘 만드는 감독이에요.
배우가 가지고 있는 얼굴과 연기력 중 어떤 게 더 중요한가요?
연기력이 중요하죠. 하지만 다 필요하죠. 삼위일체라는 말이 있잖아요. 요즘은 배역이 다 캐릭터화된 시대니까 얼굴에 그렇게 구애를 안 받는데, 우리 젊었을 때만 해도 주연은 ‘이런 정도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는 게 정해져 있었어요.
그런 말도 있다면서요. 왕을 할 수 있는 얼굴과 못하는 얼굴.
그렇죠. 왕을 연기하려면 귀티도 나야 하고, 비호감형 얼굴이면 안 되고. 이런 게 어느 정도 있었죠. 요즘은 옛날하고 많이 달라져서 캐릭터가 더 중요하게 부각되기 때문에 매우 다양해졌죠. 물론 캐릭터의 분위기는 가져야 하죠.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하세요?
전에 비해 배우 층이 확 넓어졌잖아요? 주•조연도 굉장히 좋아지고. 옛날에는 선남선녀 스타일만 주연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 역할에 맞으면 주연이 되는 거죠. 지금 정서는 분위기를 보고, 뭐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다른 얘기가 나올 수도 있는거지.
데뷔했던 무렵을 지금도 가끔 되돌아보나요?
자주 생각해요. 사람들이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고 그러잖아요. 또 거기에 너무 집착하면 안 되겠지만, 과거가 현재 자신의 뿌리라고 볼 수 있잖아요. 뿌리를 망각해서도 안 되겠죠. 그걸 ‘초심’이라고 하죠. 배우도 연륜이 생기면서 연기력도 늘어가고 그러지만 나는 초심이 그 사람의 휴머니즘 이라고 보거든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간성.
배우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인간성’이라는 뜻인가요?
예술을 하려면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잖아요. 사람이 안 된 상태에서 하는 연기는, 기초가 단단하지 않은 땅에 건물을 올리는 형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누구나 마음, 자기 안에 휴머니즘을 키웠으면 좋겠어요. 그 위에 자신의 전공대로 연기면 연기, 사업이면 사업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초심, 초심 그러는 거지. 초심은 어느 분야에도 있는 거예요.
그때에는 어떤 꿈을 꾸었죠? 겁 없는 청춘이었을 것 같기도 한데요.
그때는 젊었으니까. 겁도 없고, 세상이 넓어 보이고, 세상의 끝이 보이지 않았죠.
당신은 과거의 은막에 머물지 않고, 항상 우리와 함께하는 배우죠. 가장 대단해 보이는 지점이 바로 그거예요.
음. 그렇겠네. 시간을 공유하니까. 무슨 얘기인지 알겠어요. 그런 얘기 나오면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듣지.
충무로의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모두 당신에게 간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하하하. 뭐라고 말해야 하나.
지금 ‘나는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을까’라고 생각하셨죠?
정확하게 알고 있네…. 하하!
동시대의 배우로 남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기도 하나요?
뭐 항상 진취적인 것 같아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그때그때 닥치면 흡수가 되듯이 말이지. 예를 들면 나는 크레용팝 그 친구들 참 흥미롭더라고요. 얼마 전에는 호텔에서 열린 풀사이드 파티에 놀러 갔어요. VIP 구역에 자리 하나 맡아놓고 사람 구경하면서 (춤을 추며) 이렇게 춤을 췄죠 .나더러 사람들이 춤을 요즘 애들처럼 춘다고 하더라고.
새로운 걸 보고 ‘이게 뭐지?’가 아니라 ‘재밌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닐 거예요.
그런 것 같아요. 난 좀 낙천적이에요. 내 자신에게 정확히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게 있다면 바로 낙천적이라는 거예요.
배우 생활을 할 때 그 낙천성이 대단한 장점이 될 것 같은데요?
올 상반기에는 내가 드라마를 했잖아요? <구암 허준>에서 유의태 역인데, 지금으로 말하면 한의원 원장이지. 그때는 다른 건 몰라도 선(善)하게 살아야 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아까 초심에 대해서 얘기했지만, 그런것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멘토가 되기도 하는 거고. 그래서 난 심성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반드시 해요. 각자 자기 자리에서 사람 냄새를 풍기면서 사는 거에요. 사업하시는 분이나, 정치하시는 분이나 그런 정서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요즘 그런 생각을 해요.
‘마음 공부’가 필요하다는 말이네요. 배우에게도 누구에게도.
좋은 휴머니즘이 쌓이고 쌓이면서, 자기 전문 분야의 연륜이 쌓이면서, 여기에 노하우가 축적되면 동그란 우주의 연기가 나오는 거지!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에요.
자기가 알아서 살아야 하는 게 자기 인생이죠. 자기가 잘 알아서 살아야 타인에게 피해도 안 주고, 타인과 공존하면서 살 수 있어요. 혼자 사는 게 아니고 사회의 일원인데, 자기를 잘 다스릴 줄 알아야 잘 살 수 있죠.
그게 모두에게 숙제인지도 모르죠.
우리는 항상 ‘이럴 것이다’라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 틀에서 최대로 발전하다가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는 존재지. ‘마음 공부’가 필요하죠.
지난 10년 동안 정말 멋진 영화를 많이 촬영했더군요. 아끼는 작품이 많죠? <지구를 지켜라>도 딱 10년 되었더군요. 그 영화 때부터 배우 백윤식을 다시 보게 되었어요.
좋은 영화가 정말 많았죠. <지구를 지켜라>는 한국에서 흥행이 잘 안 되어 그게 딱 한 가지 아쉬웠는데, 영화 마니아나, 영화를 좀 알면서 즐기는 사람들이 그 영화를 접하면 대단히 좋아하더라고요. 전에 뉴욕의 한 영화제에 참석했는데, 그곳 영화계 사람들이 그 영화를 많이 봤더라고요. <범죄의 재구성> 때문에 그 영화제에 갔었는데 그 얘기보다는<지구를 지켜라>얘기를 하는 거야. 장준환 감독도 그 영화로 각종 영화제를 휩쓸었고요.난 <지구를 지켜라>가 한국 영화계에 족적을 남긴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필모그래피 중에서는 ‘이 영화는 다시 찍고 싶다’는 작품도 있나요?
<싸움의 기술> 같은 경우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에요. 본 사람들은 재미있다고 하는데, 배우 입장에서 양이 덜 찼거든요. 기대한 만큼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어요. 워낙 케이블 TV로 많이 나가니까 안 본 분들이 없더라고. 어떻게 하면 싸움을 잘할 수 있냐는 생뚱맞은 질문도 많이 듣는 걸 보면 소재 자체가 괜찮았던 거예요.
영화는 공동 작업이니까, 늘 아쉬운 게 있기 마련이겠죠.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이건 완벽했다’고 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늘 주어진 환경과 여건에서 열심히 하는 거예요. 생각해 봐요. 몇 달에서 몇 년씩 준비하고, 촬영한 걸 120분 안에 다 주워 담으려고 하면, 늘 뭔가 아쉬움이 남지.
미국의 한 여배우는 자기가 나온 영화를 안 보는 것으로 유명해요.
안 보게 될까? 보고서 괴로워하겠지만 보게 될 것 같은데. 글쎄, 안 볼 수 도 있겠다. 하도 이상한 사람이 많으니까.
당신에게는 연기가 평생의 직업이 되었죠.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었어요?
고맙게도 그런 적은 없었어요. 하지만 ‘다른 분야에서 일하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살포시 지나가더라고.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지만 늘 단조로운 역할만 해서 지루했던 적은 있었어요.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재미는 어떤가요?
나는 캐릭터 폭이 넓어요. 대신 매 작품 캐릭터화하는 게 걱정이지. 내 모든 걸 쏟아서 캐릭터를 만들고, 그걸로 달려가는 거지. 그러다 보면 어떤 캐릭터를 할 때 신이 난다기보다는, 매 작품 그냥 노력하는 것 같아요.
그게 작품 속에서 백윤식이 아니면서도, 늘 백윤식으로 보이는 비결인가요?
나를 밖으로 꺼내서 캐릭터화하는 경우도 있고, 그 캐릭터를 내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서 표현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니까, 캐릭터를 내 안으로 가지고 와서 나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함을 섞어서 다시 만들어 꺼내죠. 그러니까 나만 표현할 수 있는, 맛이 우러나는 연기가 나오는 거지. 그게 연기의 최고 재미라고.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허윤선
- 포토그래퍼
- 유영규
- 스탭
- STYLIST/ 윤은영, 헤어/수철(순수 청담점), 메이크업/한마음(순수 청담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