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룩이 전하는 로맨티시즘
화이트가 미니멀리즘을 벗고 로맨티시즘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화이트만이 지닌 깨끗함에 레이스, 아플리케, 크로셰 등 쿠튀르적인 장치를 더해 웨딩드레스를 연상시키는 텍스처 플레이를 선사한 것. 여자의 마음을 뒤흔드는 흰색 물결을 만끽하라!
패션계는 지성에 집착한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이라는 편견에 맞서기 위해 열렬하게 교양을 더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자를 보다 지적이고 멋지게 보이게 하는 미니멀리즘이 이토록 오랫동안 기세를 떨치고 있는 것을 보면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미니멀리즘은 두 가지 컬러를 사랑한다. 블랙 그리고 화이트.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형태에 더해진 블랙과 화이트는 모든 장식과 색채에서 해방된 미학을 기능에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은 물론 패션을 지적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해왔다. 하얀색에 열광했던 철학자 괴테가 “교양 있는 사람들은 색에 거부감을 느낀다”고 말한 것처럼. 다른 점이 있다면 흰색을 고귀하게 여겼던 그때의 사람들과 달리 지금의 우리는 검정을 편애해왔고 순수한 여성성을 상징하는 흰색은 줄곧 다른 색을 아름답게 드러내주는 2인자에 머물러왔다는 것이다.
멋있는 여자에서 사랑스러운 여자로 트렌드가 움직이면서 미니멀리즘과 페미니즘을 연결하는 고리로 디자이너들이 흰색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고, 드디어 화이트는 2015년 봄/여름 컬렉션의 메인 트렌드로 부상하며 페미니즘을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이번 시즌 컬렉션을 마주하며 브라이덜 컬렉션을 접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디자이너들은 레이스, 오간자, 튤 등의 섬세한 소재와 자수, 프릴, 러플 등의 온갖 장식으로 치장한 화이트 드레스를 쏟아냈다. 몇 시즌 전부터 나온 실키한 소재를 사용한 화이트 테일러드 슈트나, 깨끗함을 강조한 50년대 풍 레이디라이크 룩을 보며 화이트가 트렌드의 방향을 바꾸어놓으리라 예상했지만 이토록 강력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흰색은 간결한 실루엣과 함께’라는 고정관념이 지배적 인데다가 레이스와 아플리케로 점철된 화이트 드레스가 에지를 추구하는 패션계의 견고한 벽을 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웨딩드레스로 입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은 쿠튀르 드레스의 행렬을 보고 있으니 정체되어 있던 호르몬이 자극되고 마음이 말랑해지면서 사랑스러운 것들에 관대해진다.
여성성으로 충만한 화이트 드레스의 물결은 발렌시아가, 디올, 지방시, 클로에, 발렌티노, 로베르토 카발리, 에르뎀까지 이어진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레이저 커팅, 크로셰, 아일릿 등의 소재를 사용해 살갗을 은근하게 드러내며 센슈얼함을 강조했다는 것. 오간자처럼 유약한 소재뿐만 아니라 울, 코튼, 가죽 등에 이러한 요소를 적용해 보다 모던한 뉘앙스를 풍기는 것도 특징이다. 장인 정신의 노고가 느껴지는 디테일로 승부를 건 쪽도 세력이 만만치 않다. 사실적인 꽃과 새를 은사로 섬세하게 수놓은 줄리안 맥도널드, 유리같이 투명한 오간자와 비즈를 장식한 자수를 모던한 실루엣에 적용한 프란체스코 스코나밀리오, 대범한 꽃 자수가 놓인 오간자에 러플을 더해 여성성을 극대화한 로베르토 카발리와 서정적인 룩을 완성한 알베르타 페레티, 다이아몬드 모양의 자수를 커팅한 깃털을 달아 쿠튀리에를 완성한 발렌시아가 등 여자를 진짜 여자답게 만드는 아름다운 장식이 잠 자고 있던 우리의 여성성을 일깨운다.
무엇보다 화이트 로맨티시즘을 하이패션으로 승화시킨 것은 여성스러움과 거리가 먼 액세서리 매치를 통해 반전의 효과를 노렸기 때문이다. 지방시는 순백색의 크로셰 소재 비대칭 미니 드레스에 롱 가죽 부츠를 매치해 지방시 특유의 록적인 무드를 가미했다. 세상 그 어떤 여자보다 청순해 보이는 동시에 도발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1970년대 보헤미안 무드의 화이트 드레스를 입은 클로에의 모델들은 레이스업 글래디에이터 슈즈로 로맨틱 지수를 쿨한 감도로 변화시켰다.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화이트 니트 드레스 시리즈 역시 반전 매력으로, 동시대적으로 로맨티시즘을 소화하는 방법을 제시한 디자인. 러플과 레이스의 화이트 드레스 안에 에로틱하게 블랙 이너웨어를 매치하고 와일드한 악어가죽 롱 부츠를 신어 스타일의 강약을 조율했다. 이처럼 올 시즌은 쿨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마음껏 여자여도 좋다. 그리고 그것이 촌스럽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기억해야 할 것은 화이트 컬러 그리고 레이스와 자수가 전하는 한없이 달콤한 로맨틱시즘이다.
- 에디터
- 패션 에디터ㅣ남지현
- 포토그래퍼
- 심규보(Shim Kyu Bo), LEE HO HYUN, INDIGIT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