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빛깔로 물드는 배우, 조민수
뜨거운 절정 끝에 서서히 스며드는 이별. 사랑의 감정 곡선은 어쩌면 흐드러지게 만개한 청춘을 거쳐 아스라이 낙엽으로 물들어가는 인생과도 닮았다. 50대에 접어든 배우 조민수는 지금 더 깊고 아름다운 빛깔로 물들어가고 있다.
“팬시점에 가서 액세서리 쇼핑하는 것을 좋아해요.” 돌고래 모양의 귀고리와 독특한 별 장식의 이어커프를 칭찬하자 조민수가 말했다. “10대 소녀들을 위한 문방구의 액세서리에는 어른을 흉내 내는 아이처럼 유치하면서도 순수한 매력이 있거든.” 아직 동화책을 읽고 눈물을 흘리며, 문구점에서 몇 시간씩 학용품을 구경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힐링이라니, 이건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드라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에서 ‘하루를 살다 죽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라고 말하던 절망적인 눈빛의 춘희, 드라마 <결혼의 여신> 속 자신만만하고 호탕한 지선, 영화 <관능의 법칙>의 세월의 여유가 묻어나는 관능을 보여준 해영, 그리고 영화 <피에타>의 뒤틀린 모정을 간직한 미선까지, 그동안 우리가 상상해온 조민수와는 전혀 다른 지점의 모습이 아닌가. 음울하고 섹시한 아름다움의 기 센 여배우 조민수에게서 귀여운 ‘바른 생활 소녀’의 모습은 결코 떠올리지 못했으니까. 연기로 인터뷰 주제가 바뀌자 그녀는 그제야 ‘조민수’다워졌다. 자신을 뜨겁게 달굴 수 있는 연기에 목마르고 작품을 하나 할 때마다 생명이 긁혀나가는 게 느껴진다는, 여전히 본능이 거칠게 팔딱대는 동물적인 배우. 조민수는 남들보다 천천히 나이 드는 법을 아는 여자임이 분명하다.
오늘 촬영을 하며 조민수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치는 배우 같다 생각했어요.
아직 전 제가 완성된 상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이런 사람이다실제 조민수는 어떤 사람인가요?’라고 정의해보려 해도 잘 안 되요. 매번 흐트러져버리거든요. 단, 이것만은 확실해요. 조금 더 날것 그대로 살고 싶어요. 사람 냄새 풍기면서요. 연기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보니 삶을 주체적으로 살기 힘들 때도 많았고, 주변 사람들이 나만 바라보고 위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어요. 어리석은 관념 속에 갇혀 있었던 거죠. 20대 때는 버릇 없는 후배라는 비난을 많이 들었는데, 아마 거침없는 말투와 하고 싶은 말은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었을 거예요. 한동안 착해 보이려 애썼는데,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지 한참 뒤에야 깨달았죠. 내가 어떤 모습이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거잖아요. 이제 그냥 이렇게 원래 모습 그대로 세상과 부딪히고 끊임없이 뉘우치며 살고 싶어요. 조민수라는 사람의 성장판은 아직 열려 있으니까요. 연기도 마찬가지예요. 온전히 나를 쏟아내되 틀 안에 갇히지 않으려고 애써요. 요령이 생기지 않도록.
요령이 생긴다는 건, 연기가 더 편해진다는 의미가 아닌가요?
데뷔한 지 거의 30년. 지금의 조민수는 너무 많은 색이 칠해진 그림 같아요. 그래서 깨끗한 백지 상태가 되기 힘들죠. 어떤 역할을 온전히 그 인물 자체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예요. 모든 역할이 ‘조민수’스러워질 수 있는 거니까. 요령이 생기는 순간 스스로의 굴레에 갇히게 되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연기의 폭이 정해져 있다면 너무 서글프잖아요. 20~30대 때 전 동물적 배우에 가까웠어요. 이미 가지고 있는 본능, 느낌만으로 연기하다 보니 어느 순간 비슷한 지점을 맴돌고 있더라고요. 한번은 연기를 하다 그 벗겨지지 않은 한 꺼풀이 너무 어렵고 서러워서 화장실에서 펑펑 울었어요. 그때 깨달았어요. 나에게 연기란 치열하게 힘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베테랑 배우가 아직 연기가 힘들다고 하니 잘 이해가 안 되요.
같은 배우라도 누구는 최고의 배우라고 칭송하고 또 누구는 볼품없는 연기력이라 비난해요. 하지만 전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그런 평가가 아프지 않은 그런 시점에 다다르고 싶어요. 물론 지칠 때도 많아요. 연기를 할 때마다 생명을 조금씩 긁어내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대중을 상대하는 배우라면 이런 게 기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긴장감을 놓고 싶지 않아요. 이 끈이 끊어지는 순간, 저는 더 이상 배우 조민수가 아닌 거죠.
연기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어떤 배역을 맡으면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가를 머릿속으로 수없이 그려봐요. 드라마나 영화 모두 대부분 그 인물의 특정한 점이나 시간대만 보여주는 거잖아요. 전 작품에 드러나지 않는, 그 사람이 보냈을 평생의 시간을 소설처럼 펼쳐봐요. 글로 써보고 그림으로도 그려보면서요. 이렇게 치열하게 고민해봐도 그 인물을 온전히 조민수에게 녹여내기는 불가능할 거예요. 그래도 고민하지 않는 것보다 적어도 1퍼센트쯤은 달라지겠죠. 그 미묘한 차이를 위해 노력하는 거예요.
배우 조민수에게 롤 모델이 있다면?
누군가를 온전히 닮고 싶다기보단 사람마다 닮고 싶은 면이 있다는 말이 정확할 거예요. 예를 들어 작가 김수현 선생님. 그 연세에도 여전히 젊은이들의 언어를 사용하실 줄 알죠. 분명 세상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자신의 모든 세포를 열어놓고 있다는 의미일 거예요. 또 사회적으로 배척당한 배우들을 과감하게 기용하기도 하고요. 자신이 가진 힘을 그렇게 사용한다는 사실이 멋져요. 드라마 <미생>의 배우 임시완을 보면서는 그 섬세함에 감탄했어요. 드라마를 보며 그 역을 따라 해봤거든요. 아마 저라면 그런 리액션을 못했을 거예요. 영화 <화이>를 보면서는 여진구의 동물적인 연기에 반했고요. 독립영화 속 배우들의 때묻지 않은 연기에 놀라기도 해요. 롤 모델은 매번 변해요. 세상 모두가 저에겐 롤 모델인 셈이죠.
50대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여전히 아름다워요. 아름답게 나이 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요?
좋은 생각을 하려고 노력해요. 우리의 인생은 초등학교 1학년 1학기 교과서 같아야 해요. 책은 시대나 저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지만 1학년 교과서의 내용은 절대 바뀌지 않아요. 그 안에는 인간으로서 꼭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덕과 윤리가 들어 있거든.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가치 말이죠. 전 그걸 지키면서 살고 싶은 거예요. 흔히들 말하는 ‘다 그래’라는 말이 제일 싫어요. 무관심의 핑계 같은 말이잖아요. 적어도 나 한 명쯤은 다 그렇지 않게, 좀 다르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좋은 생각만으로도 사람의 얼굴이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요?
안 그럴 것 같죠? 신기하게도 정말 그래요. 요즘 등산을 하는데, 산을 오를 때마다 마음속으로 속삭였어요. ‘오늘도 쉬었다 갈게. 고마워요’라고.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고목, 작년에 피었던 자리에 다시 피어난 들꽃을 보며 고맙다고 되뇌고요. 내려올 때는 쓰레기를 주워요. 저에게 대지의 기운을 얻게 해준 산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 같은 거죠. 그런데 이런 마음, 속삭임들이 차곡차곡 쌓여 제 마음을 희석시키나 봐요.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니 제가 좀 더 착해져 있더라고요. 세상을 바라보는 눈빛도 부드러워졌고요. 좋은 생각이 얼마나 사람의 인상을 바꿔주는지 실감했죠.
50대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어려 보여요. 비결이 있다면?
유치하지만, 아침에 눈을 딱 뜨면 ‘오늘은 30대부터 시작해볼까?’라고 생각해요. 어떤 날은 오늘의 내가 20대라고 생각하죠. 세월을 붙잡을 수는 없지만 그 나이에 갇혀 살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어린 친구들과 많이 대화하려고 애써요. 연애 고민, 운동과 다이어트 이야기, 그리고 끊이지 않는 인생에 대한 고민까지 그들에게는 팔딱대는 에너지가 있거든요. 선생님들과는 주로 약 얘기를 나누는 것과 반대로 말이죠.(웃음) 스스로 어려지려는 생각, 고루해지지 않으려는 노력이 어려 보이는 비결이 아닐까요?
메이크업을 할 때 특히 신경 쓰는 부분이 있나요?
평소에는 아무것도 안 바르고 립스틱 하나만 발라요. 제일 좋아하는 것은 레드 립스틱. 내 자신이 특별해지는 기분이 드니까요. 촬영이 있을 때면 아이 메이크업에 신경 쓰는 편이에요. 나이가 들면 눈 밑이 처져서 눈이 점점 동그래지거든요. 전 되도록 아이라인을 길게 빼서 눈을 길게 그리려고 해요. 세월이 묻어나는 깊이 있는 눈이 좋거든요.
조민수만의 뷰티 노하우가 있다면?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꼭 반신욕을 해요. 이건 20대 때부터 계속해온 습관이에요. 워낙 몸이 많이 붓는 체질이거든요.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서도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죠. 온몸 구석을 주물주물 마사지해요. 조금의 뭉침도 허용하지 않을 태세로 말이죠.
반신욕을 하면 모공이 늘어지기 마련인데, 모공 없이 결이 고운 피부예요.
레몬 반쪽을 얼음물에 짠 다음 거즈에 적셔서 팩처럼 얼굴에 얹어둬요. 반신욕으로 뜨거워진 얼굴이 순식간에 진정되거든요. 모공 관리와 비타민 케어를 동시에 하는 셈이죠. 전 이걸 5백원의 호사라고 불러요. 레몬 반쪽이면 비싼 팩보다 효과적이니까요.
군살 없이 탄탄한 몸매의 비결도 궁금해요.
어릴 때는 아예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죠. 근육이 잘 붙는 체질인데, 작은 체구에 근육이 붙으면 둥글둥글해 보일까 봐 싫었거든요.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체력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더군요. 최근에서야 운동을 시작했어요. 거창한 건 아니고 일주일에 두세 번 집 앞 산에 올라가기. 산 중턱까지 한 30분 걸어 올라갔다가 거기서 30분간 스트레칭.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거울 속 내 몸을 관찰해요. 예를 들어 엉덩이. 등산하면 무조건 힙업이 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몸의 변화를 지켜보며 발에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에 힘을 주며 걷는 방법을 터득했어요. 이렇게 자신의 몸에 맞는 운동을 찾아내는 게 중요해요.
앞으로 어떻게 나이 들고 싶나요?
분명 배우의 얼굴 위에 늘어가는 주름과 검버섯, 깊어진 눈빛이 주는 감동이 있다고 믿어요. 전 시간의 흐름을 슬퍼하고 싶지 않아요. 오히려 즐기고 있죠. 그게 건강하고 아름답게 나이 드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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