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없던 배우, 천우희
지금 충무로가 가장 사랑하는 배우, 천우희. 영화계는 이런 여배우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그녀는 여배우의 계보를 다시 쓰고 있다.
만약 당신이 천우희를 만났다면, 아마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가녀린 몸을 가졌고, 자그마한 얼굴에 나직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다. 웃을 때조차 그렇다. 그 얼굴과 목소리를 보고 있노라면, 지금껏 그녀가 연기해온 캐릭터들이 조금씩 지나며 의아함은 곧 놀라움으로 바뀐다. 지금까지 그녀는 ‘연기’를 해왔던 것이다. 자신과 조금도 닮지 않은 캐릭터를, 오로지 연기의 영역에서 창조해냈다. 그런 의미에서 천우희야말로 진짜 연기자다. 조용한 소녀 같은 그녀는 필름 카메라가 아닌 사진가의 뷰파인더 앞에서도 연기를 할 줄 안다. 가만히 웃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눈빛과 몸짓을 보인다. 이 시대의 감독들이 그녀를 원하고, 선택하는 이유가 아닐까? 그런데 그 선택은 일방적이지 않다. 그녀 역시 감독을 원하고 선택하니까. 지금 그녀가 선택한 영화는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한 <해어화>다. 영화 <손님>과 <뷰티 인사이드>, 나홍진 감독의 차기작인 <곡성>을 마친 후, 천우희는 꼬박 1년을 이 영화에만 몰두하고 있다. 스물아홉, 20대의 마지막 가을을 앞둔 천우희의 계절은 그렇게 지나고 있다.
오늘은 특정 영화 얘기 말고, 다른 얘기를 해보는 거 어때요?
하하. 그래요? 제 일상은 재미가 없는데….
‘그 장면 어떻게 그렇게 잘했어요?’처럼 지나간 천우희 말고, 지금 천우희의 이야기요.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해요?
요즘은 고민이 좀 많아요. 지금 촬영하는 영화가 배울 게 참 많아요. 기생이었다가 가수를 꿈꾸는 역할인데,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춰야 해서 지난 1월부터 준비하고 6월부터 촬영을 시작했어요.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도 좀 지치는 감이 있었는데 촬영이 들어가니까 어려워요.
어떤 점이 어려워요?
연기할 때마다 똑같지만 작품을 대할 때마다, 항상 이전 것보다 더 나은 연기를 하고 싶고, 깊이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되면 괴롭거든요. 제가 순간 집중력이 좋은 편이었는데, 요즘 그게 잘 안 될 때는 스스로 자책해요.
자책하는 타입이에요?
주변에서 격려를 많이 해줘요. 근데 아무리 칭찬을 받아도 제 스스로 납득이 안 되면 그게 잘 안 받아들여져요. 8이 칭찬이고, 2가 비판이라면 주변에서는 8이 더 크니까 8을 보라고 하지만 저는 2를 봐요. 스스로를 괴롭혀요. 혼자 풀어질까 봐 스스로 안도하는 게 싫은 것 같아요.
<한공주>로만 상을 열다섯 개나 탔는데도 만족하지 못하다니요.
그 영화를 찍은 것과 개봉한 게 되게 오래전이에요. 상을 타고 나서 반응이 좀 달라지긴 했는데, 그렇다고 마음을 놓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럼 이런 말은 어때요? 다른 관록의 여배우들이 저와 인터뷰하면서 당신의 연기를 칭찬하더군요. 동료들의 인정은 더 특별하지 않아요?
그분들이 저를 아신다는 게 아직도 신기해요.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제 작품을 보셨다는 거죠? 칭찬해주실 때, 내가 정말 그 정도를 하나 싶을 때도 있어요. 그 정도는 아닌데 상을 타며 너무 부풀려진 건 아닌가 싶고요.
의심이 많네요!
그게 좋은 거 같아요. 자기 일에 만족감을 느끼는 순간 발전이 없다고 생각해요. 특히나 예술 쪽은요. 내가 연기 실력이 있는지, 그걸 꾸준히 보여드릴 수 있는지 생각해요. 더 유명해질수록 어려워지겠죠.
충분히 유명하지 않아요? 더 유명해지길 바라요?
젊은 관객들은 잘 아는데, 40대 이상 분들은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작품 욕심이 많죠? 쉴 새 없이 작품을 이어가고 있어요.
작년 영화 <손님>부터 하루도 안 쉬고 일했어요. 개봉이 착착 이어지니까 굉장히 달리고 있는 것 같지만. 지금 개봉한 영화는 다 작년에 촬영한 거예요. 다행히 하나가 끝나고 또 새로운 걸 시작하고 해서 괜찮았어요.
연기하지 않을 땐 무엇을 해요?
평소에 일이 없을 때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안 할 때는 정말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해요. 혼자서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어려운 일이나 속상한 일이 있어도 혼자 되게 많이 생각해요. 이 작품이 끝나고 나면 조금 가볍게 살고 싶어요. 왜 나이에 맞지 않게 애늙은이처럼 혼자 뭘 그렇게 많은 생각을 짊어지며 살았나 싶은 생각이 들거든요. 여행을 가고 싶어도 부모님 생각하고, 시간 걱정하고, 돈 걱정하고 그러다가 다음으로 미루게 되는데, 더 이상 미루다가는 시간이 금방 지나갈 것 같아서 그냥 막말로 질러보는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뭘 지를지 궁금한데요?
이제는 여행을 가고 싶으면 그냥 그날에 떠나고, 뭘 배우고 싶으면 다음 날 바로 배우기 시작하려고요. 저는 취미도 그렇고 뭐 하나를 하면 정말 파고들어요. 어느 날 책꽂이를 18시간 연속으로 눈이 빠지도록 만들었어요. 뭘 하나 하면 끝장을 봐야 해요.
이 작은 목소리로 어떻게 연기할 때에는 그런 발성을 내죠?
그래서 다들 평소에는 왜 그렇게 기력이 없냐고 해요. 어디 아프냐고, 무슨 일 있냐고, 잤냐고 물어요. 근데 그냥 제 목소리가 그래요. 근데 사람들이 연기할 때는 어떻게 그렇게 달라지냐고 물어서 저도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류승룡 선배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얘는 평소에 그렇게 기력이 없다가 연기할 때만 힘을 빡 주는 거라고.
타고난 체력이 안 좋은 사람들이 그렇죠. 필요할 때, 빡.
일상에서 특별한 게 없으니까 연기로 푸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그래서 특별하고 강한 역할을 많이 선택하나요?
이런 역할이 정말 내가 원했던 걸까, 아니면 우연히 자연스럽게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걸까 생각해보니 반반이었어요. 예전에는 내가 왜 항상 강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스트레스도 있었고 혹시 이러다가 소진되어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에는 만약 이게 내 운명이라면 까짓 거 정말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배우의 행로는 비슷하잖아요. 제가 좀 다른 길을 가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해요.
웹드라마 <출중한 여자>는 시종일관 밝은 역할이었죠.
그런 역할도 많이 하고 싶어요. <한공주> 때문인지 저를 어려워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 생각을 깨고 싶어요. 코미디나 B급 영화도 하고 싶어요.
지금까지 작품은 스스로 선택한 거예요?
회사에서 권한 작품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다 제 선택이었어요. 저는 시나리오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 역할이 작든 크든 제 부분만 보는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시나리오를 보고 정하는데 처음 읽은 시나리오의 느낌이 거의 90% 맞게 가요.
회사에서 반대했는데 우겨서 한 작품도 있어요?
<한공주>가 그랬어요. 회사는 우려했던 것 같아요. 워낙 어려운 이야기라. 예전에는 겁이 없었는데 요즘에는 살짝 걱정이 되요. 스물아홉이라 그런지, 앞으로의 삶도 걱정이 되고요. 그런데 감독님들은 하나같이 여배우는 30대가 꽃피는 시기라고, 30대를 기대하라고 말씀하세요. 빨리 30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매일 일기를 쓴다면서요? 가장 짧은 일기는 뭐였어요?
‘아무것도 안 함’이라고 쓴 적이 있어요! 하하. 10년째 매일 일기를 쓰고 있어요. 매번 다른 노트에 일기를 쓰다가, 재작년에 3년 일기장을 샀어요. 3년동안의 같은 날짜가 있는데, 작년, 재작년 같은 날을 보면서 자극이 많이 되더라고요. 3년 동안 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게 좋아요. 어떨 때에는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공간이 부족하면 워드에 옮겨놓기도 해요.
연기하는 데 가족도 든든한 지원이 되어주나요?
그럼요. 부모님이 이천에서 한정식 식당을 오래 하셨어요. 이제 힘드셔서 접으려고 하는데 친오빠가 대를 이어서 할까 생각하고 있어요. 사실 엄마보다 아빠가 더 요리 잘하세요. 엄마는 식당을 오래 하셔서 손이 빠르고 대중화된 맛을 잘 잡으시지만 아빠는 제가 서울에 있다가 이천 집에 내려가면 도착하는 그 시간에 딱 맞춰서 제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해놓으세요. 그릇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세요.
당신의 ‘집밥’은 그럼 아빠 밥이군요.
어릴 때도 아빠가 스테이크 해주시고, 짜장면, 냉면 다 직접 해주셨어요. 저희가 맛있게 먹는 걸 보는 게 낙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나저나 <곡성>은 올해 개봉하는 거죠?
그건 감독님만 아실 것 같아요. 하하.
나홍진 감독에 쟁쟁한 배우들이 모였으니, 다들 관심이 많아요.
감독님 괜찮았냐는 질문 정말 많이 받았어요. 제가 괜찮다고 해도 다들 안 믿어요. 감독님은 정말 열정적인 분이지만 그렇다고 소문이 다 맞진 않아요. 저는 상대방에 따라서 성격이 바뀌어요. 센 성격이시면 저도 세지고 조용하시면 저도 차분해지고 그래요. 지금까지 감독님들마다 정말 다 다른 캐릭터였는데, 잘 맞추는 편이에요. 나홍진 감독님이 별로라고 하시면, 저는 “뭐가 별로예요. 저도 더 이상은 할 수가 없어요. 최선을 다했어, 몰라.” 이렇게 세게 나가요. 감독님이 시켜서 했는데 감독님이 “야, 별로다. 병신 같다” 이러면 저도 “감독님이 시켜놓고 왜 이래요”이래요. 지금까지 했던 감독님 중에 농담을 가장 많이 주고받았어요.
소문대로 대단한 작품이 될 것 같아요?
어떤 배우든 이 시나리오를 받으면 정말 안 할 수가 없어요. 어마어마한 시나리오예요. 감독님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너무 궁금해요.
다른 배우들과의 교감은 어땠어요?
곽도원 선배님이 너무 예뻐해주세요. 황정민 선배님은 붙는 장면이 없어서 많이 못 뵈었고, 쿠니무라 준이라는 일본 배우분은 말은 잘 안 통하지만 연기가 엄청나요. 연기할 때 저랑 눈을 딱 마주치는 장면이 있었는데 순간 되게 짜릿했어요. 평소에는 동네 할아버지 같은데 연기할 때는 정말…. <뷰티인사이드>의 우에노 주리 씨도 그렇고 일본 배우들은 느낌이 달라요. 일본 배우들이 갖고 있는 그런 독특한 느낌이 부러웠어요.
이제 가을이 시작되었는데, 연말까지는 계속 촬영장에 있겠군요.
이 작품으로 거의 1년을 채우고 있어요. 1월부터 시작해서 크랭크업이 10월이에요. 끝나면 꼭 제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작년부터 여행을 가고 싶었어요. 근데 작품이 들어오면 피할 수가 없거든요. 이걸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할 수도 있고, 인연일 수도 있으니까요. 올해 온힘을 다해서 작품 마무리를 잘하고 나서 두 달은 여행을 떠날 거예요.
영화만큼 사진 작업도 흥미로워요?
예전에는 영상이 아닌 것에 부담이 있었어요. 연기는 계속 움직이면 되지만 사진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사진 작업은 할수록 재미있어요. 똑같이 렌즈를 통해 연기를 하는 거니까요. 오늘은 너무 편안했어요. 라벤더색 배경도 예쁘고, 음악도 좋았어요.
- 에디터
- 허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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