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의 봄날
톨게이트를 지나자마자 이 도시에는 봄이 먼저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따뜻한 날씨, 그리고 통영에 머물렀거나 머무르고 있는 예술가를 향한 자부심과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곳. 통영에 하루만 머무는 것은 너무 짧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통영을 찾았던 적은 없다. 하지만 강구안에 내리자마자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이 도시를 찾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 물길을 따라 배들이 바다로 나간다는 사실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좁고 아늑한 항구, 몸에 감기는 따스한 바람, 봄꽃이 뒤덮기 시작한 산은 분홍색, 레몬색, 하늘색, 에메랄드색 등 파스텔빛을 입은 통영의 낮은 건물들과 더없이 잘 어울린다. 통영에 들어서는 순간 바로 알게 되는 것은 이 도시의 다채로운 빛깔이다. 통영에서 나고 자란, 추상화가 전혁림이 통영의 색이라 말한 코발트 블루 외에도 색은 넘쳐난다. 낡은 건물과 작은 주택 단지에서, 꽃나무에서, 그리고 바다에서.
강구안에서 시작할 것
수년 전 많은 사람의 발걸음을 통영으로 이끈 홍상수 감독의 영화 <하하하> 에서 주인공들이 묵는 숙소의 이름은 ‘나폴리모텔’이다. 동양의 나폴리라고 하는 통영의 별명이 먼저였는지, 시내 중심에 자리한 모텔의 이름을 보고 사람들이 나폴리를 연상한 건지, 뭐가 앞섰는지 몰라도 나폴리모텔은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다. 옛날에는 ‘충무’라고 불렸고, 현재 지번으로는 항남동, 사람들은 강구안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통영의 중심이다. 이른 아침부터 도다리쑥국, 시락국, 성게비빔밥 등과 온갖 해산물을 이용한 요리가 넘쳐나는 중앙시장도 이곳에 있고, 동그랗게 돌아가는 항만을 둘러싼 길가에는 꿀빵과 충무김밥을 판매하는 가게도 넘쳐난다. 인구 14만 명의 통영은 작은 도시여서 사실 어디를 가더라도 이 주변은 한 번쯤 지나가게 된다는 말이다.
도착과 함께 바다 내음을 깊숙이 들이마시고 싶은 마음에, 첫 끼는 통영의 명물인 멍게유곽비빔밥을 택했다. ‘통영 맛집’에서는 멍게와 대합조개, 파래, 모래에서 자라는 해조류인 석모, 그리고 새싹과 김, 참기름, 깨를 밥에 비빈 뒤, 꽃을 올려 내놓는다. 통영 사람들이 우렁쉥이라고 부르는 멍게 말고도, 성게가 제철을 맞이하는 여름이 되면 성게 비빔밥이 메뉴판에 추가된다. 통영 식당 어디에서나 쉽게 보이는 도다리쑥국을 맛보는 것도 잊지 말 것. 도다리의 흰 살점과 향긋한 쑥, 칼칼한 국물이 깔끔하게 입안에서 어우러져 전날 마시지도 않은 술마저 해장되는 것 같다.
강구안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둘러싼 몇 가지 추측은 다음과 같다. 강처럼 잔잔한 바다가 공 모양처럼 안쪽으로 휘어졌다고 해서 강구안이 되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다의 생김새가 강의 입구와 같다고 해서 강구안이라는 말도 있다. 이름대로 동그란 부두를 걷다 보면 은빛 생선 상이 눈에 띈다. 2013년 정비한 강구안 카페길의 길목이다. 통영시와 예술과 도시사회연구소, 그리고 프랑스 아트 컬렉티브의 많은 작가가 주민협의회와 함께 상의해 새로이 꾸민 골목길을 자세히 살피면 카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간판을 새로 달았을 뿐 수십 년간 주류 소매업에 종사했다는 남흥상회, 풀무가 있는 대장간, 유리와 섀시를 취급하는 항남상회 등 오래된 가게들이 여전히 길에 존재한다. 통영에서 가장 오래된 여관, 원래는 함평식당으로 불린 해물탕 전문점 ‘이중섭 식당’도 있다. 난데없이 웬 이중섭이냐고? 그 역시 통영과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통영에서 머문 건 고작 2년밖에 되지 않지만 화가는 이곳에서 대표작인 소 연작 시리즈, ‘흰 소’와 ‘황소’를 그려냈다. 항남동의 선술집에서 술을 즐겨 마셨고, 통영의 다방들에서 전시를 열기도 했다던 이중섭의 이름을 단 식당은 통영산 해산물로만 끓여낸 해물탕을 선보인다. 새 간판을 단 오래된 가게들 틈틈이 카페와 옷 가게도 보인다. 새로운 것과 차분하게 받아들인 시간의 흐름이 공존하는 통영의 모습이 이 길에 녹아 있다.
예술가의 도시, 통영
통영을 찾은 이유 중하나는 통영국제음악제 때문이었다. 이 도시에서 음악제가 탄생한 이유는 바로 작곡가 윤이상의 고향이 통영이기 때문이다. 바다가 보이는 국제음악당에서 매년 3월 말부터 4월 첫 주 즈음 음악제가 열리는 시기는 통영이 가장 붐빌 때다. 윤이상 작곡가뿐만 아니다. 통영에는 ‘르네상스’라고 불릴 만한 시기가 분명히 존재했다. 1950년을 전후로 활동한 통영문화협회에는 윤이상뿐 아니라 시인 김상옥과 김춘수, 화가 전혁림 등이 함께했다. 시인 유치환이 회장직을 맡았던 이 협회는 당시 계몽운동과 한글강습, 연극 공연 등 폭넓은 문화활동을 펼쳐나갔다. 김춘수 시인은 그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내가 나이가 제일 어려서 그랬는지 총무를 맡아 행사 준비와 뒤치다꺼리 같은 것을 책임지곤 했다. <민족문화의 밤>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내걸고 거의 매주 행사를 벌이곤 했다.’
문화 예술의 도시로서 통영의 정체성은 사실 수백 년 전으로 올라간다. 300여 개의 섬이 점점이 펼쳐진 아름다운 다도해와 빛 때문만은 아니다. 통제사가 2년에 한 번씩 부임하면서 한양의 문화는 자연스레 도시에 스며들었고, 12공방을 비롯한 공예품을 만드는 장인들과 예인들 역시 이곳을 찾았다. 아픈 역사이긴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도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웠던 통영은 새로운 문물을 바로 접할 수 있는 곳 중 하나였다. 1914년에 이미 극장이 들어섰고, 문화 살롱 역할을 하는 다방도 있었다. 70년 전의 ‘통영 르네상스’는 이런 배경 덕분에 가능했다.
출판사 남해의 봄날은 통영이 낳은 예술가와 장인, 지역 문화를 통영의 현재와 잇는 가장 큰 교두보 중 하나다. <나는 작은 회사에 다닌다>, <서울 부부의 남해 밥상> 등 대안적인 삶과 여행, 문화와 관련된 책을 꾸준히 펴낸 남해의 봄날이 5년 전 첫 자리를 튼 곳은 봉수골. 마을 입구부터 봉평주공아파트를 지나 용화사 입구에 오르기까지 좁은 길에 집과 식당, 꽃나무가 어우러지는 마을다운 마을이다. 백남준 등과 교류한, 한국을 대표하는 추상화가 전혁림 화백을 기념하는 미술관이 있는 곳도 바로 봉수골이다. 남해의 봄날은 전혁림 미술관 바로 옆에 책방 ‘봄날의 책방’과 게스트하우스 ‘봄날의 집’의 문을 열었다. 미술관과 책방, 그리고 게스트 하우스가 나란히 자리해 있는 이곳에서는 통영 지역 문화를 향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요소로 가득하다. 건물은 본디 통영 출신의 건축가가 자신이 살기 위해 지었던 집이다. 3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며 빈집으로 남아 있던 곳을 강용상 건축가가 개조해 새로 지었다. 덕분에 나무 천장과 벽, 낮은 다락, 독특한 창틀과 창유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입구에 걸린 액자에는 강용상 건축가 외에도 공간과 설계, 컬러 자문, 캐리커처, 나무, 조명 등 함께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나열되어 있다.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많은 사람이 이 공간을 만드는 데 조금씩 힘을 보탰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봄날의 집의 객실은 총 네 개. 창밖으로 전혁림 미술관이 보이는 화가의 방에는 전영근 화백의 작품 <통영항>의 원화가 걸려 있다. 아흔여섯의 나이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추상 화가인 아버지 전혁림 화백 곁을 지켰던 그의 작품은 밝고 따뜻한, 자연의 색을 풀어놓는다. 작가의 방은 통영을 사랑한 문인들의 작품과 배경을 주제로 삼았다. 박경리 작가의 생가와 <김약국네 딸들>의 배경이 된 곳들을 지도로 정리한 박경리길 지도, 그리고 도서가 꽂혀 있다.
계단을 중심으로 2층 다락 양쪽을 차지한 장인의 다락방 1, 2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장인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방이다. 조선시대 21공방의 전통을 잇는 통영의 장인들은 지금도 도시의 자랑이다. 무형문화재 제64호인 김국천 두석장이 백동과 버드나무, 오동나무를 사용해 만든 머릿장, 김진량 나전장이 현대적으로 디자인한 나전 장식 거울을 비롯해 두 겹의 옷감 사이에 솜을 넣고 줄줄이 홈질한 통영누비 침구 등을 감상하고, 만지고, 사용할 수 있다니! 재봉틀을 이용해 누빈 누비이불을 손으로 만져 본다. 생각보다 가볍고 따뜻하다. 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푹 뒤집어쓰고 잠든 후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어떤 풍경을 기대하면 좋을까.
모두가 통영을 사랑해
수많은 예술가의 이름과 함께, 통영 어디를 가도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이름은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다. 강구안에 있는 실제 크기로 복원한 거 북선은 1990년 서울시에서 해군에 의뢰해 제작한 것으로 한강시민공원에 있던 것을 2005년 한산대첩 전승지인 통영시로 옮긴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머물렀던 통제영을 비롯해 이순신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도시에서 ‘거북선호텔’을 발견했을 때 어떤 곳일지 쫑긋 호기심이 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통영대교를 바로 앞에 두고 지어진 거북선호텔은 6층짜리 건물 두 채가 이어진 아담한 규모의 지역 호텔이다. 거북선호텔의 설종국 대표는 건축가답게 직접 호텔 설계에 관여했는데 침실과 거실, 복층 다락방으로 구성된 거북선 스위트, 킹사이즈의 침대와 한실 침구가 제공되는 디럭스 패밀리룸, 그리고 시내 전망과 발코니가 있는 타입으로 나누어진 스탠더드 룸 등 가족 단위 손님부터 나 홀로 여행자까지 머물 수 있는 다양한 객실 타입이 존재한다. 통영의 역사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것은 거북선호텔도 마찬가지다. 로비에는 통영옻칠미술관 소속작가인 하정선 작가의 대형 옻칠화 작품과 함께 오래된 지도가 하나 걸려 있는데, 미국 경매에 매물로 등장한 19세기 통영 지도를 설종국 대표가 직접 구입한 것이다. 통영 르네상스를 이끈 통영문화협회 회원들의 사진 액자와 통영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적은 책이 놓여 있고, 객실문에 부착된 객실번호는 김종량, 나정진 장인이 직접 제작한 것. 통영 누비 쿠션도 객실에 비치되어 있다. 통유리를 사용한 3층의 레스토랑 크림슨은 호텔에서 통영대교를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장소 중 하나다. 아침 7시 30분 조식 뷔페부터 시작해 점심과 저녁에는 돈가스, 파스타 등의 식사 메뉴와 커피를 오후 01시까지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
통영과 사랑에 빠져 가족들과 함께 통영에 새 터전을 튼 이도 있다. 통영시내에서 차로 20분 정도 거리인 산양읍에 자리를 잡은 카페 드 앤트워프의 허상국 대표는 3년 전 통영으로 내려왔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자연 속에서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통영은 바다와 산이 함께 있고, 관광지가 아닌 자생력이 있는 도시죠. 산양읍은 원래 양식업 등 어업을 하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에요. 게 다리 모양으로 포구가 들쑥날쑥하다고 해서 게섬, 게항으로 불리기도 해요.” 가족들이 사는 집과 카페, 그리고 비앤비까지 건물 세 채가 나란히 있는 카페 드 앤트워프의 입구에 서면 양식장이 있는 포구와 산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공간은 유럽에서 가져온 빈티지 제품으로 가득하다. 유럽 곳곳의 빈티지 마켓을 여행하며 모은 물건들을 싣고 떠났던 도시가 앤트워프였다고 한다. 메뉴가 많지는 않지만 서울에서도 오랜 시간 카페를 운영했던 만큼, 훌륭한 커피를 맛볼 수 있다. 인기 메뉴인 ‘폭신폭신 장모님 라테’라는 별명을 가진 스패니시 라테를 마시며 또 다른 통영의 풍경을 바라보길. 박경리 작가의 묘소와 기념관도 산양읍에 자리해 있다.
문학의 길을 걷다
반가운 소식! 지난 3월, 통영을 걸어서 여행하는 또 다른 방법이 하나 추가됐다. 바로 ‘문학지도’를 펼치는 일이다. 남해의 봄날과 통영길문화연대가 함께 제작한 지도가 담은 코스는 박경리길과 문학의 길 두 가지. 문학의 길은 시비들이 세워진 남망산 조각공원부터 김춘수 생가, 유치환 흉상, 김상옥 생가 등을 지나는 코스다. 지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도의 반대쪽 면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통영의 문인들의 캐리커처와 그들과 통영의 인연이 정리되어 있다. 1950년 미륵산 등 통영 곳곳을 돌아본 감상을 연작 기행문으로 남긴 시인 정지용, 통영의 처녀에게 한눈에 반해 몇 번이고 통영을 찾은 로맨티스트 백석의 흔적까지, 이 작은 도시에 이토록 많은 예술가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강구안에서 멀지 않은 충렬사 주변을 따라 걷는 박경리길은 훌륭한 산책 코스이기도 하다. 작가가 유년을 보낸 <김약국의 딸들>의 주요 배경인 서문고개와 명정골, 간창골 일대의 좁은 골목길에는 작가가 생전 남긴 구절을 벽과 바닥에서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용하고 차분한 골목길과 달리, 사실 작가와 통영의 기억은 유년의 아름다운 추억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다. 재혼에 실패하고, 사고로 아들까지 잃은 후 고향을 떠난 그는 50여 년의 시간이 지난 2004년에야 비로소 고향 땅을 다시 밟았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들은 <토지>를 비롯한 그의 작품에서 고향을 향한 그의 그리움과 기억을 엿보고 추측할 뿐이다. 박경리길을 걷다 만난 담벼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었다. “희망을 잃지 않은 것은 어쩌면 남몰래 시를 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남긴 말이다. 이처럼 위로가 되는 이야기와 그림, 풍경을 느닷없이 만나게 되는 것. 통영에서라면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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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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