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호라는 편견
국내 베이스 컬러 시장에서 판매량이 가장 많은 건 21호다. 밝고 화사한 피부를 위한 베이스 컬러의 대명사가 된 이 21호를 둘러싼 흥미진진한 이야기.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내게 딱 맞는 21호를 찾아 방황하고 있는 당신을 위한 조언.
쿨본, 웜포슬린, 바닐라, 574, NC20, 21. 화장 좀 해본 여성들에겐 익숙한 이 암호 같은 표기는 한국 여성이 선호하는 파운데이션 컬러로 표현은 저마다 다르지만 모두 21호에 속한다. 21호로 말할 것 같으면 대다수의 여성이 한번쯤 구매해본 파운데이션 컬러로 무한 애정을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판매량의 절대 우위를 점하고 있으니까. 21호로 분류되는 색은 살구색과 분홍색의 중간 정도 되는 밝은 색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21호에 대한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21호라는 호수는 표기법만 일반화되어 있을 뿐 브랜드마다 밝기와 톤이 천차만별이다. 첫 문장에 나열한 표기들도 평균적으로 21호에 해당하는 색상일 뿐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다른 색이다. 한국 여성들이 선망하는 이상향의 피부색과 동일시되곤 하는 21호. 어쩌다가 21호라는 컬러가 피부색의 표준처럼 된 걸까? 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뷰티 브랜드와 메이크업 아티스트, 소비자들의 입장을 각각 들어보기로 했다.
Brand Says
21호라는 신화
언제부터인가 피부색의 표준이 된 21호는 대형 화장품 회사에서 만든 색 체계 중 하나로 옷으로 따지면 55사이즈의 개념과 비슷하다. 명확한 기준에 근거한 규격이 아닌 일반화된 표기법일 뿐이다. 베이스 컬러는 일반적으로 10호, 20호, 30호로 나뉜다. 숫자 앞 자리는 색상을, 뒷자리는 밝기를 의미한다. 뒷자리에 1부터 3까지 붙여 톤을 구분하는데, 진한 메이크업이 유행한 90년대에는 33호에 해당하는 진한 브라운 컬러도 있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이제 이런 컬러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해외 화장품 제조사의 경우 색상마다 쿨본, 샌드, 웜바닐라 등 고유한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국내 브랜드에서도 피치, 애프리콧 로즈 등 컬러를 나타내는 단어로 표시하는 업체도 있다. 그렇지만 평균적으로 화장품 업계와 소비자간에 통용되는 건 13호, 21호, 23호 정도로 간소화되었다. 한국 여성의 피부색이 서양의 뷰티 시장처럼 다양하지 않을뿐더러 시장에서 잘 팔리는 제품은 정해져 있다 보니 17호나 22호, 25호나 30호에 해당하는 어중간한 호수는 사라진 지 오래다.
보통 13호는 명도가 높은 아이보리색을 지칭하고, 21호는 23호보다 밝은 베이지 컬러를, 23호는 어두운 베이지 컬러로 구분한다. 그럼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점 하나. 과연 실제로 21호에 해당하는 컬러가 가장 판매율이 높을까? 브이디엘의 브랜드 매니저 양은혜는 “소비자들의 피부톤을 측정한 결과, 가장 많은 피부 컬러는 일반 파운데이션 호수 32호에 해당하는 컬러가 나왔어요. 전체 고객의 약 43%이고, 브이디엘을 방문하는 고객 열 명 중 네 명 이상은 23호 피부톤이라는 이야기예요. 하지만 실제 브이디엘의 판매율을 보면 23호의 경우 전체의 약 15%를 차지할 뿐이죠.” 이 같은 상황은 헤라 역시 비슷했다.“ 헤라의 UV 미스트 쿠션을 구매하는 고객의 50% 이상이 21호를 사용해요. 작년 판매 실적만 봐도 가장 많이 판매된 제품이 미스트 쿠션 C21호였고, 국내 화장품을 통틀어 생산 실적 5위 안에 든 제품이 바로 21호 제품입니다.” 실로 놀라운 결과였다. 예상보다 21호를 향한 소비자들의 지지는 대단했다. 에스쁘아의 브랜드 매니저 김소정 역시 “21호는 한국에서만큼은 거의 신화적 존재예요. 그렇지만 뜻밖의 결과라 볼 수도 없는 것이 뷰티 업계에서 출시되는 21호 컬러는 핑크냐 옐로 베이스냐의 차이만 있을 뿐 여성들이 딱 원하는 만큼의 화사함을 갖추고 있어요. 한국 여성들은 본인의 피부를 중간 혹은 그보다 밝은 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피부색보다 명도가 높은 제품을 선호하는 거죠.” 그렇다면 21호의 인기는 연령대를 불문할까? “물론이죠. 베이스에 속하는 제품은 무조건 명도를 높여야 해요. 실제 제품 개발 의뢰 조건 중 가장 중요한 기준이 ‘밝고 화사하게’입니다.” 아모레퍼시픽에 근무하는 한 연구원의 말이다.
이렇듯 21호는 화사한 피부를 위한 절대적 선택 기준이 된 지 오래다. 그럼에도 유행은 변한다. 자연스럽고 건강한 피부톤이 대세가 되면서 무조건 21호를 맹신하기보다 자신의 피부색을 찾고자 하는 소비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브랜드 역시 이를 재빨리 감지해 21호와 23호의 중간 색인 21.5호를 만들거나 다양한 피부 컬러에 대응할 수 있도록 채도와 톤 계열까지 측정해 컬러 스펙트럼을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브이디엘은 세계적인 색채 연구소인 팬톤과 함께 ‘컬러인텔 서비스’를 개발해 얼굴의 각 부위에 따라 밝기를 측정하고 피부색에 가장 적합한 파운데이션 호수를 추천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에스쁘아 역시 컬러를 10여 가지로 세분화해 자연스러운 컬러를 찾을 수 있도록 제품 개발에 힘쓰고 있다.
21호는 화사한 피부를 선망하는 한국 여성들에게 피부색의 표준으로 통용된다. 그런 의미에서 21호로 대표되는 밝은 컬러의 베이스가 신화적 위치에 오른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Consumer Says
화사한 피부로의 열망
지난 7월 <얼루어>가 독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조사 대상자의 75%가 자신의 피부에 대해 ‘노란 기가 많고, 피부톤이 칙칙하다’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 여성들이 21호로 대표되는 밝은 컬러의 베이스를 선호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음은 취재를 위해 한 화장품 매장에서 만난 어느 여성 고객의 말이다. “잡티 없이 뽀얀 피부에 대한 선망이 있어요. 피부가 까무잡잡한 편은 아니지만 지금보다 더 화사한 피부색을 갖고 싶어요. 그러다 보니 파운데이션을 선택할 때 당연히 피부톤보다 밝은 색을 고르게 되요. 10호, 13호는 너무 밝고 21호가 적당하게 느껴져요.” 그녀뿐만이 아니라 한국에는 21호로 대표되는 밝은 컬러에 대한 열망이 분명 존재한다. 서울의 한 백화점 뷰티 매장의 판매 직원은 얼굴이 하얗게 동동 뜨는 한이 있어도 밝은 색을 고집하는 소비자들의 취향은 속수무책이라고 지적했다. “색깔 말고도 피부 표현이나 커버력, 지속력 등 개인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은 분명 갖고 있지만 색깔에서만큼은 양보가 없어요. 12호에 해당하는 명도가 높은 컬러가 실제로 판매율이 매우 높아요.” 그렇다면 대체 한국 여성들은 왜 이렇게 21호에 집착하는 걸까? 맥 프로 이벤트 팀의 김혜림 팀장은 어려 보이는 얼굴에 대한 선망과 연관이 깊다고 설명했다. “동안의 기본은 환하게 빛나는 피부잖아요. 이를 위해서 베이스 제품을 고를 때에는 피부를 화사하게 보정하는 제품을 선호하게 되죠. 일단 피부색을 밝히는 게 우선순위가 된 거예요. 그런 면에서 지나치게 밝거나 어둡지 않은 21호 컬러는 무난하게 사용할 수 있는 호수인 거죠.” 그런가 하면 이제 갓 화장에 입문한 지인은 21호의 흐름에 동참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파운데이션 호수와 고유한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13호, 21호, 23호 식의 구분은 왜 10호, 11호, 12호로 외우기 쉽게 연달아 배치하지 않은 것인지, 그리고 NC, NW 표기법을 비롯해 포슬린, 쿨 바닐라 등은 어떤 기준으로 구분한 건지 헷갈려요. 화장을 좀 해본 사람들에겐 황당한 얘기겠지만 뷰티 입문자로서는 솔직히 복잡하게 느껴지거든요. 미묘하게 다른 베이스 컬러를 감별하기엔 어려움이 따르다 보니 대다수가 선호하는 21호를 사용하게 된 거예요. 구매를 위해 매장을 방문하면 가장 인기 많은 21호를 추천하던데요? 발라보면 얼핏 잘 맞는 듯하지만 제 경우에는 약간 색깔이 겉도는 것 같았어요.” 평소 해외 직구 사이트를 즐겨 이용하는 한 지인은 또 다른 고충을 토로했다. “한국 화장품 브랜드에서 만드는 베이스 컬러는 그야말로 21호를 기준으로 세분화된 컬러에 불과해요. 23호도 옛날의 23호가 아니라 10년 전 21호 수준이랄까요? 명도만 봤을 때는 21호만큼 밝거든요. 해외 브랜드의 경우에도 호수가 다양한데도 불구하고 한국에 들어올 때 현지 사정에 맞춰 판매가 잘될 것 같은 컬러만 선보이기 일쑤죠. 선택의 폭이 좁으니까 21호를 구매할 수밖에 없는 구조 아닐까요?”
Makeup Artist Says
나만의 피부색을 찾아서
“솔직히 말해서 21호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같은 한국 여성이라도 피부톤이 미세하게 다르고, 한 얼굴에도 쿨톤과 웜톤이 모두 존재하니까요. ” 메이크업 아티스트 권희선의 말이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이번 칼럼 취재를 위해 만난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은 한국 여성들의 21호에 대한 맹신에 놀라워했다. 이들은 밝은 컬러만 고집하는 현상을 신기하게 여겼다. 그렇다면 누구보다 많은 화장품을 경험해본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은 21호라 불리는 컬러를 어떻게 정의할까? 김활란 뮤제네프의 김활란 원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21호라 하면 베이지 계열에서 가장 밝은 컬러예요. 한국 여성들이 가장 쉽게 그리고 적은 양으로도 극대화된 화사함을 표현할 수 있는 컬러인 거죠. 21호는 실질적으로 웜톤의 노란 피부톤에 적합한 색이에요.” 국내 화장품 브랜드에 소속된 한 메이크업 아티스트 역시 21호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없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한국 여성들은 예쁜 연예인의 화사한 피부를 이상적이라 여기고 따라 하려는 경향이 강해요. 그런데 21호는 분홍과 살구색의 중간의 밝은 살색이어서 한국 여성들이 선호하는 게 아닐까요?” 화보 촬영차 만난 한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의견은 이렇다. “21호를 사용해야 피부가 예뻐 보인다는 믿음이 만연한 게 사실이에요. 화장품을 잘 모르는 여성일수록 생각이 편중될 수밖에 없죠. 21호를 향한 이런 기현상을 비난할 이유는 없어요. 다만 개인의 피부톤과 밝기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은 가지각색의 피부톤을 가지고 있어요. 같은 브랜드의 21호 제품이라도 화사하게 느껴질 수 있고 아무런 효과가 없을 수도 있거든요. 그나마 다행인 건 최근 여러 브랜드에서 21호, 23호 외에도 핑크, 옐로, 로즈, 아이보리 등 컬러톤을 세분화해서 제품을 출시한다는 거예요. 선택의 폭이 넓어진 만큼 21호만 사용해야 한다는 강박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21호가 가져다줄 것만 같은 화사한 피부에 대한 환상은 어떻게 깨트릴 수 있을까? 김활란 원장의 조언은 이렇다. “21호는 의외로 어울리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21호와 23호는 명도차에 의한 색 구분입니다. 얼굴 부위별로 나타나는 피부톤과 채도까지 진단해보는 걸 추천해요. 그래야 최적화된 컬러를 찾을 수 있어요.” 그녀는 피부색을 쿨톤과 웜톤으로 딱 잘라 구분 짓지 말라고 덧붙였다. 한국 여성들은 노란 기가 많은 웜톤에 가까운 뉴트럴 색이거나 쿨에 가까운 뉴트럴톤이 대부분이다. 정샘물 인스피레이션의 권희선 원장이 추천하는 방법은 메이크업 베이스로 부각되는 피부톤을 먼저 정돈하라는 것. 가령 붉은 톤이 고민이라면 이를 중화하는 그린 컬러를, 칙칙한 노란 기가 많다면 핑크 컬러를 바르기를 권한다. 그럼에도 21호를 쓰고 싶다면? 김활란 원장의 명쾌한 답변을 들어보자. “아직 21호에서 멀어질 수 없다면 쓰세요. 다만 얼굴 중심에만 소량 바르면 됩니다. 얼굴 외곽으로 갈수록 점점 옅어지게 표현하는 게 포인트예요. 중앙과 바깥쪽의 명도차가 생기면서 콧대 부분만 오뚝해 보일 거예요. 자연스러운 음영을 표현하는 데 이만한 방법이 없죠.” 21호로 대표되는 밝은 컬러의 베이스가 신화적 위치에 오른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당분간 한국 여성들의 메이크업 취향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잡티 없이 화사하게 빛나는 밝은 피부는 언제 보아도 매력적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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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정유진
- 포토그래퍼
- Jung Won Young, Lee Soo Kang
- 도움말
- 권희선(정샘물 인스피레이션 청담점), 노용남(바비브라운 수석 메이크업 아티스트), 김활란(김활란 뮤제네프 대표), 김해림(맥 프로 이벤트팀 팀장), 김소정(에스쁘아 교육팀), 양은혜(브이디엘 교육팀), 안지현(헤라 홍보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