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호의 결
흔한 이야기마저도 조금 다르게 보여주는 것. 정경호는 그게 배우의 숙제라고 말했다. 여유롭게 미소를 짓지만 그 속에는 엄격함이 있다. 배우 정경호와 인간 정경호의 접점은 거기에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 까칠하고, 예민하게 굴어도 이해할 수 있는 직업 중 하나는 연기자다. 타인의 감정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잘 채울수록 사 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들만의 세상은 그래서 인정 받는다. 정경호는 연기를 하는 사람이야말로 보통 사람들의 눈에 맞춰 세상을 바라봐야 하지 않겠냐고, 우선은 좋은 사람이 돼야 좋은 연기가 나올 수 있지 않겠냐고 반문한다. 그래서일까. 촬영장에 도착한 그는 경계심 없이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다. 오랜만에 만난 스태프와 손을 잡은 채 포옹을 하는, 사람 욕심 많은 남자. 작품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건 팀워크라고 하는 배우. 바로 정경호가 그렇다. 첫 방송을 앞두고 있는 <미씽나인>에서 정경호는 비행기 추락사고로 인해 무인도에 갇히게 된 아홉 명의 생존자 중 한 사람인 서준오를 연기한다. 한때는 잘나갔던 스타지만 지금은 생계형 연예인에 불과한 존재. 생존의 위협을 받는 그 진지한 상황에서도 정경호는 서준오라는 인물에 코믹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한국 드라마에서 처음 시도되는 소재로 일찌감치 올해 기대작으로 꼽히고,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흥행이 점쳐지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정작 주연 배우인 정경호는 드라마의 성패 여부를 떠나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작품이라는 것에 큰 만족감을 드러낸다. 좋은 사람이 돼야 좋은 연기자가 될 수 있듯, 좋은 사람이 만든 작품이 좋은 드라마가 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미씽나인> 촬영으로 제주도에 있다가 얼마 전에 서울에 왔다고 들었어요.
서울에 온 지 5일 정도 됐어요. 연말 시상식에서 시상도 하고, 드라마 속 서울 배경 신도 찍을 겸 해서 왔죠. 계획했던 대로 1월 말에 촬영이 다 끝날 수 없을 것 같아요. 스케일이 큰 드라마라 턱도 없어요.(웃음)
비행기 불시착으로 아홉 명의 생존자가 무인도에서 생활한다는 설정이 미국 드라마 <로스트>와 비슷한데요.
등장인물 아홉 명이 오로지 생존에만 몰입하지는 않아요. 미스터리한 부분도 많지만 생각보다 많이 웃겨요.
어느 순간부터 당신의 연기에는 진지하면서도 코믹한 부분이 많아졌어요. 최근작 <한번 더 해피엔딩>이나 <순정에 반하다>도 그렇고요.
이번 작품의 최병길 감독님, 손황원 작가님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어서 촬영 시작 전부터 대화를 많이 했죠. 저는 진지한 장면을 코믹하게 가겠다고 말했어요. 드라마가 죽음을 다루지만 그걸 아주 친절하고, 치밀하게 다루지 못할 바에는 유쾌한 쪽으로 가도 좋을 것 같았거든요. 시청자들도 인물들이 치열하게 생존하는 모습도 보고 싶겠지만, 계속 진지하기만 하면 재미를 못 느낄 것 같았어요. 그 생각에 더욱 확신을 가지게 한 게 어제 집에서 본 영화 <캡틴 판타스틱(Captain Fantastic)>이었어요. 도시 생활을 떠나 숲 속으로 들어간 가족 이야기인데, 주제는 묵직하지만 전개는 경쾌하고 즐겁거든요. 우리 드라마의 관전 포인트도 치열한 생존기와 미스터리, 그리고 유쾌함이에요.
작품을 선택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지금까지 봐온 드라마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뻔한 걸 경계해요. 해마다 무수하게 나오는 드라마와 내가 택한 작품이 어떻게 다를지도 고민하고요. 그런 면에서 <미씽나인>은 잘 맞았죠. 한국에서 처음으로 다루는 소재이니까요.
재난 사고를 다룬 작품이라고 하면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와 그 환 경에서 생존하는 등장인물 등이 떠올라요.
그 점이 가장 걱정돼요. 무능력한 권력 때문에 개인이 영웅이 되는 뻔한 스토리, 신파가 싫어요. 바로 전에도 언급했지만 무인도에서 인물들의 생존을 자세하게 그려낼 수 없다면 사람 사는 냄새를 전할 수 있는 유쾌함이 있으면 좋겠어요. 물론 저희 드라마에서도 진실을 은폐하려는 정부가 나오고, 의문사도 있지만 아주 약간이라도 달랐으면 좋겠어요.
뻔하면서도 자꾸 보게 되는 게 한국 드라마의 매력이기도 하죠.
인물들이 사랑에 어떻게 빠지고, 갈등이 풀어지는 과정을 어떻게 보여주느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그건 배우가 풀어야 할 숙제 같아요. 그래서 저도 늘 조금이라도 다르게 연기하려고 해요.
코믹 연기는 본능적인 센스가 있어야지만 자연스러운 법이죠. 그 점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연기 아닌가요?
현장에서는 분명 재미있었는데 정작 시청자들은 아무 반응을 하지 않은 적이 몇 번 있어요. 정말 어려운 연기인 건 맞아요. 그래서 미리 상대 배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당신에게 가장 치명적이고, 아픈 평은 ‘뻔하다’인 것 같아요.
맞아요. 제가 사람들에게 판타지를 주는 배우가 아니라는 게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저를 포함해서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은 배우들은 본인이 가지고 있는 걸 표현하는 것에 충실해야 해요. ‘내가 어떤 연기를 했을 때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나다운 게 뭘까?’ 이런 것을 먼저 알고 연기를 하는 게 맞죠. 제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연기하는 게 중요해요.
이번 드라마에서도 한때 잘나가던 스타 역할이에요. 연기할 때 기분이 묘하지 않나요?
지금까지 네 번째예요.(웃음) 처음에는 진짜 스타<(미안하다 사랑한다>), 그 다음은 스타인데 욕쟁이( <롤러코스터>)였고, 최근엔 스타인데 병이 있었죠(<순정에 반하다>). 이번에는 생계형 스타예요. 희한하게 각자 나름의 고충이 있는 인물들이라 표현하기엔 쉬웠어요. 만약 그들의 직업적인 부분을 보여주는 거였다면 제 직업이 연기에 도움도 되고, 대본에 사실과 다른 얘기가 있으면 쉽게 찾을 수 있었을 텐데….(웃음)
서준오의 캐릭터 설명에는 은행 업무도 혼자 못하는 연예인으로 나와요.
한창 활동하는 아이돌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실제 그런 연예인은 많지 않아요.
지난해 난생처음 대출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채무자로서의 삶은 어떤가요?
대출 받아서 집을 사겠다는 단호한 결의를 했죠. 살면서 뭔가에 욕심을 내본 적이 없었는데, 집을 사고 싶었거든요. 대출 받아보니까 사람이 겸손해지고, 사람다워져요. 대출 받길 잘한 것 같아요. 물론 빚 갚으려면 아직 한참 남았지만.(웃음) 집이 판교에 있는데 이미 비쌀 때 사서 더 이상 집값 오를 일이 없을 거래요.
작품 들어가기 전에 스태프, 출연진들과 친목을 자주 도모하는 배우로 꼽혀요.
작품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게 팀워크라고 생각해요. 다른 배우와 같이 연습하면서 어떻게 연기할지 미리 약속해야지만 현장에서 애드리브도 만들어지고, 관객과 시청자들도 더 편하게 연기를 볼 수 있거든요.
극중에 친한 친구로 나오는 배우와는 미리 관계를 형성하는 편이라고 하던데요.
촬영 전에 술자리를 많이 하면서 친해지는 편이라 촬영 들어갈 때쯤엔 서먹하지 않아요. 그동안 워낙 좋은 선배들과 함께 연기를 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죠.
올해 30대 중반의 정점에 있어요. 나이를 의식하는 편인가요?
별로요. 이번 드라마에서 20대 초반 동생들이 같은 밴드의 멤버로 나오는데, 그들의 대화에 활발하게 끼지는 못해요. 그 친구들은 게임, 자동차에 대해 말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모를 때가 많아요.
하루에 한 잔씩 꼭 술을 마신다고 들었어요.
맥주요? 에이, 그건 술도 아니죠. 보리 음료, 소화제예요. 주량도 별로 세지 않아요. 소주 2병 정도?
긍정적이고 밝은 기운이 있는 것 같아요. 까칠하고, 예민한 게 용납되는 유일한 직업이 배우잖아요.
좋은 사람이 돼야 좋은 연기가 나오고, 시청자와 관객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봐야죠. 배우라고 해서, 특별한 삶을 살고 있어서 인생이 편할 것 같다는 말은 옛날 얘기예요. 배우라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계산하는 게 필요하죠. 배우니까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걸 남들에게 티 내는 건 왠지 지는 것 같아요.
밤 12시 전에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고 들었어요.
요즘엔 12시 넘어서도 자요.(웃음) 아침에 새벽공기 마시면서 강아지들과 산책하고 다녀와서 씻고 청소하는 그 시간이 좋아요. 연애 초반에 최수영 씨도 제 이런 생활을 이해 못했어요. 지금은 모든 걸 이해하죠.
5년째 연애 중이죠. 그 비결은 뭔가요?
말로는 “우리는 이제 가족이야”라고 해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으면 그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었을 거예요.
오랜 연애를 할 수 있는 건 상대에 대한 의리도 작용했을 것 같아요.
믿음이죠. 수영 씨가 많이 참아요. 5년 동안 싸운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속에 담아둔 얘기를 하니까 섭섭할 일이 없더라고요.
<미씽나인>에서처럼 무인도에 가게 된다면 무엇을 가져가고 싶어요? 딱 세 가지만 꼽아본다면요.
세상에서 가장 두꺼운 파카와 가장 독한 술, 그리고 가장 두꺼운 책 한 권이면 될 것 같아요. 맨정신이면 잠이 오지 않을 테니 술 마시고, 빨리 취해서 자버려야지.(웃음)
새해가 된 지 얼마 안 됐어요. 목표가 있나요?
<미씽나인>을 찍으면서 많이 즐겁고 행복해요. 그래서 올해에도 이렇게 많이 웃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이번 드라마는 선물 같아요. 배우 아홉 명이 다 함께 촬영하면 현장에 150명의 사람들이 있는데, 밤을 새워도 짜증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예요. 작품이 잘되든, 못 되든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일하는 것 자체가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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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전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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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