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형의 시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파악하는 사람만큼 강한 사람은 없다. 그래서 김서형은 강하다. 선과 악,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사람은 인간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김서형을 기억하고, 또 기억한다.
차가운 도시 여자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김서형의 얼굴이 아닐까. 1994년 데뷔 이후로 김서형은 커리어 우먼의 대표적인 이미지를 가진 배우였다. 거부하고 싶고,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그녀는 고집을 피우기보다는 포기하는 편을 택했다. 이왕이면 많은 여자가 선망하는 멋진 여성상이 되기로 한 것. 그녀가 영화< 악녀>로 칸 영화제에 참석해 반삭의 머리와 복근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은 ‘파격’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찰나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노린 건 아니다. 이유라면 그녀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였다가 정답일 것이다. 칸에서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 것처럼 그녀는 다시금 <얼루어> 카메라 앞에 섰다.
며칠 전 <SNL코리아9>에 호스트로 출연했죠. 어땠나요?
비록 영화 홍보를 위한 것이긴 했지만 제 이름을 걸고 나가는 프로그램이라 열심히 했어요. 다행히 최근에 했던 <SNL> 중에서도 시청률이 가장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B급 정서가 녹아 있는 프로그램인데, 굉장히 자연스러웠어요.
아마 제 안에 그런 부분이 내재되어 있었겠죠? 어떻게 늘 지적인 연기만 할 수 있겠어요.(웃음) 그건 어디까지나 캐릭터일 뿐이죠. 스스로 망가지는 걸 무척 좋아해요. 그런데 막상 현장 가보니 제가 도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더라고요. 그 안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하는 걸 보니 쉬운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방송 도중에 웃음이 터진 장면을 보며 덩달아 웃음이 났어요.
<악녀>의 한 장면을 패러디한 코너였어요. 리허설 때도 그 장면에서 웃음을 참지 못했는데 그나마 방송에서는 덜 웃은 거예요<.S NL> 방송의 묘미는 그런 것 같아요. 좀 실수를 해도 괜찮고, 평상시 제 모습을 보여주는거죠. 크루보다 연기를 잘하려고 출연한 게 아니니까요.
칸 영화제 때 입은 옷차림 그대로 <SNL> 콩트를 찍기도 했죠? 이렇게 화제가 될 줄 알았나요?
의도하지 않았어요. 영화제 가기 전에 스타일리스트와 상의하며 준비도 많이 했어요. 무엇보다 칸에서만큼은 파격적인 스타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동안 해보지 않은 스타일이 뭐가 있을지 찾고 있었는데 마침 스타일리스트가 가져온 파란색 옷이 너무 예뻐 보였어요. 입어보니까 저에게도 잘 어울리더라고요.
옷차림 못지않은 반삭의 헤어 스타일도 화제였어요.
그전까지는 단발로, 기르고 있었어요. 보통 차기작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배우들은 머리를 기르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작품도 막 끝난 상태라 바로 차기작이 정해질 상황도 아니었어요. 머리를 기를 이유가 없었죠. 언젠가 한 번 삭발을 꼭 해보고 싶었는데, 이번이 기회였어요. 그런데 소속사나 미용실에서 반대했어요. 그래도 명색이 여배우인데, 삭발은 너무 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래서 합의를 본 게 반삭이었죠.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는 편인가요?
전 제가 중요해요. 앞으로 어떤 기회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칸의 레드카펫을 밟는 것이 배우로서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옷차림이 한국에 보도되면서, 칸에 있는 동안 한국에서 연락이 정말 많이 왔어요. 그때는 ‘이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다들 이래?’라고 생각했죠. 제 스타일이 그렇게 파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칸에 필라테스 기구도 챙겨갔다니, 열정이 대단해요.
‘꼭 복근을 보여줘야겠다’라고 생각한 게 아니라 이왕 이렇게 옷을 준비했으니 일자보다는 복근이 있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준비한 거죠. 비행기에 가지고 탔어요. 별로 무겁지 않은데, 회사 대표님이나 스태프들이 돌아가면서 들어주더라고요. 고마웠죠 뭐.(웃음)
칸에 있는 누드 비치도 갔다고요?
해변가에서 옷을 벗고 싶으면 그곳이 누드 비치가 되는 거지, 따로 정해져 있지는 않더라고요. 브래지어만 입고 잠시 앉아 있어봤어요.
평상시에도 일탈을 자주 하거나 자유분방한 편이에요?
그렇긴 한데, 보수적인 면도 있어요. 작품을 하지 않을 때는 운동하고 산 책하며 주로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요. 그리고 내 공간, 내 살림에 대한 애 착도 강하고, 내 사람에게 잘하고 싶어 하는 편이에요. 그걸 지키려는 의 지도 강하고요.
칸에서 당신의 모습을 보고 영화 < 악녀>를 보니 조금 아쉽더군요. 주인공인 김옥빈에 비해 액션 신이 없어서 서운하지 않았나요?
아쉬움은 있죠. 하지만 총이라도 들게 해줬으니 얼마나 다행이에요?(웃 음) 결과물이 늘 완벽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악녀>는 지금까지 존재하 지 않았던 새로운 스타일의 액션물이기도 하고, 여자 주인공이 액션을 이 끌어가는 영화에 관심을 갖게 하는 한국 영화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어 요. 평소에 누아르 장르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상업 영화에 출연 할 기회가 적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제게 이 역할을 제안했을 때 의아 했죠. 물론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영화감독들이 선호하는 배우는 저 말고도 많이 있으니까요. 어쨌든 영화에 제 액션 분량이 별로 없어서 아쉽긴 했지만 제 연기의 폭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된 건 분명해요.
영화 속에서 부하직원인 현수(성준)가 숙희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당신이 맡은 권숙은 “너만은 나처럼 되지 않길 바랐는데”라고 하는 대사 가 있어요. 주인공 숙희(김옥빈) 못지않게 권숙에게도 무궁무진한 이야 기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극중 모든 캐릭터가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겠죠? 모두가 외로운 사 람들이고, 누구든 피해자와 가해자가 될 수 있어요. 감독님에게 직접 물 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숙희의 미래가 권숙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을 했어요. 국가 정보원의 간부지만 어떤 연유로 그 자리까지 가게 됐는 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숙희나 현수에게 임무를 주고, 지시하는 걸 보면 영화 속 진짜 악녀는, 어쩌면 권숙이 아닐까요?
드라마 <아내의 유혹>의 신애리 역이 워낙 강렬했던 탓에 악역 전문 배우라는 수식어가 붙었죠. 고정된 이미지에서 탈피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나요?
그 이후 드라마 <자이언트>에서는 유경옥, <샐러리맨 초한지>에서는 모가 비 등 많은 작품을 했어요. 현재의 제가 있기까지 분명 중요한 작품들이 기는 한데 저는 앞으로가 궁금한 사람이길 바랐어요. 배우로서 잊혀질 바 에야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센 캐릭터’라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요 . 사실 <아내의 유혹>의 신애리는 악하다기보다는 불쌍한 마음이 컸어요.
배우 김서형의 매력은 선과 악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은, 긴장감 넘 치는 캐릭터를 할 때 극대화되는 것 같아요. <굿와이프>의 서명희가 대표 적이었죠.
그건 아마도 제가 연기를 할 때, 맡은 역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분석하고 파악하려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인물에 대 한 기본적인 연민이 있어야 연기를 잘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평상시에 그 런 마음을 갖는 것도 중요하고요.
SNS상에서 당신을 두고 “멋있다” “잘생겼다”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학창시절에 남녀공학을 다녔는데도 여자친구들이 저를 많이 좋아했어요. 머리가 길었을 때는 가수 신성우, 배우 김석훈 씨 닮았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죠. 데뷔할 때만 해도 전 제가 무척 청순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배우가 되니 커리어 우먼, 부잣집 딸 역할만 들어왔어요. 그때 많은 선배가 제 얼굴이 영화에 더 맞는 것 같다고, 그쪽으로 가라고 하셨어요. 그러다 20대 후반에 영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을 만난 거죠. 그때 비로소 연기가 뭔지 알게 됐어요. 20대 때 데뷔해서 지금 제 나이가 마흔다섯인데, 누가 물어보면 연기한지 십 몇 년밖에 안 됐다고 말해요.
배우가 되는 건 당신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았다고 말했죠. 어떤점 때문이었나요?
어릴 때부터 막연히 배우를 꿈꿨어요. 연기에 도움 될 것 같아서 고등학생 때 방송반 들어가서 발음 연습도 하고, 노래도 열심히 배웠죠. 지금도 앞으로 오랫동안 이 일을 하려고 꾸준히 뭔가를 쌓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단 한 번에 뭔가를 이루고 싶었어요<. 아내의 유혹>을 찍을 때는 ‘나도 스타가 되는구나’ 싶었는데,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빨리 마음을 접고, 배우의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드라마 <자이언트> 60부작을 찍으면서 많이 성장했어요.
당신은 배우로서나 여자로서나 20대 때보다 30대가, 30대 때보다 지금이 더 좋아 보여요.
누군가 20대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할 거예요. 그때 너무 고생을 많이 했어요. 30대 때는 ‘지금 잘해야 40대 때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죠. 40대가 된 지금도 그때와 똑같은 고민을 하지만 여유가 조금 생긴 것 같아요. 예전에는 연기 고민 때문에 잠 못 이룰 때도 많았는데 요즘엔 그렇지 않아요. 아주 잘 자죠. 주변에서 결혼 얘기를 많이 하는데 저는 글쎄요.(웃음)
결혼에 크게 관심이 없어 보여요. 독신주의자인가요?
지금이 너무 좋아요. 결혼을 하지 않아서 생활 연기를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돼서 주변 사람들한테 물어봤어요. “결혼처럼 남들 다 하는 거 해봐서 잘 살면 다행이겠지만, 굳이 억지로 할 필요가 없다”라는 답이 돌아오더군요. 전 독신주의자는 아니에요. 오십이든 육십이든 ‘이 인연을 만나려고 여태 혼자였나 보다’ 싶을 만큼 괜찮은 사람이 나타나면 결혼하겠죠. 그런데 지금은 굳이 남자를 만나려고 노력하지 않아요. 외로움도 겪어야 하는 부분인 것 같고요. 지금은 그저 키우고 있는 강아지 두 마리와 잘 사는 게 행복인 것 같아요.
쿨한 여자의 상징이 됐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멋진 여성상은 무엇인가요?
내가 중심을 잡아야 하는 것 같아요. 타인에게 민폐 끼치지 않고 주어진 일을 잘해내는 사람이 멋있지 않나요? 설사 타인에게 실수를 하게 되더라도 남 탓하지 않고요. 그건 책을 읽고, 교양을 쌓는 것과는 별개인 것 같아요.
함께 연기하고 싶은 배우가 있어요?
언젠가 배우 대 배우로 선의의 연기 경쟁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바로 김혜자 선생님.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를 보며 꼭 함께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굉장히 자극을 많이 받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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