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의 밤 풍경 속에서 만난 힙플레이스 6
을지로 거리에 어둠이 찾아오면, 낮과는 다른 모습의 소박하거나 비밀스러운 공간이 하나 둘 얼굴을 내민다. 을지로의 밤 풍경 속에서 만난 6곳의 가게.
을지로의 낮은 분주하다. 인쇄소, 간판 제조업체 등이 모여 있는 좁은 골목은 오토바이가 거칠게 오가고, 기계 돌아가는 소리로 시끌벅적하다. 점심 장사를 하는 가게는 근처 직장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긴장을 늦출 수 없이 바삐 흘러가는 낮이 을지로의 1부라면, 셔터문이 내려가고 주위가 고요해지는 밤은 2부의 시작이다. 필요한 조명만이 듬성듬성 켜진 을지로의 밤은 보물처럼 숨어 있는 가게들과 묵직한 존재감의 노포들이 주인공이다. 사람들은 그곳에 소리 없이 모여든다.
‘노맥’으로 시작하는 밤
해가 지기 시작하면 을지로3가역 3번 출구 뒤편의 노가리 골목이 접이식 테이블과 의자로 빼곡해진다. ‘노맥(노가리+맥주)’은 이곳에서 시작됐다. ‘오비베어’는 1980년, 노가리 안주를 처음 선보인 원조 ‘노맥집’이다. 자리를 잡으니 생맥주가 인원수만큼 테이블에 놓인다. 크래프트 비어처럼 특징적인 맛은 없지만 생맥주만의 톡 쏘는 청량감이 있다. 첫 안주는 노가리다. 연탄불에 갓 구워낸 노가리는 마요네즈 없이도 씹을수록 고소함이 밀려온다. 베어 물자마자 육즙이 입안에 고이는 불맛 나는 소시지는 주문해 먹길 잘했다 싶다. 앞, 뒤, 양옆으로 꽉 채워진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는 덤이다. 아쉬운 건 밤 11시까지만 영업을 한다는 것. 대신 낮 12시부터 ‘낮맥’을 즐길 수 있다. 마늘치킨으로 유명한 만선호프와 노가리를 건조, 반건조 버전으로 파는 초원호프도 바로 근처에 있다. 어디든 을지로의 야장을 즐기기 좋다.
활기 가득한 노가리 골목에서 벗어나 지도 앱을 켜고 을지로 18길 25-2를 찍었다. 안내대로 걷다 보면 굳게 닫힌 철문 앞에 멈춰 서게 된다. 이때 그냥 지나치지 말고 아래쪽의 쪽문을 확인하자. 노란 글씨로 적힌 ‘머리조심 4F’와 빨간색 삼각형의 경고 심벌을 발견할 수 있을 거다. 맥주와 와인을 파는 ‘머리조심’이라는 가게 입구다. 닫힌 쪽문을 밀어젖히고 허리를 반쯤 숙여 들어가야 하는데, 가게 이름 그대로 머리를 부딪히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계단을 올라 4층 502호 문을 열면 작은 아지트 같은 원룸이 등장한다. 머리조심 표지판, 레고 머리 컵, 아그리파 두상 등 ‘머리’와 연관되는 재밌는 소품이 곳곳에 눈에 띈다. 머리조심은 재주 있는 5명의 친구가 뜻을 모아 꾸렸다. 모두가 직장인인 그들은 틈틈이 짬을 내 로고와 메뉴판 디자인, 메뉴 개발, 공간 스타일링까지 셀프로 했다. 안주가 맛있어서 ‘맛집’이라는 손님들의 칭찬도 듣는다며 뿌듯해한다. 쪽문의 존재가 가게의 정체성을 만들어낸 셈인데, 한번 찾아가보는 것만으로도 유쾌해지는 곳이다. 저녁 7시, 건물의 철문셔터가 내려가면 머리조심은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
단출한 안주 대신 엄마가 차려주는 푸짐한 집밥과 술상이 생각난다면 골목식당으로 가 자. 건강한 한식으로 든든한 한 끼를 즐기기 도, 술 한잔 기울이기도 좋다. 이곳의 모든 음식은 주인의 손길이 닿는다. 보쌈, 청국장, 김치찌개 등 메인 메뉴는 물론 김치, 쌈장, 새 우젓, 깻잎무침 등 곁들이는 반찬까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모두 직접 만든다. 요리는 마음을 담아 야 한다고 주장하는 주인아주머니의 고집과 뚝심 때문이다. 보쌈 을 주문하면 국내산 돼지고기를 사용해 겉이 뽀얀 수육이 등장한 다. 소금과 된장만 넣고 삶은 오리지널 수육이다. 식으면 딱딱해 지는 수입육과는 달리 실컷 수다를 떨다 뒤늦게 먹어도 쫀득한 식 감이 살아 있다. 이 가게를 더 잘 즐기는 방법은 예약 방문을 하는 거다. 주인아주머니가 넉넉한 마음으로 메뉴에 없는 음식을 만들 어주기도 한다. 영업시간은 아침 8시부터 ‘손님 계실 때까지’다. 혹시 문이 닫혀 있어도 슬쩍 인기척을 내보자. 가게 위층에 사는 사장님이 반겨줄지 모른다.
을지로 거리를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은 골뱅이 골목으로 향하는 거 다. 을지로3가역 11번 출구 방향에서 중부 경찰서 방면으로 걸어 가면 골뱅이집이 늘어선 길과 마주하게 된다. 그중 초록색 간판의 풍남골뱅이는 42년 전통의 골뱅이 전문점이다. 1975년부터 2대 에 걸쳐 운영해오고 있다. 고민할 것 없이 골뱅이를 주문했다. 통 조림 골뱅이하고는 비교할 수 없이 통통한 대왕 골뱅이를 파채와 함께 고춧가루, 다진 마늘 양념에 버무려 낸다. 쫄깃한 식감의 아 귀포도 함께다. 화려한 맛은 아니지만, 고춧가루의 톡 쏘는 매콤 함만으로도 중독성이 있다. 생면을 쓴다는 소면은 취향껏 추가해 먹으면 된다. 골뱅이를 주문하면 땅콩과 계란말이, 어묵탕이 기본 으로 제공되는데, 결결이 윤기가 흐르고 속이 적당히 찬 계란말이 는 계속 리필하고 싶어진다. 매운맛을 덜어주기도 하지만 그 자체 로 맛있어서 계속 젓가락이 간다.
음악과 술에 취하는 밤
인쇄소가 모여 있는 회색빛 골목에서 을지맥옥은 홀로 핑크색으로 빛난다.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남자가 시뻘건 얼굴을 하고 맥주잔에 빠져 있는 간판 그림만 봐도 이 집이 맥주집인 걸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간판 없이 운영하는 바가 점점 많아지는 을지로에서 커다란 네온사인을 내세운 건 주인의 의도다. 다양한 컬러의 인쇄물을 찍어내는 동네인 만큼 가게 인테리어 역시 최대한 색감을 살리고 싶었다고 한다. 음파에 따라 빛이 반응하는 특수조명과 흰 연기를 뿜어내는 스모그 머신 등은 컬러풀한 을지맥옥을 더 돋보이게 한다. 메뉴도 세심하게 신경 썼다. 을지로라는 동네 특성을 반영해 만든 골뱅이무침은 매콤한 마라 소스로 버무려 을지맥옥만의 개성을 더했다. 함께 먹기 좋은 맥주로는 시그니처인 ‘시어서커 IPA’를 추천한다. 여름옷 소재인 ‘시어서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붙인 이름이다. 과일향이 진하고 쓴맛이 강한 기존 IPA의 라이트한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특별히 제공되는 피처잔으로 즐겨보길. 1층은 양조장을 만들려고 계획 중이다. 갓 뽑아낸 시어서커 IPA를 곧 맛볼 수 있길 기대한다.
술과 음악에 조금 더 취하고 싶어 펄프에 들렀다. 간판이 없어 지도앱은 필수다. ‘은하수 노래빠’ 간판을 찾았다면 제대로 온 게 맞다. 펄프는 실력 있고 새로운 DJ들을 찾아내고 소개하는 역할을 하는 라운지 바다. DJ들의 ‘디깅’ 스케줄은 인스타그램(@pulp_seoul)으로 확인하면 된다. 가게에 흐르는 음악은 옛날 가요, 하우스, 테크노 등 장르 불문이다. 원하는 LP판을 가져오면 틀어주기도 한다. 세운상가에서 사 온 TV, 동네 할머니가 준 서랍장, 인쇄소 지류함 등 가게 안을 무심히 채운 소품들은 범상치 않은 조명과 음악에 맞물려 독특한 인상을 준다. 주말 밤 늦게는 파티가 열린다. 언제든 클럽으로 변신할 수 있게 접이식 테이블과 의자를 많이 둔 이유다. 곧 카페도 겸한다고 하니, 대낮에 만나는 펄프는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진다.
을지로의 밤은 의외로 빨리 진다. 노포든 아니든 밤늦도록 술잔을 부딪힐 수는 있지만 밤새도록은 아니다. 밤 11시가 되면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거리에 서성이기 시작한다. 다음 날 다시 분주한 낮을 보내기 위해 밤을 떠나보내는 느낌이겠지. 굳이 거나하게 취하지 않아도 ‘수고했다’는 의미의 밥 한 끼와 술 한잔을 기울일 수 있는 곳이 을지로 밤거리인 것 같다. 참 고요한 을지로의 밤이다.
- 에디터
- 최안나
- 포토그래퍼
- Cha Hye Ky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