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수 있을까? 이별하고 싶은 습관
한 해의 끝, 문득 떠나보내고 싶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중에는 도무지 고쳐지지 않는 습관들도 있다. “어떤 습관과 헤어지고 싶나요?” 5명의 칼럼니스트에게 물었더니, 이런 답장이 도착했다.
유혹하는 맥주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삑, 지하철 개찰구에 교통 카드를 찍는 소리가 들려오면 파블로프의 개라도 된 것처럼 그 녀석이 깨어난다. “하, 정말 길고 피곤한 하루였잖아. 오늘 너 정말 수고했어. 오늘 밤은 좀 노곤하게 보내도 괜찮지 않겠어?” 다정한 목소리이지만 넘어가서는 안 된다. 주먹을 꽉 쥐고 지하철 출구 계단을 오른다. 계단이 많다. 다리가 무겁다. 울컥 억울함이 솟는다. 이렇게 힘든 하루를 보낸 내가 ‘아주 조금’ 목을 축이며 편안히 밤을 보낼 자격도 없단 말인가. “하지만 그저께도 똑같은 이유로 들렀잖아. 말만 ‘아주 조금’이지, 막상 들르면 어떻게 되는지 너도 알잖아?” 어느새 다른 방향에서 들려오는 이성의 목소리. 눈을 질끈 감아보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들러야 할 수만 가지 이유가 있는 것처럼 내게도 지하철 출구 앞 편의점에 들러야 할 이유가 차고 넘친다. 오늘은 일을 너무 많이 했으니까, 미세먼지 때문에 목이 칼칼하니까,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으니까, 오늘 밤이 휴일의 마지막 밤이니까, 나는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사야만 한다.
4캔 1만원. 뺄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완결한 유혹이다. 처음에는 낱개로 살 때보다 경제적이라 내일 마실 캔, 주말에 마실 캔을 미리 준비해두는 셈치고 ‘4’라는 숫자를 채웠다. 어느덧 고르는 재미에 빠졌다. 크로넨버그 1664 블랑으로만 4캔을 채운 장바구니와 필스너 우르켈, 블루문, 스텔라 아르투와, 발렌틴스 헤페바이젠 한 캔씩으로 채운 장바구니가 약속하는 밤의 색깔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퇴근길 편의점의 유혹에 저항하기 점점 어려워지면서 내일과 주말의 맥주를 오늘 감사히 가불해 즐기는 일도 잦아졌다. 뜨거운 물로 샤워한 후 냉장고 깊은 곳에서 맥주 캔을 꺼내 목구멍을 한껏 열어젖힌 후 꿀꺽꿀꺽 청량한 그것을 삼킬 때면 몸과 마음 구석구석 쌓인 찌든 때가 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니까. 하지만 나의 배와 엉덩이와 허벅지는 이러한 습관에 불만이 상당히 쌓인 모양이다. 하루가 다르게 자신의 영토를 팽창하며 나에게 시위를 한다. 새해에는 편의점 가는 요일을 정해둬야 하나. 퇴근길 편의점 앞을 ‘쿨’하게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 최혜진(<볼드저널> 편집장)
걷고 또 걷고
여행을 가면 지나치게 많이 걷는 편이다. 내년부터는 정말 그러지 말아야지 마음먹는다. 평소엔 6천 걸음쯤 걸으면서 여행 가서는 2만5천 걸음을 걸으니 병이 날 수밖에. 발 건강이 엉망이 되고 나서야 후회한다. 그런데 정말 변하기가 쉽지가 않다. 새로운 문화와 자연환경에 맞닥뜨리면 호기심이 치솟는 데다, 한국에서 멀어질수록 다시 방문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샅샅이 경험하고 싶어지고 마는 것이다. 박물관에 가면 4시간이 순식간에 흐른다. 낯선 향기와 색채가 번지는 번화가를 걷는 일은 질리지 않고, 읽을 수 없는 책으로 가득하다 해도 서점은 빼놓을 수 없다. 또 먼저 다녀간 친구가 추천해준 맛있는 가게도 가야 하고… 계획대로 혹은 우연에 이끌려 계속 계속 걷는다. 그러다 보면 매일 밤 파스를 붙이고 자도 여행이 끝날 즈음엔 아이고 소리가 나오게 된다.
어쩌면 여행을 떠나는 일 자체를 다소 줄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여행의 윤리에 대해 요즘 들어 더욱 고민한다. 현지인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못할 정도로 여행객들이 한꺼번에 몰려가서 혼란을 일으켜도 되는 것일까? 뉴욕 사람들은 타지인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거리의 간판을 숨기고,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무절제한 관광업계에 반발하며 시위를 한다. 보라카이의 해변은 폐쇄되었고, 제주도도 하수 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관광객들은 물가를 상승시키고 에어비앤비 등의 숙박업소들은 젊은이들의 주거 불안정에 분명 영향을 끼친다. 그뿐만이 아니다. 항공 업계는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2퍼센트를 배출한다는데, 이대로 괜찮은 걸까? 여행만큼 즐거운 일도 없겠지만, 나의 즐거움을 위해 덮어두기엔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크다.
사실은 언제나 여행 온 기분으로 살고 있다. 지구를 잠시 방문했다고 여기면서. 그래서 되도록 아무것도 해치지 않는 여행을 하고 싶다. 사람과 가깝고 먼 동식물도, 이국 도시의 경제 구조도, 나의 나약하기 짝이 없는 발도. 실내 자전거를 타면 VR로 영국의 전원 풍경이 펼쳐지는 게임이 있던데, 언젠가는 그런 여행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감각을 풍부하게 전송할 수 있는 기술이 나온다면 말이다. 조금 덜 느끼고 조금 덜 해치는 것에 타협할 의사가 있다.
– 정세랑(소설가)
거절하는 법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가 된 지 2년째다. 이제는 어느 매체의 기자라고 자신을 소개할 수 없게 됐기 때문에, 조금 긴 자기 소개를 써야 할 때는 ‘불안하면 일을 벌이는 습관이 있다’라고 쓴다. 2년 동안 나는, 프리랜서란 여러 종류의 불안과 싸워야 하는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매일매일 새롭게 깨달았다. 당장 다음 달에 일이 들어올까? 작업비 입금이 늦지는 않을까? 이달에 벌어들인 수입으로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을까? 외부에서 들어온 일을 하다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영영 나를 찾지 않는 건 아닐까? 가만히 기다리다가는 영영 일이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스스로 혹은 동료들과 할 수 있는 일을 만든다. 그렇게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쇼도 만들고, 책도 내고, 잡지도 만들었다. 일을 직접 벌여가며 프리랜서로서의 삶을 이어가기란 매우 지치는 것이지만, 어차피 불안할 거라면 뭐라도 해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일을 벌이는 습관이야 프리랜서가 된 이상 숙명이라 쳐도, 불안하면 앞뒤 생각하지 않고 일을 받는 습관만큼은 정말로 고치고 싶다. 내 나름의 원칙이 없는 건 아니다. 얼마 이상의 고료, 너무 촉박하지 않은 작업 기간, 내가 관심 있는 분야 혹은 주제의 일이 아니라면 아무리 급해도 절대 받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당장 다음 달 걱정 앞에서 이 원칙에 꼭 맞는 일만 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럴 경우 어떻게 되는가? ‘작업비가 너무 적은데. 과정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내 커리어에 그다지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 하며 찜찜해하는 나와 ‘무슨 소리야, 일단 돈을 벌어야지!’ 하는 내가 싸우다 결국 후자가 이긴다. 그리고 일을 하는 동안 영원히 자신을 욕하고 저주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비교적 큰일을 두고 고민을 하다 거절했다. 다음 달의 나는 지금의 나를 고맙게 여기게 될까, 원망하게 될까? 알 수 없지만, 내년에는 덜 불안해하면서 나를 좀 더 지키는 방식으로 일하고 싶다. 작업을 제안하는 메일에 충분히 고민하지 않고 답장하는 경솔함, 일단 일을 받아놓고 괴로워하는 안일함부터 버려야겠지. 안다. 나는 좀 침착해질 필요가 있다.
– 황효진(칼럼니스트)
집 나간 나의 영혼
‘현대인들은 쳇바퀴 돌 듯 산다’는 헛헛한 단면을 보여주는 안 좋은 습관이 있다. 영혼 없이 말하기. “아, 예, 너무 좋죠. 멋있어요.” 고개를 끄덕이는데 초점은 흐릿하다. 마치 자동응답기를 돌린 듯 기계처럼 대답이 흘러나온다. 어쩌면 시리가 나보다 더 다정할지도 모르겠다. “저기 기자님, 제 말은 듣고 계신 거죠?” 아, 물론 듣고는 있다. 그냥 흘려들을 뿐. “제발 영혼을 좀 담아서 말을 해달라”라는 핀잔을 들어서 이제 귀에 딱지가 들어앉을 판이다. 그러게.
왜 이렇게 영혼이 없을까. 며칠 동안 고민한 끝에 ‘직업병’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매달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면서 나름의 매크로가 생긴 거다. “아, 정말요? 너무 좋죠.” 인터뷰이가 괜찮은 대답이나 제법 쓸 만한 기삿거리를 던져줬을 때의 반응이다. “멋있네요.” 인터뷰이가 앞으로의 계획, 포부, 목표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을 때의 대답이다. 결국 좋은 인터뷰란 잘 들어주는 것이라며 자신을 위로하는 중이다. 몇 년 전에는 눈빛도 초롱초롱하고 이것도 궁금하고 저것도 궁금해서 질문을 마구 던졌었다. 업무에 지친 걸까. 인간관계에 질린 걸까. 이제는 뇌를 거치지 않고도 앵무새처럼 자동으로 대답하는 경지에 이른 걸지도. 문제는 진짜 좋고 멋있을 때도 멍한 표정으로 영혼 없는 멘트가 튀어나온다는 거다. 남은 2018년의 작은 목표는 ‘소울리스’를 버리는 것. 나도 감정 풍부하게 듣고 말하고 싶다. 이런 건 어디서 배우나. 학원을 갈 수도 없고. 어디 주유소에서 영혼을 충전할 수도 없는 법인데. 접신이라도 해야 하나.
– 박한빛누리(프리랜스 에디터)
메뉴판 앞에서
식당에서 음식 고를 때 고민하는 습관을 없애고 싶다. 나는 식당에서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고민한다. 새로 간 식당 음식은 안 먹어봤으니까 뭘 먹을까 고민이다. 아는 식당에 가도 음식들이 다 아는 맛이니까 고민이다. 어란 파스타를 먹을까 봉골레를 먹을까. 선지해장국을 먹을까 뼈해장국을 먹을까.
사실 고민하는 음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큰 차이가 없으니까 고민되는 것이다. 지난번에 먹어본 건 검증됐으니까 또 먹을까? 아니면 안 먹어본 건 새로우니까 그걸 먹어볼까? 아니면 안 먹어봤으니 맛있을지 아닐지 모르니까 시키지 말까? 이런 생각 때문에 주문하기 직전에 음식을 바꾸는 경우가 너무 많다. 다 같이 식당에 가서 주문하기 전에 음식을 집계할 때““된장찌개요”라고 했다가 주문을 받으러 왔을 때 “아니, 뚝배기불고기! 미안, 미안”이라고 하는 식이다.
고민 뒤에는 두 가지 마음이 있는 것 같다. 호기심과 망설임이다. 해본 걸 그냥 하자니 안 해본 게 궁금하다. 안 해본 걸 하려니 해본 걸 그냥 할까 싶어 망설여진다. 작은 일인 걸 아니까 더 갈팡질팡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큰일 앞에서는 고민한 적이 없다.
호기심과 망설임이 파생시킨 응용편 습관도 있다. 거절을 못한다는 점이다. 들어오는 일이나 만나자는 부탁은 점점 많아지는데 한심할 정도로 거절을 못한다. 다 거절하자니 별것도 아닌 나를 앞으로 아무도 찾지 않을까봐 망설여진다. 새로 들어온 거라면 일이든 사람이든 궁금하니까 받아들인다. 그 결과 걱정 많은 사람의 약통처럼 늘 이런저런 일정이 쌓여 있다. 감사한 일이지만 그래서 만성적으로 피곤하다. 최근에는 간 보조제도 샀다. 이런 걸 내 의지로 사게 될 줄은 몰랐다.
매사 작은 일에 궁금해하고 망설이는 나 같은 사람에게 가장 재미있는 곳은 네이버 중고나라다. ‘중고나라’라는 이름답게 신기한 물건이 진짜 많이 올라온다. 온갖 신기한 물건을 찾아보다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사버리고 후회하거나 놓쳐서 후회하는 일도 일상의 일부가 됐다. 특히 자기 전에 모바일 중고나라를 보다가 광대뼈 위로 스마트폰을 떨어뜨리면 스스로가 조금 더 한심해진다. 그렇다. 내년엔 중고나라도 덜 보고 싶다.
– 박찬용(매거진 B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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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보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