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컨트롤 프릭일까?
완벽하지 않으면 화가 난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불안하다. 나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계획은 나의 힘?
또 제시간에 일을 마치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틀어진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처음부터 어그러진 것만 같다. 미리미리 계획부터 세우라던데 바로 그 계획 때문에 모든 걸 망쳤다. 오히려 나는 계획왕에 가깝다. 모든 것을 계획해야만 일을 시작할 수 있다. 하루의 대략적인 일정을 세우는 정도가 아니라 한 시간 단위로 무슨 일을 할지 아주 세세한 시간표를 짜야지만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그렇게 세밀한 시간표대로 완벽한 하루를 보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계획대로 인생이 살아지는 사람이 있을까?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지금부터다. 조금이라도 계획에서 틀어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이미 오전부터 시작된다)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마는 것. 보고서 제출이 30분이라도 늦는 날은 거의 재난이다. 마감시간을 3분 넘긴 시점부터 도움도 되지 않는 생각의 늪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왜 차질이 생겼지, 좀 더 빨리 할 수 있었는데, 나는 왜 이러지, 구제불능이야…. 자괴감은 중독적인 면이 있어서 좀처럼 헤어나기가 힘들다. 그렇게 허우적거리다 보면 이후 제시간에 할 수 있는 일정마저 포기해버리고 만다. 처음의 완벽한 일정과 달리 급하게 대충 하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한다. 결과적으로 거창하고 꼼꼼하게 계획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효율은 최악이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강박성 성격장애가 뭐길래
미국정신의학협회에서 발행한 강박성 성격장애의 진단 기준을 살펴봤다.
1 사소한 세부사항, 시간 계획 등에 집착한다.
2 지나친 완벽주의로 인해 일을 완수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3 여가 시간 없이 지나치게 일에 몰두한다.
4 지나치게 양심적이고, 고지식하며, 융통성이 없다.
5 가치 없는 물건이라도 좀처럼 버리지 못한다.
6 타인이 자신의 방식을 따르지 않을 경우 같이 일하는 것을 꺼린다.
7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돈 쓰는 것이 인색하다.
8 경직성과 완고함을 보인다.
현재 의료체계에서는 위의 기준 중 4개 이상에 해당하면 강박성 성격장애로 진단한다. 너무 내 이야기 같아서 덜컥 겁이 나는가? 하지만 크게 걱정부터 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강박성 성격장애로 판단되는 경우는 위의 특성들이 아주 극단적인 상태로 생활 전반에 나타날 때다. 본인과 타인에게 실질적인 고통을 초래하는 정도가 아니라면 성격장애가 아닌 성격특성 정도로 여겨진다. 강박성 성격장애의 하위유형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밀론(Millon&Davis, 1996)에 따르면 “강박성 성격을 지닌 모든 사람을 강박성 성격장애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중에는 분명히 건강하게 잘 기능하는 강박성 성격특성을 지니고 성공적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디든지 일처리가 꼼꼼하고 규칙적이며 일정을 정확하게 관리하는 능력자들이 있지 않은가? 이처럼 적당한 ‘정상’ 범주의 강박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혹시 나는 아닐까
그렇다면 정상 범주에서 벗어나는 특성이 어느 정도를 말하는지 애매해진다. 조금 더 선명한 자가진단을 돕고자 강박성 성격장애의 대표적인 특성을 발췌했다. 다음은 민병배, 이한주의 <강박성 성격장애>에 나와 있는 강박성 성격장애의 8가지 임상적 특징 중 컨트롤 프릭과 연결되는 지점들이다.
첫째, 냉담하고 기계적인 인간관계를 가질 확률이 높다. 컨트롤 프릭의 대표적 사례로 독단적인 상사, 지나치게 보수적인 부모, 구속하는 애인 등이 꼽히는 이유다. 위의 진단 기준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 타인을 수직적으로, 일방적으로 조종하는 것 외에도 업무를 맡기길 꺼리거나 함께 협력하길 불편해하는 것도 해당된다. 이들은 ‘모든 일이 자기만의 방식, 완벽주의적이고 도덕주의적인 방식, 원리원칙적인 방식으로 정확하게 수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가장 옳고 완벽한 자신의 말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태도를 보인다. 고통 받는 입장에서는 이들의 고집이 선명하게 보이지만 자신이 강박성 사고를 하는 경우, 인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자신은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에 가장 현명한 방식을 제시한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둘째, 완벽주의적 성향을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완벽과 거리가 멀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기인한 완벽주의는 오히려 일의 효율을 떨어트린다. 또한 이때의 ‘완벽’의 기준이 철저히 주관적인 것도 문제다.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기준을 세워놓고 결점 하나 없길 바라는 것은 완벽주의가 아닌 강박이다. 문제는 이러한 기준을 자신뿐만 아닌 타인에게까지 강요한다는 점이다. 불가능한 수준을 강요하고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너무나 쉽게 비난을 가한다. 특히 위계적인 조직사회일 경우라면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셋째, 사고의 틀이 경직적이다. 크게 보면 첫 번째와 두 번째 특성에 대한 근원적인 설명이 될 수 있다. 기존의 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에 갇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 아니, 듣지 못한다. 누군가 더 좋은 의견과 창의적인 방식을 제시하더라도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기에 타인과의 감정적인 소통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완고함은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일상의 패턴을 고수하는 것에도 나타나게 되는데 세세한 규칙과 계획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자신이 세운 질서에서 벗어나는 돌발적 사건, 예기치 못한 상황이 매우 불편하다면 의심해볼 만하다.
강박과 이별하기
성격장애의 원인을 묻는 것만큼 허망한 질문도 없다. 성격이란 게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도 아니고 하물며 물리적인 신체가 아파서 병원에 가도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모호한 답변만 안고 돌아오지 않나. 심리학 박사 크리스틴 퍼든•데이비드 A. 클라크의 저서 <끊임없는 강박사고와 행동 치유하기>에서도 알 수 있듯 ‘현재로서는 강박장애가 왜 생기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제 막 강박장애가 지속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내 성격이 이상해진 원인을 꼽을 때 이 세상 모든 것이 이유라 해도 놀랍지 않다.(사실상 이유가 없는 것과도 같다.) 중요한 건 원인이 아니라 해결이라는 걸 말하고 싶은 거다. 해결을 위해 꼭 원인을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 모르더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더 좋은 게 아닌가?
인식을 바꾸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는 식의 ‘힐링’ 해결책은 내게 맞지 않는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겠지! 나와 같은 이들을 위해 위의 두 책에 제시된 강박성 성격장애, 강박사고 치료 해결책 중 현실적으로 시도할 수 있는 몇 가지를 꼽았다.
1 아무것도 안 하기
가장 효과적이고 근본적이다. 불편함이 느껴지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는 것.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취했던 모든 행동을 그만둔다. 처음에는 분명 고통스럽고 이 고통이 강박으로 인한 불안보다 큰 것만 같다. 큰일이 생길 것 같지만 아쉽게도(?)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보통의 결과 앞에서 불편과 불안은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2 작은 실수하기
강박적 상황에 자신을 일부러 노출시키는 정면돌파 전략이다. 실수에 관대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실수를 저질러야만 한다. 삶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치명적인 실수를 시도하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취미로 여겨지는 작은 활동을 새롭게 시작하면 그 안에서 사소한 실수를 하게 될 것이다. 체스를 두거나 컬러링북을 칠하는 건 어떨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게 되겠지만 점점 익숙해질 것이다.
3 정말 그럴까?
강박사고 자체보다 이에 대응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어떤 걸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작게 되물어보자. 정말 해야만 할까? 모든 걸 망쳤다는 생각에 좌절할 때마다 되물어보자. 그렇게까지 망한 건가? 사고의 전환은 언어습관으로부터 시작된다. 비틀어 묻는 과정이 계속되면 자신을 옥죄고 있던 강박과 낙담시킨 결점이 가볍게 느껴지는 날도 분명 온다.
성격장애의 치료는 쉽지 않다. 사람 성격이란 게 손바닥 뒤집듯 바뀔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될 거다. 무엇보다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의 대부분은 자발적으로 치료를 받고자 하는 필요성을 느끼기 어렵다. 누구나 자기자신을 가장 보통의 사람으로 생각하기에 자신에게 어떤 장애가 있다고 의심하는 것조차 드문 일이다. 반대로 말한다면 스스로의 문제점을 인지하는 지점에서는 이미 상당 부분 치료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 그대로 시작이 반이다.
- 에디터
- 정지원
- 포토그래퍼
- GETTYIMAGESKOREA
- 참고도서
- <강박성 성격장애>, 민병배, 이한주, 학지사. <끊임없는 강박사고와 행동 치유하기>, 크리스틴 퍼든 · 데이비드 A. 클라크, 소울메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