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After Night, 이현욱
더운 밤 이현욱은 까만 옷을 입고 땀을 쏟으며 살곶이 다리 위에 혼자 서 있었고, 그 밤이 지나자 계절은 한창 멋을 부리고 싶게끔 다시 돌아왔다.
눈이 참 묘하네요.
좀 많이 밝죠? 이렇게 햇빛 드는 곳에 있으면 더 그래 보이더라고요.
밝은 갈색을 넘어 언뜻 투명한 초록과 회색빛이 도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실 만큼 신기한가요?(웃음) 저도 아주 까만 눈동자를 갖고 싶은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제 눈을 좋게 생각해요.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건 눈이라고들 하죠. 자기 눈의 힘을 믿어요?
저는 오히려 보시는 분들이 어떻게 느낄지 그게 궁금해요. 좀 다르니까 어떤 이질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을지, 좋은 매력으로 봐주는 사람도 있을지. 그냥 좀 날카로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현욱은 엉뚱한가요?”라는 질문을 불쑥 내밀고 싶었습니다.
호기심이 많아요. 되게 중요한 문제인 것 같아요. 연기하는 사람에게 호기심이라는 감정이 없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가장 경계하는 것 중 하나가 매너리즘인데요. 더는 궁금한 게 없어진다면 심각한 매너리즘에 빠질 것 같아요.
주로 어떤 것에 호기심을 느껴요?
저는 철저한 경험주의자예요. 직접 해봐야 알아요.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 답을 알아내야 하고 누가 좀 특별한 경험을 했다 싶으면 저도 해봐야 해요. 다른 배우의 연기를 볼 때 생각하지 못한 감정선을 내보이는 사람을 보면 그게 그렇게 궁금해요. 저돌적으로 다가가서 궁금한 걸 물어보곤 해요. 참을 수 없어서요.
캐릭터를 표현할 때도 경험을 중요하게 여겨요? <마인>의 한지용은 각종 악행을 서슴지 않는 인물이잖아요.
한지용이 하는 짓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걸 다 경험해보고 싶다면 그거 정말 위험하지 않을까요?(웃음) 연기할 때는 좀 다른 것 같아요. 그동안 제 경험을 바탕으로 생긴 페이소스를 이용하는 식으로 가는 거죠. 표면보다는 정서적인 부분에 더 이입하고 다가가면서요. 한지용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차분하고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는 식으로요.
자신이 연기한 인물을 곁에 오래 남겨두는 배우도 있고 돌아서면 금세 나로 돌아오는 배우가 있잖아요. 어느 쪽인가요?
바로 잊어버려요. 보내줘요. 캐릭터에서 바로 빠져나올 줄 아는 것도 연기자의 재능이라고 생각해요. 살인자를 연기했는데 작품이 끝난 이후까지 그 감정 상태가 남아 있다는 건 위험하기도 하지만 참 아이러니한 일이잖아요. 저는 연기를 이성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거 굉장히 중요해요.
여러 번 반복해서 이성을 강조하는데 굳은 다짐인가요?
노력해요. 순간순간마다 이성을 유지하려고. 그래야 제가 연기하는 인물에게 잠식당하지 않을 수 있어요.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아주 슬픈 장면과 마주할 때 있잖아요. 배우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슬픔을 표현하면 막상 보는 사람은 할 게 없어져요. 하나도 안 슬퍼요. 공감하고 나눌 수 있는 여분의 감정이 없으니까요. 배우는 그때 폭발하는 감정의 양과 정도를 미세하게 컨트롤할 줄 알아야 해요. 그건 굉장히 이성적인 작업이거든요. 최대한 이성적으로, 객관적으로 연기를 하려고 노력하는 이유예요.
캐릭터는 금세 잊지만 작품은 간직해요? <마인>은 어떻게 남아 있어요?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마인>에 참여한 게 되게 오래된 일처럼 남았어요. 기분이 그래요. 극단을 오가는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짜릿한 경험이기도 했지만 힘들기도 했어요. 나름대로는 아주 어려운 놀이터에서 신나게 잘 논 것 같아요.
‘어려운 놀이터’에서 느껴지는 충돌이 어색하지 않게 들리네요. 어려운 놀이터에서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가요?
맞아요. 일상적이거나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는 작품을 잘 안 했어요. 주로 장르물을 많이 했어요. 일상적인 연기도 물론 어렵지만, 그거랑 다른 방식으로 힘든 길을 선택했죠. 장르물은 뚜렷하거든요. 캐릭터와 이야기의 목적이 분명하고 해결해야 하는 미션도 명확해요. 그 숙제를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거기서 재미를 느껴요.
한지용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의 인물상을 투영했다는 인터뷰가 생각나네요.
비아냥대는 걸 싫어해요. 굉장히 불쾌한 태도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비아냥댈 때의 모습을 한지용에게 적용했어요. 말할 때 턱을 이렇게 까딱거린다든가 사람을 뜯어보는 식으로 쳐다보는 눈빛, ‘어쩌라고?’ 냉소하듯 보이는 표정 같은 거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과한 건 아니었나 싶긴 하네요. 작품 속의 캐릭터가 미워 보이는 건 좋은데 저 자체를 미워하는 사람도 많았거든요.
인스타그램에서 “저를 미워하지 마세요”식의 호소를 자주 보긴 했어요. 웃어 넘겼는데 진심이었군요?
역할 때문에 욕먹는 거 한두 번도 아니고 상처는 아니에요. 근데 이번엔 너무들 인신공격을 하시니까.(웃음) 제 느낌에 어머니가 분명 인스타그램을 하시는 것 같거든요. ‘맞팔’ 사이가 아니라서 알 순 없지만 보고 계신 것 같아요. 어머니가 보면 속상해하실 댓글이 좀 많아요. 그게 마음이 쓰이는 거죠.
모두에게 사랑받는 착한 사람을 한번 연기하는 건 어때요?
착하고 정의롭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캐릭터 너무 좋죠. 근데 그런 마음은 또 안 생겨요. 제가 또 경계하는 게 바로 칭찬이거든요. 비뚤어진 마음일 수도 있는데 칭찬을 다 믿지 않는 편이에요. 아흔아홉 번의 칭찬보다 무서운 게 단 한 번의 싸늘한 말이라는 걸 알거든요. 데미지가 진짜 크더라고요. 칭찬보다 채찍을 더 좋아해요. 스스로에게도 좀 박하게 구는 편이고요.
아니 왜 굳이 채찍을? 스스로에게 박한 건 꽤 피곤하지 않아요?
몸과 마음이 안락하면 자꾸 의심이 생겨요.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의심. 약간의 긴장과 스트레스 상태에서 올라오는 텐션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줘요. 멈춰 있지 않은 느낌이 드니까. 그래도 헤쳐나가고 있는 것 같거든요. 팔자예요.(웃음)
삶에서 뭘 특별히 기대하지 않아요?
삶의 기대치를 낮춰놓고 산다는 말이 적당할 것 같아요. 그럼 되게 작은 기쁨도 크게 와 닿거든요. 자신을 좀 속이는 건데, 전 그게 더 좋더라고요. 한때 누구보다 긍정적인 마인드로 살아봤는데요. 잘 안 맞았어요.
말하는 방식이나 모습이 고요하네요. 근데 좀 웃겨요. 인스타그램도 그렇고.
그게 웃겨요? 당황스러울 따름이에요. 갑자기 새로 시작한 게 아니라 꽤 오래전부터 그렇게 인스타그램을 해왔거든요. 올리고 싶은 사진을 올리면서 그때그때 떠오르는 문장을 함께. 진짜 뭐 없는 짧은 문장이요.
당신이 툭툭 내뱉은 짧은 문장을 오늘의 질문으로 건넬까 해요. 2019년 4월 5일 ‘수다, 그리고 고질적 고민들’이라고 남겼어요. 고질적 고민은 해결했나요?
친한 형이랑 카페에 갔을 때 올린 거네요. 만나면 일상적인 이야기부터 하잖아요. 시시껄렁한 농담도 주고받고요. 갈수록 대화가 깊어지죠. 고질적인 고민을 토로하게 돼요. 주로 연기에 관한 거, 미래에 관한 고민들이요. 늘 그랬던 것 같아요. 각자의 물음표를 안고 헤어져요. 지금도 똑같아요. 달라진 거 없어요.
그 고민이 언젠가는 해결되길 바라나요?
그런 날이 올까요? 그 고민들이 사라진다면 그냥 빈 껍데기만 남게 될 것 같아요.
자주 ‘버틴다’는 말을 적었어요. 주로 2016년에.
여러모로 힘든 시절이었어요.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자존심은 있어서 대충 타협하기는 싫었어요. 포기하기도 싫고. 힘들어도 조금만 더 버티자. 그런 다짐.
결국엔 다들 버티는 거겠죠?
다 버티면서 사는 거죠. 늘 웃고 있는 사람도, 늘 울고 있는 사람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버티면서 살아요. 힘내라는 위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요. 지치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게 진짜 중요한 것 같아요.
<타인은 지옥이다> 이후 쉼 없이 일하게 됐죠. 드디어 빛을 본 것 같아요?
이제 시작이죠. 모든 작품을 만날 때마다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산 넘어 또 산이에요. 몸이 힘들 때가 있는데요. 힘들다는 말은 잘 안 하려고 해요. 피곤하다는 말은 자주 하지만.(웃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좋은 기회라는 걸 알고 있어요. 지금 느끼는 보람과 재미를 더 오래 간직하고 싶어요.
차기작으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블랙의 신부>를 선택했죠. 어때요?
이전에 맡았던 역할과 비슷한 부분이 있는데 질감이 좀 달라요.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미 촬영은 들어갔고요. 저는 내일 첫 촬영을 앞두고 있습니다.
첫 촬영 전날은 경건하게 팩도 좀 하고 쉬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원래 그랬는데요. 지금은 담담하게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해요. 그게 더 낫더라고요. 예민함을 유지해야만 몰입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워낙 좋은 스태프와 배우가 함께하는 작품이라 즐거운 마음으로 현장에 가려고 해요.
여름밤 좋아해요?
깊은 밤 좋아하죠. 고요한 시간에 혼자 드라이브하는 거. 후텁지근한 공기와 풀 냄새도 좋고요. 일부러 땀 쫙 빼고 시원하게 샤워하는 것도 좋아해요.
아직 7월 말이고 오늘 밤도 무덥다고 합니다. 여기 성수동 근처에 살곶이 다리라고 있어요. 운치가 있죠. 있다가 밤에 거기 좀 같이 가시죠?
이런 날씨에 참 쉽지 않은 결정을 하셨네요. 의도가 있으니까 이러시는 거겠죠. 저는 그 안에서 노는 사람이니까.
더우면 더운 대로, 그렇게 있으셔도 돼요. 뭘 막 하지 않을 때가 웃기고 좋아요.
얼마든지. 아마 저는 그냥 되게 드라이할 거예요. 포커페이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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