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After Night, 이현욱

더운 밤 이현욱은 까만 옷을 입고 땀을 쏟으며 살곶이 다리 위에 혼자 서 있었고, 그 밤이 지나자 계절은 한창 멋을 부리고 싶게끔 다시 돌아왔다.

트렌치 코트는 인스턴트펑크(Instant Funk), 양말은 챔피온.

눈이 참 묘하네요.
좀 많이 밝죠? 이렇게 햇빛 드는 곳에 있으면 더 그래 보이더라고요.

밝은 갈색을 넘어 언뜻 투명한 초록과 회색빛이 도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실 만큼 신기한가요?(웃음) 저도 아주 까만 눈동자를 갖고 싶은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제 눈을 좋게 생각해요.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건 눈이라고들 하죠. 자기 눈의 힘을 믿어요?
저는 오히려 보시는 분들이 어떻게 느낄지 그게 궁금해요. 좀 다르니까 어떤 이질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을지, 좋은 매력으로 봐주는 사람도 있을지. 그냥 좀 날카로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현욱은 엉뚱한가요?”라는 질문을 불쑥 내밀고 싶었습니다. 
호기심이 많아요. 되게 중요한 문제인 것 같아요. 연기하는 사람에게 호기심이라는 감정이 없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가장 경계하는 것 중 하나가 매너리즘인데요. 더는 궁금한 게 없어진다면 심각한 매너리즘에 빠질 것 같아요.

주로 어떤 것에 호기심을 느껴요?
저는 철저한 경험주의자예요. 직접 해봐야 알아요.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 답을 알아내야 하고 누가 좀 특별한 경험을 했다 싶으면 저도 해봐야 해요. 다른 배우의 연기를 볼 때 생각하지 못한 감정선을 내보이는 사람을 보면 그게 그렇게 궁금해요. 저돌적으로 다가가서 궁금한 걸 물어보곤 해요. 참을 수 없어서요.

캐릭터를 표현할 때도 경험을 중요하게 여겨요? <마인>의 한지용은 각종 악행을 서슴지 않는 인물이잖아요.
한지용이 하는 짓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걸 다 경험해보고 싶다면 그거 정말 위험하지 않을까요?(웃음) 연기할 때는 좀 다른 것 같아요. 그동안 제 경험을 바탕으로 생긴 페이소스를 이용하는 식으로 가는 거죠. 표면보다는 정서적인 부분에 더 이입하고 다가가면서요. 한지용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차분하고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는 식으로요.

티셔츠는 아트이프액츠(Art If Acts), 바지는 필로그램(Philogram), 양말은 챔피온(Champion), 신발은 발렌시아가(Balenciaga).

자신이 연기한 인물을 곁에 오래 남겨두는 배우도 있고 돌아서면 금세 나로 돌아오는 배우가 있잖아요. 어느 쪽인가요?
바로 잊어버려요. 보내줘요. 캐릭터에서 바로 빠져나올 줄 아는 것도 연기자의 재능이라고 생각해요. 살인자를 연기했는데 작품이 끝난 이후까지 그 감정 상태가 남아 있다는 건 위험하기도 하지만 참 아이러니한 일이잖아요. 저는 연기를 이성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거 굉장히 중요해요.

여러 번 반복해서 이성을 강조하는데 굳은 다짐인가요? 
노력해요. 순간순간마다 이성을 유지하려고. 그래야 제가 연기하는 인물에게 잠식당하지 않을 수 있어요.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아주 슬픈 장면과 마주할 때 있잖아요. 배우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슬픔을 표현하면 막상 보는 사람은 할 게 없어져요. 하나도 안 슬퍼요. 공감하고 나눌 수 있는 여분의 감정이 없으니까요. 배우는 그때 폭발하는 감정의 양과 정도를 미세하게 컨트롤할 줄 알아야 해요. 그건 굉장히 이성적인 작업이거든요. 최대한 이성적으로, 객관적으로 연기를 하려고 노력하는 이유예요.

캐릭터는 금세 잊지만 작품은 간직해요? <마인>은 어떻게 남아 있어요?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마인>에 참여한 게 되게 오래된 일처럼 남았어요. 기분이 그래요. 극단을 오가는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짜릿한 경험이기도 했지만 힘들기도 했어요. 나름대로는 아주 어려운 놀이터에서 신나게 잘 논 것 같아요.

‘어려운 놀이터’에서 느껴지는 충돌이 어색하지 않게 들리네요. 어려운 놀이터에서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가요?
맞아요. 일상적이거나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는 작품을 잘 안 했어요. 주로 장르물을 많이 했어요. 일상적인 연기도 물론 어렵지만, 그거랑 다른 방식으로 힘든 길을 선택했죠. 장르물은 뚜렷하거든요. 캐릭터와 이야기의 목적이 분명하고 해결해야 하는 미션도 명확해요. 그 숙제를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거기서 재미를 느껴요.

니트, 코트, 팬츠는 모두 에르메네질도 제냐(Ermenegildo Zegna).

한지용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의 인물상을 투영했다는 인터뷰가 생각나네요. 
비아냥대는 걸 싫어해요. 굉장히 불쾌한 태도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비아냥댈 때의 모습을 한지용에게 적용했어요. 말할 때 턱을 이렇게 까딱거린다든가 사람을 뜯어보는 식으로 쳐다보는 눈빛, ‘어쩌라고?’ 냉소하듯 보이는 표정 같은 거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과한 건 아니었나 싶긴 하네요. 작품 속의 캐릭터가 미워 보이는 건 좋은데 저 자체를 미워하는 사람도 많았거든요.

인스타그램에서 “저를 미워하지 마세요”식의 호소를 자주 보긴 했어요. 웃어 넘겼는데 진심이었군요?
역할 때문에 욕먹는 거 한두 번도 아니고 상처는 아니에요. 근데 이번엔 너무들 인신공격을 하시니까.(웃음) 제 느낌에 어머니가 분명 인스타그램을 하시는 것 같거든요. ‘맞팔’ 사이가 아니라서 알 순 없지만 보고 계신 것 같아요. 어머니가 보면 속상해하실 댓글이 좀 많아요. 그게 마음이 쓰이는 거죠.

모두에게 사랑받는 착한 사람을 한번 연기하는 건 어때요?
착하고 정의롭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캐릭터 너무 좋죠. 근데 그런 마음은 또 안 생겨요. 제가 또 경계하는 게 바로 칭찬이거든요. 비뚤어진 마음일 수도 있는데 칭찬을 다 믿지 않는 편이에요. 아흔아홉 번의 칭찬보다 무서운 게 단 한 번의 싸늘한 말이라는 걸 알거든요. 데미지가 진짜 크더라고요. 칭찬보다 채찍을 더 좋아해요. 스스로에게도 좀 박하게 구는 편이고요.

아니 왜 굳이 채찍을? 스스로에게 박한 건 꽤 피곤하지 않아요?
몸과 마음이 안락하면 자꾸 의심이 생겨요.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의심. 약간의 긴장과 스트레스 상태에서 올라오는 텐션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줘요. 멈춰 있지 않은 느낌이 드니까. 그래도 헤쳐나가고 있는 것 같거든요. 팔자예요.(웃음)

니트, 재킷, 팬츠는 모두 에르메네질도 제냐.

삶에서 뭘 특별히 기대하지 않아요?
삶의 기대치를 낮춰놓고 산다는 말이 적당할 것 같아요. 그럼 되게 작은 기쁨도 크게 와 닿거든요. 자신을 좀 속이는 건데, 전 그게 더 좋더라고요. 한때 누구보다 긍정적인 마인드로 살아봤는데요. 잘 안 맞았어요.

말하는 방식이나 모습이 고요하네요. 근데 좀 웃겨요. 인스타그램도 그렇고. 
그게 웃겨요? 당황스러울 따름이에요. 갑자기 새로 시작한 게 아니라 꽤 오래전부터 그렇게 인스타그램을 해왔거든요. 올리고 싶은 사진을 올리면서 그때그때 떠오르는 문장을 함께. 진짜 뭐 없는 짧은 문장이요.

당신이 툭툭 내뱉은 짧은 문장을 오늘의 질문으로 건넬까 해요. 2019년 4월 5일 ‘수다, 그리고 고질적 고민들’이라고 남겼어요. 고질적 고민은 해결했나요?
친한 형이랑 카페에 갔을 때 올린 거네요. 만나면 일상적인 이야기부터 하잖아요. 시시껄렁한 농담도 주고받고요. 갈수록 대화가 깊어지죠. 고질적인 고민을 토로하게 돼요. 주로 연기에 관한 거, 미래에 관한 고민들이요. 늘 그랬던 것 같아요. 각자의 물음표를 안고 헤어져요. 지금도 똑같아요. 달라진 거 없어요.

그 고민이 언젠가는 해결되길 바라나요? 
그런 날이 올까요? 그 고민들이 사라진다면 그냥 빈 껍데기만 남게 될 것 같아요.

자주 ‘버틴다’는 말을 적었어요. 주로 2016년에.
여러모로 힘든 시절이었어요.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자존심은 있어서 대충 타협하기는 싫었어요. 포기하기도 싫고. 힘들어도 조금만 더 버티자. 그런 다짐.

결국엔 다들 버티는 거겠죠?
다 버티면서 사는 거죠. 늘 웃고 있는 사람도, 늘 울고 있는 사람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버티면서 살아요. 힘내라는 위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요. 지치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게 진짜 중요한 것 같아요.

니트, 재킷 팬츠, 신발은 모두 발렌티노(Valentino).

<타인은 지옥이다> 이후 쉼 없이 일하게 됐죠. 드디어 빛을 본 것 같아요? 
이제 시작이죠. 모든 작품을 만날 때마다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산 넘어 또 산이에요. 몸이 힘들 때가 있는데요. 힘들다는 말은 잘 안 하려고 해요. 피곤하다는 말은 자주 하지만.(웃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좋은 기회라는 걸 알고 있어요. 지금 느끼는 보람과 재미를 더 오래 간직하고 싶어요.

차기작으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블랙의 신부>를 선택했죠. 어때요? 
이전에 맡았던 역할과 비슷한 부분이 있는데 질감이 좀 달라요.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미 촬영은 들어갔고요. 저는 내일 첫 촬영을 앞두고 있습니다.

첫 촬영 전날은 경건하게 팩도 좀 하고 쉬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원래 그랬는데요. 지금은 담담하게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해요. 그게 더 낫더라고요. 예민함을 유지해야만 몰입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워낙 좋은 스태프와 배우가 함께하는 작품이라 즐거운 마음으로 현장에 가려고 해요.

여름밤 좋아해요?
깊은 밤 좋아하죠. 고요한 시간에 혼자 드라이브하는 거. 후텁지근한 공기와 풀 냄새도 좋고요. 일부러 땀 쫙 빼고 시원하게 샤워하는 것도 좋아해요.

아직 7월 말이고 오늘 밤도 무덥다고 합니다. 여기 성수동 근처에 살곶이 다리라고 있어요. 운치가 있죠. 있다가 밤에 거기 좀 같이 가시죠?
이런 날씨에 참 쉽지 않은 결정을 하셨네요. 의도가 있으니까 이러시는 거겠죠. 저는 그 안에서 노는 사람이니까.

더우면 더운 대로, 그렇게 있으셔도 돼요. 뭘 막 하지 않을 때가 웃기고 좋아요.
얼마든지. 아마 저는 그냥 되게 드라이할 거예요. 포커페이스로.

    포토그래퍼
    Kim Sin 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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