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 SUMMER NIGHTS / 박재찬
운명을 믿는 박재찬은 봄이가고 뜨거운 여름밤이 오도록 점점 더 푸르게 자라고 있다.
자정이 훌쩍 넘었네요.
이거 녹음기예요? 저 처음 봐요. 신기하다. 뭔가 되게 예쁘게 생겼네요.
제법 시간이 늦었는데 지금 괜찮은 거죠?
좀 피곤한 것 같은데 좋아요.(웃음) 화보 촬영은 늘 도전하는 느낌이 들어요. 오늘도 처음엔 헤맸지만 뒤로 갈수록 어떤 느낌인지 알겠더라고요. 수월해지는 그 느낌이 재밌어요.
포즈나 표정을 만들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어 달라고 부탁했는데, 뭘 원하는지 금세 알아차리는 것 같던데요?
배우는 건 뭐든 좀 빠른 편이에요. 학문적인 거 말고요.(웃음) 상황에 대한 적응력이라고 해야 하나. 그때그때 현장에서 습득하는 거요.
여기 오면서 보니까 왓챠 톱 10의 1위가 여전히 <시맨틱 에러>더군요.
2월 16일 1화부터 3월 10일 8화까지 공개된 지 좀 됐는데도 그렇더라고요. 저도 되게 신기해요. 아무래도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아요. 중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 시청자와 팬의 반응까지 보면 뭐 그저 놀랍죠.(웃음)
작품은 다 봤어요? 의외로 자기 출연작을 끝까지 못 보겠다고 하는 배우가 많잖아요.
원래 저도 그런 편이기는 해요. 주로 중요한 장면이나 꼭 확인하고 싶은 장면만 챙겨 보고 마는 식으로요. 근데 <시맨틱 에러>는 1화부터 8화까지 공개되는 날짜에 딱딱 맞춰서 챙겨 봤어요. 제가 나온 작품 전체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보니까 그냥 쭉 보게 되던데요.
한번 틀면 멈출 수 없다?
그것도 그렇지만 마음속에 어떤 욕심이 있어서인 것 같아요. 유난히 그래요. 작품을 촬영하면서 연기에 대한 욕심이 점점 커졌어요. 뭔가 더 해보고 싶다는, 잘하고 싶다는 마음요. 완성된 작품을 보면서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굳이 BL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전제할 마음은 없지만 <시맨틱 에러>를 선택한 건 여러 의미에서 도전이지 않을까 싶은데, 어때요?
일단 제가 작품을 선택했다기보다 선택받았다는 표현이 정확하죠. 아이돌로 데뷔한 지 3년쯤 지났을 때였는데, 제 기준에서 볼 때 이렇다 할 성과가 전혀 없었어요. 뭐든 기회가 오면 다 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시도하고 부딪치다가 좋은 기회를 만나 참여하게 된 거예요. BL이라는 장르에 편견이나 거부감이 없기도 했어요.
진짜 아무 상관 없다는 표정과 말투네요.
그냥 저는 좀 그런 사람인 것 같아요. 벽을 치면 칠수록 삶에서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폭이 줄어드는 거잖아요. 시야도 좁아지고요.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나 싶어요. 나와 다른 사람, 내가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분명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가만히 있어도 이런저런 오해에 휘말리기 쉬운 시대잖아요. 어때요?
사실 회사에서는 고민해보자는 의견이 있었어요. 조심스러우니까요. 근데 저는 진짜 그런 걱정 없었어요. 잃을 게 없는 사람은 그래요.(웃음) 평소 성향도 성향이지만, 저와 제가 속한 팀을 세상에 알리는 데 도움이 된다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감정이 얼굴에 잘 드러나는 사람인가 봐요. 지금은 되게 절실한 얼굴이 스쳤거든요.
절실함이 있었어요. 저희 진짜 바닥에서 시작했거든요. 소셜미디어 팔로워도 몇 십 명뿐이었고, 앨범 판매량이 마흔한 장일 때도 있었어요.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게 아니더라고요. 힘들더라고요.
지금은 어때요? 하룻밤 사이 높이 뜬 별이 된 지금.
그 말이 맞아요. 그냥 붕 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느낌 아세요? 이제 단단하게 자리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어요. 정말 한순간에 이렇게 올라온 거잖아요. 더 올라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너무 큰 욕심은 안 내려고 해요. 이 기회를 날려버리지 않고 단단하게 만드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자고 일어났는데 다 사라졌으면 안 되니까요. 가끔 그런 상상을 하는데요. 진짜 무서워요.(웃음)
꿈이 아닌 것만은 확실해요. BL 문화의 특성상 한번 구축된 팬덤은 철옹성이니까요.
하하. 근데 그 말도 맞는 것 같아요. 팬덤이 진짜 강하더라고요. 힘을 모아서 광고도 해주시고, <시맨틱 에러>를 테마로 한 카페도 있더라고요. 약간 신세계였어요.
유독 한국에서는 숨어서 보던 BL을 양지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으로 남을 거예요. 지난 주말 나른하게 누워 <출발! 비디오 여행>을 보는데, <시맨틱 에러>가 나오길래 벌떡 일어났지 뭐예요.
공중파에 나오다니! 공중파에서 BL이 등장하는 게 거의 금기시되다시피 했다고 하더라고요. 미처 인지하지 못한 건데, 좋은 평가를 보면 괜히 뿌듯하고 막 그래요.
영역을 확장하고 이름을 새기는 사람이군요.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웃음) 그런 작품에 참여해서 영광입니다. 연기를 하든 음악을 하든 한 분야에 획을 긋는 의미 있는 작품에 참여했다는 건 진짜 그런 거잖아요.
이런 질문은 어때요? 왜 지금 BL이 뜨는 걸까요?
사회적 시선이나 개인의 신념에 따라 호불호가 있을 수 있다고는 생각해요. 좋거나 싫거나 하는 기준이 없는 불특정 다수도 있을 거고요. 처음 시나리오를 읽을 때 중후반부까지 저도 BL인지 몰랐어요. 평범한 캠퍼스물인 줄 알았어요. 많은 분이 작품을 그렇게 바라본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장르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식의 이야기라서 거부감 없이 접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편견이 많은 장르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에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정말 똑똑한 방식인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보편적 장르가 아니라 너무 본격적으로 가면 거부감이 생길 텐데 초반 설정을 잘해서 누구나 편하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느릿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분명한 말을 하는 게 흥미롭네요. 확신이 있어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은 무조건 있죠. 그렇게 믿고 싶은 걸 수도 있는데, 혼자 계속 주문을 걸어요. 잘될 거야. 하고 싶은 대로 해봐. 그럼 진짜 멋지고 쿨하지 않을까?
그 주문의 힘으로 오늘날 박재찬이 여기 있는 거겠죠?
요즘 부쩍 자주 하는 생각인데요. 세상 모든 사람이 저를 좋아할 수는 없어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는 게 가장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이런 제 모습을 좋아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지만, 그게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때는 저도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었는데, 그 욕망이 클수록 피폐해지더라고요. 단지 사랑받기 위해서 가짜로 뭘 꾸며내고 싶지는 않아요.
아까 팔뚝에 있는 BCG 주삿바늘 자국 18개를 보면서 우리의 세대와 시대가 많이 다르다는 걸 새삼 생각했어요. 굳이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지 않아도 좋다는 태도도 뭔가 요즘 같아서 좋네요.
에디터님은 이렇게 자국이 남는 불주사 세대예요?(웃음)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에너지를 아껴서, 저를 사랑해주는 사람들과 나눌래요. 그게 훨씬 더 좋아요. 저만의 생존방식이기도 하고요.
그나저나 운명을 믿어요?
저는 운명을 믿어요. 살면서 나름대로 많은 시련을 겪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경험이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시련도 성공도 행복도 어차피 다 제가 경험하게 될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제작진은 닫힌 결말이라고 강조했지만, 팬들은 닫힌 문을 강제로 열겠다고 하던데요. <시맨틱 에러> 시즌 2는 어때요?
지금은 시즌 2를 모두가 원하는 것 같아요.(웃음) 작품이 다 그렇겠지만, 수많은 사람이 한곳을 바라보고 모여서 함께한다는 건 정말 기적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함께한 배우 서함이 형이 군대에 있어서 당장은 어렵겠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이어진다면 기적 같은 일이 또 생길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기꺼이, 감사한 마음으로 참여할 거고요.
운명을 믿는 사람이니까, 뭐든 이미 정해져 있을지도 모르죠.
맞아요. 아직 모르는 것일 뿐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을 거예요. 최근 유난히 자주 운명을 믿는다고 말하고 다니는데 어떻게 보면 그것도 제 속 편하려고 그러는 것 같아요.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안하거든요.
금세 또 평온한 얼굴이 되네요. 졸린가요?
스물둘 인생에서 가장 바쁜 일주일을 보내고 있어요. DKZ 컴백을 앞두고 준비할 게 많아요. 새 앨범 예약 판매를 시작한 지 6일 차인데, 아까 보니까 6만 장이 넘었더라고요. 저 진짜 울컥했어요. 몸은 엄청 힘든데 마음은 편안해요. 참 이상하죠?
아직 밤에는 쌀쌀한 4월인데 우리 대화가 세상에 나오는 6월호는 이미 뜨거운 여름을 말하고 있을 거예요. 참 이상하지 않아요?
그때 돌아보면 오늘이 되게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것도 참 이상하고 또 궁금하네요. 6월에는 제 마음이 어떻게 변해 있을까요? 그때는 반소매를 입겠죠? 진짜 여름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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