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의 꿈 / 강미나
빨간 머리 강미나가 유유히 걷는 그 길 위에서.
맥주 좋아해요?
하루의 노동 끝에 마시는 맥주 한 잔의 맛을 알아버렸어요. 친구들과 즐겁게 마시는 것도 좋지만, 집에 들어와서 씻고 딱 한 잔 마실 때 기분이 정말 좋더라고요. 너무 많이 마시는 건 싫고 알딸딸하게 올라온다 싶으면 그때 정리하고 바로 자야 해요. 그 타이밍을 지나면 뒤척이게 되니까요. 그때 자야 푹 잘 수 있어요.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소박하지만 큰 보상 중 하나죠.
맞아요. 진짜. 오늘 하루도 무사히 잘 버틴 내게 주는 보상이에요. 그런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자신을 다독이고 챙기는 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종종 한 잔씩 마시고는 합니다.(웃음)
맥주 한 잔의 보람을 아는 나이가 됐네요?
저도 내년이면 스물다섯이에요, 벌써.(웃음) 내가 20대 중반이라니! 그 사실을 깨달은 날 얼마나 충격받았는지 몰라요. 2016년 첫 앨범이 나왔을 때, 또 처음 연기에 도전했을 때를 이렇게 돌아보면 그래도 시간이 흘렀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도 괜히 새삼스럽습니다.
지나온 시간의 속도를 생각하면 어때요?
그냥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노력한 만큼, 살아온 만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적당한 시간의 속도로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자기만의 속도를 잘 지킨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때 보여요? 뭔가에 휩쓸리거나 치우치지 않고 나름 제 속도를 잘 지켜왔다고 생각해요. 워라밸도 괜찮은 편이고,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좋았어요. 그런 게 차곡차곡 쌓였기 때문에 큰 탈 없이 올 수 있었다고 믿어요.
되짚어보니까 쉼 없이 자신을 증명하며 지금에 이른 것 같은데, 어때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깐씩 쉬어 갈 때도 있었지만, 크든 작든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치열하게 노력했어요. 저는 노력이 결과로 증명되는 순간의 희열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나 자신을 증명하는 일. 내 것, 내 색깔을 지키고 표현하는 일이 좋아요. 점점 더 중요해져요. 그래서 그렇게 했어요.
한번 시작했거나 꽂히면 끝장을 봐야 하는 사람이 있죠. 미나 씨는 어때요?
그게 바로 접니다.(웃음) 꽂히면 끝을 봐야 해요. 드라마 <썸머가이즈>에서 바텐더 역할을 맡았는데, 칵테일이 재미있더라고요. 작년에 주조기능사 자격증을 땄어요. 새로운 게임을 시작해도 끝장을 봐야 해요. 빨리 결과를 보고 싶고, 시작했으면 완결을 짓고 싶어요. 어중간한 건 싫어요. 끝을 보기 전까지는 잘 놓지도 않아요.
타고난 기질이 그래요?
어릴 적부터 승부욕이 강했어요. 진짜 장난 아니었어요.(웃음) 애매한 것보다는 답을 찾는 게 좋아요. 매사에 답을 찾고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 어떻게 보면 너무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뭐든 분명히 하는 건 좋은 태도죠. 연기는 어때요?
처음 시작할 때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잘해야 해’ ‘욕먹을 짓 하면 안 돼’ 같은 마음만 컸어요. 늘 그런 걱정만 한 것 같아요. 함께하는 배우와 스태프에게 폐 끼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지금은 연기가 정말 좋아졌어요. 진심으로 좋아하게 됐어요. 요즘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공감이에요.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연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강해져요. 무작정 잘하고 싶은 거랑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욕심이 나요. 누구나 공감하고 인정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저는 이 길을 쭉 가기로 마음먹었거든요.
연기에 관해서는 어떤 고민을 해요?
지금 우리 둘이 이렇게 대화하고 있잖아요. 진짜 대화요. 저는 작품 속에서 연기할 때 진짜 이런 대화를 하고 싶어요. 근데 그게 참 어렵더라고요. 꾸미지 않은 내 목소리와 말투로 연기하는 거요. 어떻게 하면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자연스러운 연기를 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주로 해요.
배에 힘 빡 주고 발성과 발음을 훈련한 기성 배우와 다른 길을 가는 요즘 배우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좋아 보여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정답 같은 연기 톤이 아니라 진짜 내 목소리를 쓰고 싶어요. 요즘은 관객도 그런 방식을 더 좋아한다고 생각해요. 이런저런 시도를 하면서 저만의 방식을 찾아가고 있어요. 뭐든 그렇지만 많이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작하는 드라마 <미남당>은 어때요? 부스스한 빨간 머리에 뿔테 안경을 낀 모습이 거침없어 보이던데.
외형적인 면에서 큰 도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좀 망가져도 괜찮을 것 같더라고요. 열심히 과자를 먹다가 손가락에 묻은 걸 옷에 쓱 닦고 아무렇지도 않게 컴퓨터 게임을 하는 그런 캐릭터거든요. 그런 부스스한 모습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홍조도 이렇게 칠하고요. 촬영하면서 되게 험한 욕도 많이 했는데, 방송에는 어떻게 나갈지 모르겠네요.(웃음) 사람들이 생각하는 강미나의 이미지가 있잖아요. 마냥 그렇게 밝고 건강한 캐릭터는 아닐 거예요. 그래서 저는 좋아요.
씩 웃고 마네요. 그런 배반을 즐겨요?
두렵지는 않은 것 같아요. 제가 볼 때 배우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은 작품에 젖어 드는 순간, 그 속에서 반짝반짝 빛날 때인 것 같아요. 다른 모습을 시도해보고 싶었어요. 완전히 확 다른 모습요. 예쁜 건 오늘 같은 화보 촬영에서 마음껏 또 하면 돼요.
아까 잔뜩 클로즈업한 사진이 모니터에 뜨는데 배우의 얼굴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너무 좋은 말이네요. 진짜 좋다.
태어난 건 경기도 이천인데 유년 시절은 제주에서 보냈더군요. 제주공항 근처의 학교에 다닌 것 같고요. 매일 수없이 뜨고 내리는 비행기를 보면서 그 시절 강미나는 어떤 생각을 했어요?
어릴 때는 별 감각이 없었어요. 하늘을 자주 올려다봤나? 그렇지도 않은 것 같고요. 그때는 그냥 친구들과 모여서 불량식품 사 먹고 뛰어노는 게 제일 즐거울 때잖아요. 제주에 사는 게 좀 다르거나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크면서 깨달았죠. 산도 좋고 숲도 좋고 바다도 아름답지만, 나는 섬에 살고 있구나. 섬을 떠나고 싶다. 한 번씩 그런 생각을 했어요. 사춘기였으니까요.
작년에 스스로를 ‘인간 제주도’라고 칭하던 배우 고두심을 인터뷰했는데, 똑같은 말을 했어요. 섬사람은 뭍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팔자라고.
맞아요.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어릴 적부터 가수가 되고 싶었던 저에게 제주라는 섬이 주는 어떤 제약이 있었어요. 육지에 사는 친구들에 비하면 기회가 적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는 서울로 오게 된 거예요. 꿈을 이루기 위해서.
그날을 기억해요? 꿈을 품고 서울에 온 날.
지방 사람에게 서울이라는 도시가 주는 어떤 상징 같은 게 있잖아요. 서울은 꿈의 도시란 말이에요. 이 도시에서는 다 잘될 것 같은, 그런 원대한 마음이 있어요. 누구나 다 그럴 거예요. 근데 막상 왔더니 웬걸.(웃음)
떠나봐야 아는 법이죠. 돌아보니 제주는 어떤 곳인가요?
집이죠. 우리 집요. 서울에서는 늘 혼자인데 제주에 가면 시끌시끌한 가족이 있어요. 부모님이 한적한 곳에서 살고 싶어 복잡한 서울에서 제주로 내려간 거거든요. 어릴 때는 그 마음이 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 저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서울에서 휘몰아치듯 지내다가 한 번씩 집에 내려가면 마음이 금세 편안해지거든요.
‘제주는 우리 집’이라는 표현이 신선하네요. 부럽기도 하고요.
제주도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중간중간 쉬어 갈 수 있는 쉼터가 있어요. 차를 타고 달리다가 마음에 드는 풍경이 나타나면 거기 멈춰서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는 해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순간이에요.
주조기능사 자격증 소지자로서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 베이스는 뭐예요? 그 선택이 칵테일의 맛과 향을 좌우하잖아요.
보드카요. 무색무취의 깔끔한 보드카가 좋아요. 보드카 위에 어떤 부재료와 레시피를 더하든 모나거나 튀지 않고 잘 섞이거든요. 각자가 가진 고유한 맛과 향을 상승시켜줘요.
뭐든 다 받아들이지만, 선명한 한 방이 있는 보드카와 잘 어울리는 사람처럼 보여요.
보드카처럼 깔끔하게 살고 싶어요.(웃음)
이것저것 다양한 것과 섞이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면서요. 장마가 지나면 열대야가 오겠죠. 후텁지근한 이 밤에는 뭘 마시면 좋을까요?
제가 늘 하는 주장인데 세상 최고의 칵테일은 쏘맥이라고 봅니다.(웃음) 테라스에 앉아 시원한 쏘맥 한 잔이면 더위도 싹 가시고 기분도 좋아질 거예요. 한여름 밤의 꿈처럼.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