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 박은빈
“제 삶에는 항상 어떤 이벤트가 일어나고 있는 거죠.” 새로운 작품을 앞둔 박은빈이 말했다.
촬영하자고 하면 반듯하게 서 있던 박은빈이 많이 달라졌네요? 내면의 변화가 느껴져요.
화보에서는 또 다른 모습을 끌어내니까 일탈처럼 경험해보자는 용기가 예전보다는 좀 생긴 것 같아요. 요즘 일을 연이어 하면서 느끼는 게 있거든요. 연기는 특별한 일이니까 제 삶에 항상 어떤 이벤트가 일어나고 있는 거죠. 그런데 어쩔 수 없이 거기에 익숙해지는 거예요.
요즘은 어떤 것에 익숙해요?
만약에 제가 지금 아프면 촬영 전체가 중단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요. 그런 면에서 조심하면서 살다 보니 그게 또 무료해질 때가 있더라고요. 늘 대본 외우고, 촬영하고, 또 대본 외우고, 촬영하고, 반복이에요.
오늘의 이벤트는 뭐였나요?
촬영 중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영우에서 잠깐 벗어나 영화 <마녀2> 제작 발표회에 가서 경희 얘기를 하고 온 거요. 그리고 여기 <얼루어> 화보 촬영을 하러 온 게 오늘의 이벤트예요.
지금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박은빈이에요?
경희도 아니고, 영우도 아닌 박은빈인데요.(웃음) 오늘은 저도 몰랐던 제 모습을 화보를 통해서 보게 됐는데, ‘이런 것도 잘 어울릴 수 있구나’ 하는 걸 경험해봤죠.
오늘은 이벤트가 무척 많은 날이었네요. 다시 날이 밝으면 제주로 가야 한다면서요?
어제 촬영이 생각보다 늦게 끝나 새벽 4시에 집에 왔어요. 이틀째 아예 잠을 못 잤어요. 제가 그동안 했던 대사 중에 역대급으로 대사가 많거든요. 현장은 정말 즐거워요. 역할도 재미있고 힘은 나는데, 스스로 견뎌야 할 몫이 커진 것 같아요. 대사도 남이 외워줄 수 있는 것도, 해결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마녀2>를 한다고 했을 때는 궁금하더라고요. 설마 ‘마녀’는 아니겠지 싶었죠.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종영 인터뷰 무렵에 <마녀2>를 한다는 발표가 났거든요. 다들 ‘제가 악역이다’ ‘사람을 몇은 죽이면 좋겠다’는 쪽으로 말씀하시는 걸 보면서 ‘아, 이거 어떡하지…’ 제가 당연히 새로운 도전을 했을 거라고 생각들 하신 것 같아요.
박은빈의 악역, 그러고 보니 궁금하네요.
‘선역만 하고 싶다, 악역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없어요. 살다 보면 악해질 때도, 선해질 때도 있는 거잖아요. 앞으로 지내다 보면 악역 같은 선역을 할 수도 있고, 선역인데 사실상 악역일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럼에도 <마녀2>의 역할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속 역할도 확실한 선역이죠? 모든 배우가 정의로운 역할이 어울리지는 않아요.
맞아요. 확실한 선역이죠. 근래에 반응이 좋은 작품이나 제게 들어오는 여러 작품 속 사람의 성향이 있잖아요. 정도를 걷는 캐릭터가 저한테 자주 들어오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나를 올바른 이미지로 보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도를 걷는다는 건 은빈 씨한테 어떤 의미예요?
변절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캐릭터마다 나름의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 안에서 보여드릴 수 있는 여러 면을 보여드리고 있는 것 같아 만족스러워요.
10대 때는 어떤 고민을 했어요?
와, 벌써 10여 년이 지났네요. 사실 저는 10대 때 또래보다 어른들이 더 무례하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어른들은 대체 왜 그럴까요?
이를테면 아역 배우의 삶에 대해 항상 무례한 질문을 하는 건 어른이고, 필요 이상의 걱정을 하는 것도 어른이었고요. 날벼락 같은 질문을 자주 받곤 했어요. 조심성이 없는 어른을 보면서 ‘나이를 먹는다고 다 좋은 어른이 되는 건 아니구나’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좋은 어른이 된다는 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 같아요.
맞아요. 그런 어른을 보며 ‘저런 어른은 되지 말아야지’ 하면서 스스로를 다잡았던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지금도 어린 친구들이 결코 어리지 않다고 생각해요, 각자의 나이와 각자의 세상에서 모든 걸 누리고 느끼고 있잖아요. 그래서 웬만하면 굳이 원하지 않는 조언은 하지 않으려고 해요. 저도 모르게 조언할 때도 있지만.(웃음)
인터뷰라는 건 그때의 나를 기록하는 거죠. 예전 거 본 적 있나요?
제가 기자님 이름도 선명하게 기억하잖아요? 오늘 세 번째 만남인데 전부 제가 좋아하는 작업이에요. 예전 인터뷰를 보면 저 스스로 멋진 사람 같아 보이더라고요.
다 박은빈이 한 말인데요.
그래도 정리를 잘해주시니까요. 지난 인터뷰를 불현듯 봤을 때 ‘이때 이런 생각을 했구나’ 싶었지만, 그때의 제가 지금의 저보다 훨씬 안정적이었든지 더 성숙했든지. 그런 색다른 감성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가끔 제 인터뷰를 저장해놓아요.
점점 더 유명해지고 있는 건 어때요?
그렇다고 하는데 제가 바깥 생활을 많이 안 하다 보니까 특별히 실감하는 건 없어요.
예를 들어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부쩍 는다거나, 작품에 대한 호평을 듣는 일 같은 거죠.
인스타그램은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조금 느낀 건, 선배님들이 제 작품을 재미있게 보셨다, 팬이었다면서 건네는 말씀이에요. 진심으로 여러 번 봤다고 하실 때는 같은 연기자로서 몸 둘 바를 모르겠으면서도 뿌듯하더라고요. 제가 걸어온 길에 대해 그렇게 얘기해주는 분이 늘어나는 것 같아 좋아요.
유명해지면 더 다양하고 많은 작품을 선택할 수 있잖아요?
그건 정말 감사한 일 같아요. 장르 불문, 역할 불문으로 천차만별인 작품과 캐릭터가 들어와요. 그래서 머리가 더 복잡하기도 하고요.
어떤 게 제일 복잡해요?
기회비용이라는 게 있잖아요?(웃음) 요즘은 제작 기간이 늘어나서 1년에 한 작품 하면 지나가는 것 같아요.
‘내 시간을 온전히 잘 보냈다고 생각하는 작품이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했죠.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와 <연모>는 어떤 작품으로 남았나요?
그 마음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스물아홉 살에 동갑인 송아를 만나서 제 20대를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낸 작품이었고, <연모>는 제가 감히 꿈꿔보지 못한 역할을 만나서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해볼 수 있었어요. 많이 힘들었지만 제 또래 어느 여성이 조선 시대 왕 역할을 해보겠어요? 뿌듯하고, 보람도 있었어요.
왕 역할이 여성 배우한테는 드물죠.
맞아요.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는 건 정말 희소한 가치가 있는 거죠, 최선을 다했기에 아쉬움이 없는 작품이에요. 또 새로운 작품을 만나고 또 다른 캐릭터를 만나야 하니까 그대로 다 잘 봉인해뒀어요. 캐릭터는 캐릭터대로 잘 있게 하자. 작품의 여운에 젖는 건 실제 삶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있더라고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어떤 마음으로 선택했어요?
사실 <연모>와 같은 시기에 제안받은 작품이었어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지만 제가 잘할 자신이 없는 작품이기도 했어요. 욕심은 나지만 좀 부담스러운 작품이었어요.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고 어느 하나 거슬리지 않고 잘해낼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좀 두렵더라고요. 그래서 여러 번 고사했는데, 그런 저를 기다려주셨죠. 작가님과 감독님이 저를 믿어주니까, 그 마음에 보답해야겠다 싶어서 용기를 냈어요.
용기 낸 만큼 얻고 있어요?
정말 너무 어렵게 느껴졌지만, 어느 순간 실마리가 보이고 그때부터는 술술 풀리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래서 감독님과 작가님이 내게 기대를 하셨구나 하고 스스로 느낀 적도 있어요. 저 스스로 가지고 있는 저에 대한 믿음이 있잖아요? 그 믿음을 다시 상기시켜준 부분이 있어서 그 두려움에 맞서는 용기를 내게끔 해준 작품인 것 같아요.
누구나 있잖아요, 두려움은.
천재 캐릭터는 처음인데, 영우는 자폐 스펙트럼도 지니고 있는 인물이죠. 저는 이 역할을 대할 때 정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한 것 같아요. 이상하다는 건 무엇이고, 비정상이라는 건 무엇이고 정상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정말 정상인가? 하는 생각들 있잖아요.
답도 찾았어요?
프레임 속에 가둬서 사람을 재단하지 않고, 그런 이상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특색 있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의 특성이 되는 거잖아요. 제 역할도 그렇고 이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사람이 모두 다 다채로워요. 결국에는 ‘이상함’이 아니라 ‘특성’으로 보면 각양각색의 인간 군상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우영우는 이상하지만 이상하지 않은 변호사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방금 드라마 웹사이트 전면에 있는 기획 의도를 듣는 것 같았어요. 이미 다 그려져 있네요, 드라마가.
하하! 맞아요. 저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편집본을 6부까지 얼추 본 상태예요. 그림이 있죠. 감독님도 우리가 찍은 드라마고 내가 만든 드라마지만 봐도 봐도 재미있다고 하시더라고요. 편집 기사님도 ‘이 시대의 백신 같은 드라마’라고 말씀하셨어요. 굵직한 작품을 해오신 분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행복하더라고요. 제가 대본을 보면서 느낀 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 촬영하면서 작품이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 선장이 확실한 배에 탄 것 같아 일단 항해가 즐겁습니다.
지금 새벽 2시 10분 정도 됐어요. 낮과 밤의 모습이 바뀌는 사람도 있잖아요. 어떤가요?
저는 사실 낮보다 밤을 좋아하고 밤에 좀 더 생생한데, 지금은 그만 깨어 있어도 될 것 같아요.(웃음) 그래도 제 텐션 괜찮지 않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