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 예찬 / 김신록
“인생은 미완성, 연기도 미완성.” 어느 날 툭 우리 앞에 나타난 배우 김신록은 매 순간 새로운 질문에 몰두한다.
김신록이라는 사람을 마주하면 이야기가 어디로 갈지 모르더라고요. 오늘 몇 가지 실마리만 쥐고 왔죠. 연극, 매체… 그리고 사람.
오! 좋은데요.
무대에 오래 선 당신은 영화나 드라마를 ‘매체 연기’라고 불렀죠. 이제 익숙해졌나요?
<방법>이 2020년에 나왔으니까 이제 만 2년 됐네요. 본격적으로 한 건 작년부터고요.
요즘 드라마에 진짜 많이 나오는 배우분들 말해볼게요. 이경영, 송영창, 김신록, 최대훈.
하하. 근데 저 상반기에 한 번도 안 나왔어요. <지옥> 다음에 <모범가족> 나왔고요.
그사이에 <괴물>도 있었고, 특별 출연 <당신이 소원을 말하면>도 있죠. <재벌집 막내아들>과 <스위트홈2>도 찍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다작이라고 생각 안 했어요. 다작의 조건이 남들과 다른가?
또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로 무대에 올랐고요. 원작 소설이 유명한 작품이죠.
맞아요. 영화 찍을 때 구해서 봤는데, 진짜 잘 쓴 소설이죠. 한두 시간 안에 내용을 보여야 하니까 아무래도 소설이 가진 형식적인 미학을 많이 내보이지 못했는데, 연기적으로, 연극적으로 보완하려고 시도했어요.
지금까지는 남자 배우들만 선 작품이에요. 어떻게 출연하게 되었나요?
소설을 읽었을 때 팬데믹 이후 세상을 탐색하기에 적합한 작품이라고 여겨서 혼자 이 작업을 좀 해보고 싶었어요. 제가 ‘스페이스 바터 프로젝트’를 했거든요. 앞으로도 해보고 싶은데, 공간을 빌려서 그냥 내 작업을 하는 거예요. 작품으로 오픈하지 않고 그냥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 희곡을 좀 받아보고 싶어 손상규 배우한테 연락했더니, 제작자 쪽에서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하더라고요. 의도치 않게 잘 만나게 된 거죠.
1인극 형식은 특히 체력 소모가 어마어마하지 않나요?
그러니까요. 극장이 너무 큰 거예요. 300석이 넘고 열린 구조라 소리 쓰기가 힘들고 체력 소모도 컸어요. 이런 무대에 올라가면 기본적으로 누군가가 절실하게 주장하는 형국을 띨 수밖에 없는데, 사실 이 작품은 그런 작품이 아닌 것 같았어요.
어떤 작품인가요?
사유하고, 관조하고, 관찰하고 같이 경험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공연이라는 필연적으로 구성적인 형식 자체를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 많았어요. 공연이 가진 필수 요건을 어떻게 재고할 수 있을까? 거기서 남는 코어는 무엇인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어요.
다시 본질을 생각하는군요. 배우의 고민을 넘어서, 연출자로서의 고민까지 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제 작품을 만들기도 했어요. 연출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아서 크레딧에 ‘구성, 실연’이라고 표기했어요. 구성, 스스로 탐구하고 싶은 주제가 있을 때 그걸 구성해서 제 몸으로 실연하는 일을 했는데, 이제 구성 너머를 탐색하려니까 그 말도 못 쓰겠네요.
연출자분들은 그런 김신록과 하는 게 좋으면서도 부담스러울 거 같은데요?
그럴 거 같아요. ‘나랑 해주는 연출이 참 고맙다, 참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싶어요. 해주는 것만으로도 좋죠.
무대에 다시 오르니 어땠나요?
누가 “연극을 계속하시네요?”라고 하더라고요. 연극을 안 한다면 그게 저한테는 이슈지, 계속하는 건 디폴트값인 것 같아요. 좋은 작품을 하고 싶어요. 연극은 아무래도 탐구하고 싶은 걸 좀 더 깊이 탐구할 수 있으니까요.
연기와 탐구가 떨어질 수 없네요.
탐구를 안 하면 연기를 못한다는 건 아니고, 내가 연기하는 이유를 생각하는 거죠.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계속 탐색하는 것. 그 해석을 배우의 몸으로 드러내는 일이 연기라고 생각하니까요. 요즘에는 탐구 대신 탐색이라는 말을 쓰려고 해요. 한 끗 차이지만 언어가 혁명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식에 따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혹은 세계 자체가 달라진다고 생각하거든요.
인터뷰는 대화고 구술이고 찰나죠. 나중에 정리된 원고를 봤을 때 이게 아니다 싶을 때도 많을 텐데요?
많아요.(웃음) 요즘은 또 그런 생각도 드는 거예요. 발신인과 수신인 사이에 오해가 없을 수 없다. 이렇게 나도 발신하는 양이 많고, 수신자도 정말 많아졌기 때문에 이게 다채롭게 해석되는 건 정말 당연하죠. 제대로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있죠. 적어도 오기나 오독은 없으면 좋겠다. 잘못 표현되는 단어 같은 거 있잖아요.
하하. 있죠. 그렇게 들리고, 또 뜻도 이어지는 단어들. 요즘엔 뭘 탐색하고 있어요?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덕분에 좋은 사유를 많이 접했고요. 그 사유가 생태철학과 맞닿아 있어 기쁜 마음으로 책도 읽고 생각도 하며 지내요.
배우 4명이 돌아가면서 무대에 올랐지만, 서로 작품에 대한 해석이 다를 수 있잖아요?
아주 달라요. 본질적인 해석이 다르고, 그러니까 작품이 너무 다른 거죠. 그게 재미있는 관전 포인트죠.
김신록의 해석은 뭐였나요?
어떻게 더 많은 행위자가 내 연기에 영향을 미치도록 할까? 1인극으로 여러 인물을 해야 하는 것 자체가 여러 행위자들이 내 안을, 나를 관통하는 일이죠. 더 많은 행위자가 의도치 않게 계속 끼여들어서 어떤 기습적인 놀라움의 순간을 만들어내는 얘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바로 생명의 방식이니까. 근데 이 사유는 다 생태철학에서 온 사유와 맞닿아 있어요. 특히 ‘알지 못한 채 알아가기’는 이 작품을 알아가는 근본적인 태도가 됐어요. 홍보 문구에는 1인 16역이라고 되어 있는데, 어떤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약간의 어떤 폭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 사건이나 타인의 삶을 재현하는 일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려고 하나요?
내가 누구를 안다, 내가 그 사람을 해보겠다는 것이 사실 오만함이죠. 그 사람을 알아가는 방식으로밖에 접근할 수 없는데, 그러니까 그것의 전제는 ‘나는 그 인물을 알 수 없다’인 것 같아요. 근데 또 알 수 없다고 해버리면 무기력하고 인물에게 다가가려는 힘이 좀 부족하잖아요. 하지만 내가 열심히 알아보려고 하는 거죠.
다시 탐색으로 돌아가네요. 사실 인터뷰도 마찬가지죠. 세상의 눈으로 제가 지금 김신록이라는 배우를 탐색 중인 겁니다. 세상도 당신을 탐색하는지도 모르고요.
맞아요. 하하. 제가 요새 감독님들과 미팅하면서 자주 듣는 말이 남자 배우와 힘겨루기가 되는 그런 여배우가 필요해서 모셨다는 말이거든요.
그 자체는 좋은 말이네요.
근데 연기에 대해서는 이 인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면 좋겠다고 해요. 요즘은 여성 캐릭터의 존재감은 있되, 남성 서사가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여성이 어사무사하는 느낌만 내는 게 아니라 인물의 직업이나 지위에 걸맞은 진짜 힘도 갖고 일도 제대로 하고 극적 행동도 좀 하고 그러면 좋겠어요.
연극은 모든 것을 고민할 수 있는데, 드라마는 시놉시스와 대본 일부만 보고 결정하죠.
아주 다른 마인드죠. 정보가 부족한 상태로 찍지만, 그게 불편하지는 않아요. 이 작품은 이미지의 나열로 후반 작업에서 맥락이 만들어지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내가 할 일은 열린 이미지를 제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연극과는 아주 다른 방식의 작업인데, 해보는 거죠.
매체 2년 만에 연기상을 탄 건 어떤가요?
그냥 연기하다가 어느 때쯤, 이 세월쯤에 크게 칭찬받았다. 마흔인데 그렇게 크게 칭찬받으니까 기운이 나고 기분이 좋죠. 최근에 팬분들이 선물을 해주시는데, 제가 드릴 게 없는데 이런 걸 받는 게 부담스럽다고 했더니 왜 해주는 게 없느냐, 나는 당신의 연기를 보고 삶의 힘을 얻는다고 하시더라고요. 아, 그래! 사실 연기하는 일이 누군가의 삶에 어떤 것을 줄 수 있는 일이지 싶었어요. 즐거움이든 위안이든 어떤 용기든.
역술가가 그랬다면서요. 김신록은 재간둥이다. 딱 그런 느낌이죠.
세상아 알아라! 내가 재간둥이라는 것을!(웃음) 여러 경험을 하니까 그에 맞는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어요. 오늘도 사진 찍는다고 경락 받고 왔잖아요. 떡볶이 조금만 먹었고. 시간과 정신을 어딘가에 쓰면 그 부분이 빛이 나는 것 같아요. 지성에 쏟으면 지성이 빛이 나고 근육에 쏟으면 근육이 빛이 나고요. 얼굴에 쏟으니까 얼굴이 빛이 나는 거죠. 요새 피부과도 다녀요. 피부가 안 좋으면 분장할 때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고요.
하하, 모두의 수고를 덜어주겠다?
<괴물>에 운전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장롱면허라 대역이 와야 했어요. 이것도 안 되겠다 싶어 도로 연수 받아서 <모범가족> 촬영 때는 제가 했어요. 그래야 전체가 잘 굴러가고, 나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으니까요. 빨리빨리 합시다 이런 거죠.(웃음)
무당, 미혼모, 경찰에 이어 <재벌집 막내아들>에선 재벌이 됐는데, 또 뭘 준비했어요?
처음으로 개인 스타일리스트와 일했어요. <괴물> <지옥> <모범가족>까지는 없었거든요. 같은 옷 입고 있었죠.
얼마 전 생애 첫 상업광고도 찍었다면서요?
자동차 광고를 찍었어요. 타깃이 40대에 성공한 여성이에요. 멘트가 ‘새로운 럭셔리를 경험하다’였거든요? 제가 진심으로 흐뭇한 표정인 거예요. 럭셔리라는 건 물건이 아니고 경험이다 하는 메시지인데, 뭔가를 새롭게 경험해가는 제가 거기 있으니까 말이 된다고 느껴졌어요.
어제가 서울에서의 연극은 마지막이었죠? 마음이 어떤가요?
대전 공연이 한 번 남았어요. 그래서 반만 끝난 마음이죠. 그 한 번을 위해서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어요.
그다음에는 쭉쭉 나오겠네요, 작품이.
빨리 보고 싶어요. 상반기에는 좀 심심했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