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국면 / 최대훈

익숙하고 낯선 최대훈이 스며들 듯 깊숙이 우리 곁을 잠식하는 순간. 

셔츠는 Agr.

재킷은 모스키노(Moschino). 쇼츠는 아미리(Amiri). 양말, 신발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재킷은 드리스 반 노튼(Dries Van Noten). 선글라스는 미우미우 바이 룩소티카(Miu Miu by Luxottica).

촬영 소품으로 거꾸리 운동기구를 준비하려다 참았어요.
누가 봐도 딱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떠올리기는 했겠네요.(웃음) 저도 스튜디오 벽에 물구나무서는 포즈를 취하면 어떨까 싶었는데 참았어요. 되게 멀쩡한 표정으로 그렇게 있으면 꽤 웃길 것 같더라고요.

둘 다 잘 참았네요. 첫 화보인가요?
인생 첫 화보입니다. 기약이나 귀띔 없이 굉장히 갑작스럽게 찾아든, 사건 같은 순간이라고 생각했어요. ‘진짜 내가 맞나?’ 설렘이라고 해야 할까, 낯섦이라고 해야 할까 아직 적절한 표현을 찾지는 못했는데, 그 비슷한 질감의 감정이에요. 재미있었어요. 걱정보다, 우려보다.

살다 보면 들이닥치는 갑작스러운 순간이 있죠. 어때요?
내년이면 마흔넷이거든요. 생각해보면 인생 대부분을 걱정과 염려 속에 산 것 같아요. 분명한 대안이나 해법이 없으면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삶의 태도로. 아무튼 오늘 같은 순간은 뭐랄까, 그냥 반가웠어요. 뉴웨이브처럼. 모처럼 불어온 낯설고 갑작스러운 바람 덕분에 몸에 긴장감도 생기고요. 저 계속 이렇게 눈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니까요.(웃음) 그런 생기가 좋았어요.

그래서 자꾸 인공 눈물을 찾았군요. 낯선 바람에 몸을 맡기려는 게 느껴졌어요.
믿음이 있었어요. 적어도 나를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만들진 않을 거라는 믿음요. 그리고 배우가 현장에 왔으면 할 수 있는 한 모든 걸 해야죠. 어느 현장에 가든 같아요. 뒤에 가서 욕을 할지언정.

배우는 그래요? 작년에 만난 고두심 배우가 그랬거든요. 한번 딱 믿고 가기로 했으면 끝이다. 더 말 안 한다. 집에 가면서 ‘시발 시발’ 욕지거리는 할 수 있지만.
하하. 저는 그냥 농담한 건데 그 말이 맞네요. 그럴 마음이 없었다면 애초에 거절하거나, 여기 오지 않았을 거예요. 그게 맞다고 생각해요.

이런 질문은 어때요? 최대훈이라는 이름 석 자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큼일까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장승준, <모범형사2>의 천상우, <인사이더>의 노승환, <괴물>의 박정제, <헤어질 결심>의 수면클리닉 의사라고 말하면 다들 알아보고 반가워하지만, 최대훈이라는 제 이름은 아직 생소하죠. 그게 사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아직 한참 멀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서 있는 지점을 정확히 알고 있어요. 그냥 하는 말 아니고요. 사람들에게 딱 각인되지 않은 제 이미지, 저는 좋아요.

아는데 모르는 사람 같고,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러다가 무릎을 치는 사람들의 반응이 흥미롭다고 생각했어요.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 제가 지향하는 지점입니다. “거기 나온 그 인물이 너라고?” 이런 말을 자주 듣는데, 저는 서운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요. 매번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거니까요.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야 한다는 딜레마는 없나요?
그러게, 그게 참 모순이죠. 제가 하는 일은 잠깐만 스쳐도 사람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길 수 있어야 하는데, 저는 그걸 바라지 않으니까요. 저는 제 일을 인생의 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길게 봐요. 한순간에 끓어올랐다가 쉽게 사라지거나 질리는 것보다 늘 낯설어 보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요.

주로 강렬한 역할을 맡아왔으니 인상에 남을 법도 한데 참 신기하죠.
저라는 사람 자체가 그렇게 진한 사람은 아닌가 봐요. 잠깐 스쳐도 선명하게 남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 사람이 아닌 거죠. 타고난 모습도 그렇고, 배우라는 상품으로 봐도 그런 성향인 것 같아요. 그게 더 잘 맞고 또 지향하다 보니 그렇게 흘러가는 거 아닐까요?

출연작을 다 프린트해왔어요. 2002년 데뷔 후 주로 연극과 뮤지컬을 하다가 2017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다양한 작품의 조연을 맡아왔네요.
모두 사실입니다. 시작은 공연이었죠. 연극이나 뮤지컬. 그때만 해도 제가 드라마를 할 줄은 몰랐고, 여전히 어떤 의구심이 조금은 남아 있는 편이에요.

어떤 의구심인가요?
제 얼굴도 그렇고 목소리도 그렇고 드라마라는 매체에 적합하지 않은 배우라고 스스로 선을 그은 것 같아요. 자신감이 없었던 거죠. 공연이나 영화에 비해 충분히 토론하고 연습하고 고민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여건도 그렇고요. 드라마 현장에선 매 순간 빠르게 번뜩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매사에 좀 느린 사람이에요. 예열되기까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해요. 그렇게 선을 그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웃음)

재킷은 렉토(Recto). 티셔츠는 보터(Botter). 스커트는 라프 시몬스(Raf Simons). 모자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셔츠는 더블렛(Doublet). 팬츠는 와이 프로젝트 (Y/Project).

지금은 어때요?
어느 정도 순응하면서 진화한 것 같아요. 원래 추위에 취약한 사람이었다면 이젠 웬만한 추위에는 내성이 생겼다고 해야 할까. 추운 건 여전히 매한가지지만 버틸 힘과 요령이 생긴 거죠. 시대도 많이 변한 것 같고요. 제 얼굴요.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정석만이 정답인 세상은 아니라고 봐요. 그런 변화를 말하는 건가요?
맞아요. 사람들이 이제 전형적인 정답에서 조금씩 벗어난 것을 즐기는 걸 피부로 느껴요. 그러니 저 같은 사람이 계속 일할 수 있는 거겠죠. 그런 시대라면 계속 이 자리에 서 있어도 되겠다는 확신을 갖게 됐어요. 나이 들고 철들면서 배운 건데,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드러내고 보여주는 게 중요해요. 어차피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더라고요. 내가 필요한 곳, 나를 불러주는 곳에 가서 최선을 다하면 그뿐.

그렇게 새로 시작하는 <천원짜리 변호사>를 통해 비로소 주연배우로 등극하셨습니다.
하하. 저를 주연으로 분류하던가요? 잘 모르겠네요. 우선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할게요. 들어보고 인터뷰에 쓸 수 있을지 없을지 결정해주세요.

좋습니다. 얼마든지.
<천원짜리 변호사> 포스터에 제가 나오거든요. 포스터 사진을 찍었어요. 공연 포스터는 몇 번 찍은 적이 있는데, 드라마 포스터는 살면서 처음이에요. 지금 진행 중인 작품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도 포스터를 찍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자랑하는 건가요?
저는 그게 참 이상하더라고요. 안 그래요? 우선 제가 포스터에 등장하는 게 어떤 효과가 있는 걸까요? 그런 의문이 강하게 들어요. 주연배우라는 표현도 좀 어색하고요. 내가 주연이 맞는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또 주연과 조연을 나누는 기준이 뭔지 요즘 혼자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가볍게 축하 인사를 건넨 건데, 예상 밖의 의문이 마구 쏟아지네요.
주연이니 조연이니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서 더 그런가 봐요. 오래전 인터뷰에서 한 말인데, 저는 굉장히 파워풀한 조력자가 되고 싶어요. 그게 제 목표예요. 지금도 같아요.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거나 겸손을 떨거나 배포가 없어서 이러는 거 아니고요. 스스로를 잘 알아서 그래요. 당연히 너무 좋죠. 좋습니다. <천원짜리 변호사>는 제 인생에 의미 있는 작품으로 남을 거예요. 즐겁고 행복하게 촬영하고 있고요. 근데 저는 주연과 조연을 나누고 뭐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구분하거나 계산하고 싶지 않아요.

지난 인터뷰가 나와서 그런데, 텍스트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더군요.
작품에 임할 때 각자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있을 텐데, 저는 텍스트를 중요하게 봐요. 대본을 말하는 거예요. 연기자는 대본에 적힌 이야기를 표현하는 사람이잖아요. 대본이 재미있지 않으면, 좋지 않으면 배우가 작품 안에 살아 있는 건 불가능하다고 믿어요. 그런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게 텍스트예요.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저는 특히 좋은 글을 쓰는 분을 정말 존경해요.

이야기의 힘을 믿는군요. 뭘 보나요?
진부한 표현은 하기 싫은데 잠깐 생각해도 될까요? 근데 진부한 표현밖에 생각이 안 나네요.(웃음)

가장 단순한 표현이 핵심을 꿰뚫는 법이죠.
요즘 읽고 있는 대본이 있어요. 그걸 예로 들게요. 그 글을 읽으면 “그래 맞아!” 하면서 무릎을 쳐요. 이런 순간에는 이렇게 말해야지. 간지러운 데를 이렇게 긁어주는 대본인데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너무 신나요. 제가 한번 이렇게 열거해볼게요. 마음에 드는 말을 채택해주세요. 진짜 우리네 말, 살아 있는 말, 진짜 같은 말이 잔뜩이에요. 종이에 누워 있는 활자인데 막 살아서 움직여요. 너무 재밌어서 페이지가 빨리 넘어가는데, 순간 멈칫하게 해요. 그 말을 곱씹게 해요. 주연, 조연 상관없이 인물 모두 생생하게 살아 있고요.

여러모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 것처럼 느껴지네요. 에너지가 그래요.
그 말이 진심이라면 오늘 밤만큼은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겠습니다. 저는 늘 이렇게 가라앉아 있고 싶어요. 들떠서 좋은 건 없는 것 같아서요. 다만 감사한 일이죠. 오디션 보러 다니는 걸 그렇게 힘들어했는데,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요. 진짜 감사한 일이에요..

새 작품이 나오고 오디션을 보지 않아도 되고 새로운 대본을 읽고 있군요. 그다음엔 선택권이라는 또 다른 국면을 만날 테죠.
그 요술봉을 간절히 원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절실하게요. 아직은 아닌 것 같아요. 더 노력하고 공부해야죠. 그 무게를 견딜 수 있을 때 꼭 한번 잡아보고 싶어요. 진짜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날이 오면 어떤 선택을 할 작정인가요?
잘 모르겠어요. 그런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어요.(웃음) 저는 아주 천천히 잠식하는 스타일이지, 한 번에 훅 들이쳐서 끄집어내는 성격이 아니에요. “어, 뭐야? 여기가 언제 이렇게 축축하게 다 젖었지?” 스며들 듯하는 게 더 잘 맞아요. 재밌잖아요. 그게 제 방식이에요.

    에디터
    최지웅
    포토그래퍼
    PAK BAE
    스타일리스트
    이종현
    헤어&메이크업
    박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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