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E I AM / 김히어라

지금을 좀 더 즐기고 싶다고 말할 때에는 <더 글로리>의 사라는 어디 가고 없었다. 

레더 셔츠는 로에베(Loewe).

드레스는 보테가베네타 (Bottega Veneta).

톱은 알라이아 (Alaia). 모자는 큐밀리너리 (Q Millinery).

보디슈트와 팬츠, 장갑은 모두 알라이아.

헤어스타일을 보는 순간 <더 글로리>의 사라를 잊게 되네요. 한창 촬영 중인 <경이로운 소문2>를 위한 스타일인 거죠?
맞아요. 아직 공개할 수는 없지만 악귀예요.(웃음) 요즘은 헤어 하는 데에 시간이 5분도 안 걸려요. 매번 탈색해야 하는 일이 어렵기는 하지만요.

새로운 캐릭터가 나오면 거짓말처럼 다른 모습이 돼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도 <진검승부>도 그랬죠. 사라와 계향심과 킬러가 같은 배우라니.
그렇게 봐주시면 정말 감사해요. 변신하는 걸 좋아하는 거 같아요. 노력도 하고요.

또 보면 어느 것도 쉬운 역할은 없거든요?
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감사하게도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공연 쪽에서는 제게 다양한 얼굴이 있다는 얘기를 해주셨는데, 그래서 저도 도전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다가도 ‘으악, 내가 왜 했지? 미쳤다’ 할 때도 있고요. 그렇지만 항상 신이 나서 해요.

어떤 역할이 가장 어려웠어요?
<배드 앤 크레이지>를 찍을 때 계향심 역으로 오디션을 봤어요. 평소 모습이나 사람들과 나누는 가치관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편이거든요. 그렇다 보니 연출 감독님들이 주로 진취적이고 주체적인 역할을 제안해주시곤 했어요. 오히려 계향심처럼 감정을 이야기하는 캐릭터는 거의 없었어요. 지금까지 맡아온 역할이랑 제일 달라서 좋았던 것도 계향심이에요, 반면, 사라는 자신 있었던 것 같아요.

관계자들이 김히어라의 눈에 사라가 박혀 있다고 했다면서요?
오디션 볼 무렵은 제가 매체 연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어요. 나중에 캐스팅되고 김은숙 작가님이 오셔서 “이거 너무너무 칭찬인데, 내가 생각한 사라의 눈이야’라고 하시더라고요. 궁금한 게 너무 많을 때라 저도 많은 걸 여쭤봤죠.

뭘 물었어요?
“극 중의 저는 약을 한 상태인데 어느 정도 취해 있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했더니, “그냥 너대로 해주면 돼. 하고 싶은 거 다 해”라고 하셨어요. 옆에서 감독님도 이 말은 너무 칭찬이라고 하시고요. 배우들이 현장에서 칭찬받는 경우가 드물거든요. 현장에서 “오케이할게요” 하고 넘어가면, 배우들은 고민해요. 진짜 오케이인가, 나한테 더 이상 나올 게 없어서 그런 건가? 그런데 <더 글로리>는 모든 분들이 할 때마다 정말 재미있어하셨어요.

요즘 유행하는 말 있잖아요. 맑은 눈의 광인. 사라도 그런 캐릭터죠.
그래서 서로 점점 더 또라이처럼 하려고 했어요. <더 글로리> 배우끼리도 “내가 오늘 더 ‘또라이’가 돼야 할 텐데” 하고요.(웃음) 옷을 마음대로 입는 것도 너무 좋았어요. 사라의 자유로운 느낌이 좋아서 속옷을 거의 안 입었어요. 대부분 패치만 붙이고 ‘노브라’로 촬영했거든요. 스카프를 톱처럼 두르고 나온 신도 패치만 붙인 건데, 많은 사람이 ‘너 정말 그렇게 나와도 괜찮니’ 하더라고요.

하지만 샤넬 백은 그만 빼앗겨버렸네요.
작가님 개인 소장품이에요.(웃음) 사실 저는 브랜드 잘 몰라요. 비싼 거 입혀줘도 그게 좋은 건지 모르고 맨날 물감 묻히거나 누워 있었죠. 한번은 주영(차주영)이가 그 옷 어디 거냐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끼리 “진짜 혜정이다!”라고 했어요.

그림 그리는 장면은 어땠어요? 사라에게 중요한 장면 같거든요.
실제로 그림 그리는 게 취미인데, 오디션 볼 때 전시 중이었어요. 오디션을 봤을 때는 사라 역할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주어진 대사를 했죠. 두 번째 부르셨을 때 마지막에 그림을 그린다는 말씀을 드렸어요.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제 그림에는 십자가와 여성의 누드, 돈, 담배, 술 같은 게 매번 나와요. 제 그림으로 만든MD를 보여드리고 퇴장했는데, 바로 그날 퀵으로 대본을 받았어요. 너무 행복했어요. 저 울었잖아요. 내가 됐다니!

그렇게 사라가 시작됐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 역할 때문에 저를 다그치지 않으신 거 같아요. 오히려 계산적으로 잘하려고 했다면 사라답지 않았을 것 같아요. 평소에 사라처럼 늘어져 있어도, 그런 모습을 귀여워해주셨어요. 자유로운 마음으로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어요.

오랫동안 무대에서 연기를 하다 ‘매체 연기’를 해보니 어때요?
저는 너무 재미있어요. 10년 전만 해도 공연하는 사람의 연기는 과하다고들 했는데, 요즘은 오히려 에너지를 좀 더 내달라고 할 때도 있어요. 때로는 매체가 더 자유로운 것 같기도 해요. 공연은 약속의 예술이기에 조명, 자리, 넘버, 노래 들어가는 순간 모든 게 다 똑같아야 하고 더 엄격해요. 반면 매체에선 NG가 나더라도 애드리브도 한번 해볼 수 있죠. 제가 운이 좀 좋은 거 같아요. 안길호 감독님도 그렇고, <배드 앤 크레이지> 유선동 감독님, <괴물> 심나연 감독님도 저한테 맡겨주셨거든요. 저는 공연을 할 때에도 최선을 다해서 털어내면 미련이 남지 않더라고요. 공연은 여러 번 재연되지만 오히려 ‘그때 그 에너지로 다시 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어요. 그런 면에서 단 한번 할 수 있는 매체와 잘 맞는 것도 같아요.

레더 트렌치코트는 아미(Ami).

톱은 엔폴드(Enfold).

레더 트렌치코트는 아미. 슬리퍼는 돌체앤가바나 (Dolce & Gabbana).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 역할이 있어요?
한국적인 캐릭터를 해보고 싶어요. 사극도 좋고, 역사 속의 여성 역할도요. 제 자유로움을 모두 뺀 그런 역할이죠. 김혜수 선배님 광팬인데, <슈룹> 보면서 내내 감탄했거든요. 조바심 내지 않고 다양하게 하고 싶어요. 저는 늘 ‘좀 더 즐기고 싶다’고 해요 내가 지금 갑자기 주인공 되면 뭐 해요. 조연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다양한 캐릭터가 있는데. 이것저것 다 해보고 싶으니까요.

그래서 카페도 하는 거예요? 카페가 강남에 있었다면 오늘 촬영장에 스무 잔 사 왔을 텐데요. 대학로에 있죠?
아쉽다!(웃음) 하고 싶은 건 무조건 하는 편이에요. 원래 카페를 하고 싶었다기보다는 몽마르트르의 카페처럼 예술과 관련된 복합문화 공간을 만드는 게 꿈이었어요. 배우들도 카페에서 일하며 재충전할 수 있고요. 소소한 추억을 남기려고 해요.

하고 싶은 거 다 해야 되는 사람이군요. 또 어떤 뜬금없는 일을 했어요?
많죠. 진짜 뻘짓들.(웃음)

그 많은 일의 시작은 뭐였어요?
옷 장사였어요. 그때 배우로서 진짜 많이 성장했어요. 20대 중반에 학전에서 공연을 할 무렵에, 언니가 아기를 가졌어요. 그때는 한 달에 100만원도 못 벌 때가 많았죠. 조카에게 옷이라도 맘껏 사주고 싶은데 창피한 이모가 되기는 싫고, 돈 벌 수 있는 게 없나 고민하다가 아동복을 팔았어요. 그러면서 돈을 좀 벌었어요.

왠지 뭘 해도 손해는 안 볼 거 같네요.
그렇더라고요. 나중에 재고를 털려고 플리마켓도 했는데, 정말 잘 팔았어요. 동묘에 빈티지까지 채워서 갔거든요. 나중에는 입고 있던 옷도 팔았어요. 하하.

그런 경험이 배우로서 기반이 되었다니 재미있네요. 현실이 단단해야 연기도 잘되나요?
맞아요. 무엇이든 성취감을 느끼고, 내가 뭐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 게 연기에도 필요한 것 같아요. 공연만 할 때는 저 혼자 작품 보고, 계약하고 의상팀과 분장팀이랑 얘기하고 인터뷰도 혼자 했는데, 지금은 매니저나 스타일리스트, 홍보팀이 해주는 게 신기해요. 그러면서도 제가 해보고 미리 겪었으니까 과정이 이해되고요. 하느님이 이래서 내게 그런 시련을 주셨나? 오케이요~!

이렇게 쿨한 사람이 그렇게 센 대사를 했군요? “XXX에 국영수 좀 채웠다고 XXX이 됐네?”
저도 그 대사 참 좋아했습니다. 정확히 기억하시네요.(웃음)

세 번 정주행했거든요.
저는 한 번 봤어요. 배우들은 그럴걸요? 부족한 점밖에 안 보이니까 못 보겠어요.

잘했다 하는 것도 있죠?
그런 부분도 있죠. 그런데 아쉬운 것만 생각나요. 제가 원래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연습을 꽤 했어요. 열심히 잘 피웠다고 생각했는데 겉으로 피운 것만 나왔더라고요. 사람들이 욕 어떻게 어디서 연습했느냐고 많이 묻는데, 자세나 포즈, 나른함이 저와 잘 맞아서 잘한 것처럼 보인 거 같아요.

아직도 시즌2 한 달이나 남았네요. 이건 고문 아닌가요?
그렇게 말씀해주실 때 정말 짜릿해요! 보시는 분들은 더 재미있으실 거예요.

<더 글로리>의 배우들과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
진짜 친해졌어요. 3일 전에 만났는데, 다들 성격이 쿨해서 그 뒤로 아무도 연락 없거든요. 그러다 갑자기 오늘 볼 사람? 우리 집으로 와! 하면 다 모여요. 임지연네 집이나 저희 집에서 자주 봐요. 이 친구들과 연기나 작품 이야기를 많이 나눠요. 역시 전 운이 좋은 것 같아요.

사주 같은 거 본 적 있어요? 뭐라고 하던가요?
예전에 20대 후반에 한 번 본 적 있는데, 그때 그랬어요. “서른둘셋이면 TV만 켜도 다 네가 나올 텐데 뭔 걱정이야? 그냥 하던 대로 열심히 살아.” 정작 저는 잊고 있었는데 얼마 전 같이 갔던 친구가 말해주더라고요. 너 지금 서른셋이네!

더 바라는 건 없어요?
오랫동안 좋은 작품 하면서 가늘고 길게 가고 싶어요. 안 보이면 ‘왜 안 보이지? 보고 싶다’는 느낌을 주는 배우면 돼요.

에디터
혀윤선
포토그래퍼
KIM YEONG JUN
스타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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