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HER NEXT STEP / 청하
지난 7년간 청하는 하얗게 불태웠다. 무대는 막을 내렸고, 이제 곧 2부의 새로운 막이 오른다.
1월 1일에는 계획을 세우는 편인가요?
보통은 느지막이 일어나 떡국을 먹고 ‘새해가 왔나?’ 하며 아리송하게 보냈는데, 2024년은 좀 다를 것 같아요. 일출을 보러 갈 거예요. 오후에는 옥주현 선배님께 초대를 받아 뮤지컬 <레베카>를 보러 가게 됐어요.
활기찬 시작이 될 것 같네요. 2023년 많은 변화가 있었죠?
내외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어요. 새로운 소속사를 만났고, 10월부터는 라디오 <볼륨을 높여요>를 시작했어요. 매일 방송되다 보니 약속을 잡기 쉽지 않더라고요. 잠을 줄여가면서 친구도 만나고 컴백 준비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어요.
라디오는 오랜만이죠? 2019년 EBS <경청>의 호스트를 마지막으로.
오, <경청>을 아시다뇨! 그때는 일주일에 한 번만 방송했어요. 매일 하는 건 또 다르더라고요. ‘경력직’이라고 불러주시기는 하지만 단련할 것이 천지예요. ‘별디’라는 애칭을 붙여주셨는데, 요즘 ‘더디’에 가까워요. 말을 하도 더듬어서요.(웃음)
어떤 점이 끌렸어요?
팬들과 떨어졌던 1년의 시간을 압축해 채워드리고 싶었어요. 실시간으로 반응하고 소통하는 순발력, 정확한 발음, 진행 능력도 훗날 도움이 될 것 같았고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정말 의외의 수확이 더 많더라고요.
오랜 팬들도 ‘새로운 청하를 알게 되는 것 같다’는 반응이 많아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DJ에 도전하면서 저를 드러내는 일이 두렵기도 했거든요. 사실 지난 7년간 활동하며 나를 드러내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늘 숨고 도망치려 했어요. 대중이 바라는 연예인 청하에 대한 기대를 인간 청하는 채워줄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그렇게 살았는데, 어느 순간 뿌연 안개 속에 갇혀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 안개를 걷어내야겠다는 결심이 선 건 언제였어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움에 파묻혔고, 어느 순간 숨 쉴 구멍이 없더라고요. 10대 때부터 가수라는 목표를 향해 견디고 참았는데, 반짝이기 위해 자꾸 움츠러드는 삶이 힘들었어요. 팬데믹이 시작되고 무대가 줄어들면서 스멀스멀 허탈감이 엄습한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살기 위해 인정했죠. 이렇게 괴로우려고 열심히 했던 게 아니니까요. 나보다 훨씬 반짝이는 별이 많고 보통의 별이 되어도 충분히 반짝일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어요. 저를 꽁꽁 숨기면 슈퍼스타가 될 줄 알았나 봐요.(웃음)
가요계 디바 계보에 청하가 빠질 수 없죠. 이 정도면 슈퍼스타 아닌가요?
에이, 지금 대화 나눠보면 아시겠지만 저 되게 평범해요. 진짜 아무것도 없어요. 인터뷰할 때도 늘 ‘어떻게 답해야 하지?’ 고민한 것 같아요. 예능에 나가서도‘못할 것 같아요’라는 말을 많이 했어요. 자꾸 빼고 거절하니까 오해도 많이 받았고요.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반성하고 이제 그만 걷어치우자고 다짐했어요. 나는 나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어쩔 수 없다.
지금 마음은 어때요?
가수로서 활동은 없었지만 1년간 치열하게 답을 찾은 것 같아 후련해요. 이제는 건강하게 불타는 방법을 알아요. 스스로 재가 되는 줄도 모르고 불타올랐다면 이제는 켤 때와 끌 때를 알게 된 것 같아요. 감정의 파도에서 넘어지지 않고 서핑하는 방법도 배웠어요.
지난 7년이 이미지였다면 이제는 실체가 드러나겠네요. 기대되는 걸요?
그런데 여기서 정말 웃긴 건,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이미지를 저조차 몰랐다는 거예요. 가비 언니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대중 가수다 보니 선택에 있어 제가 끌리는 것, 하고 싶은 것이 끼어들 틈이 없었거든요. 신인 때는 잘되기 위해서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기도 했고요.
깨달음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가수가 아닌 다른 미래를 그리기도 했죠?
대학을 못 다녀봤으니 대학 진학을 준비할까도 고민하고 심리학도 공부해보고 싶었어요. 친척 언니가 미국에 살고 있는데 가서 영어와 스페인어를 배울까도 생각했어요. 내가 이걸 왜 하고 싶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언젠가 해외 투어를 한다면 내 입으로 소통하고 싶어서더라고요. 그게 욕구의 뿌리더라고요.
기승전 ‘가수’였네요. 결국.
맞아요. 골똘히 이런 고민을 해보니 ‘나 아직 하고 싶구나’ ‘찾아줄 때 돌아가자’ 생각하게 됐어요. 스스로 도망은 못 가겠고 언젠가 문이 서서히 닫히는 게 보일 때 잘 걸어 잠그자고 결론 내렸어요. 언젠가는 이 직업을 내려놓아야 하는 시점이 오잖아요. 한편으로는 속상하고 슬퍼요. 잘 끝내기 위해서 더 열심히 하려는 거니까.
졸업한다고 생각하면 되죠. 가수로서 어떤 모습을 더 보여주고 싶어요?
정규 앨범 <Bare & Rare> 파트 1로 내고, 아직 파트 2를 공개하지 못했어요. 얼른 팬분들께 보여드리고 싶고, 뭐든 제가 좋으면 무작정 뛰어들고 싶어요.
이제는 어떤 일이 닥쳐도 용감하게 이겨낼 것 같아요.
예전에 승마를 하다 크게 낙마한 적이 있어요. 흙도 아니고 콘크리트에 떨어져 주변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랐어요. 너무 아픈 와중에 순간 웃음이 빵! 터졌어요. 이상하게 통쾌하더라고요. 왠지 모르게 개운하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말을 타면서 늘 한 번쯤 떨어질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프게 떨어져 보니 두 번째 떨어질 때는 괜찮을 것 같으니까요. 지난 7년간 기대한 것보다 실망한 적도 있고 그때마다 큰 교훈을 얻었어요. 물론 두렵지만 한 번 겪어봤으니 괜찮을 것 같아요.
새로운 출발을 꿈꾸며 품은 야망 같은 게 있을까요?
야망이라. 10년 뒤에도 저를 찾아주는 무대, 활동이 있는 것. 뭔가를 이루기보다 꾸준하고 싶어요.
더 높은 곳이 욕심나지는 않아요?
예전에 비 선배님께서 “인기는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고 마셔도 갈증은 없어지지 않는다”라는 말씀을 한 적이 있는데 크게 공감했어요. 기쁨, 슬픔, 좌절처럼 감정의 낙차가 큰 상황을 자꾸 경험하다 보니 이걸 겪지 않을 때는 공허함이 몰려와요.
나만의 기준에서 스스로를 통제해야만 건강하게 오래 달릴 수 있겠네요. 청하 씨에게 그 기준은 뭔가요?
성취요. 거창하고 원대한 게 아니라 일상에서 크고 작게 경험하면 되는 것 같아요. 강아지와 새로운 산책로를 갔을 때 너무 좋았다면 그것도 성취가 돼요. 조금씩 소소한 성취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최근 느낀 최고의 성취는 뭐였어요?
한국사 자격증 1급 합격 소식요.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는데, 모르니 두렵더라고요. 말실수를 하거나 알아듣지 못할까 입을 다물게 되기 일쑤고요. 외할아버지가 5.18민주화운동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국가 유공자셔서 언젠가 그 기록을 제대로 알고 싶기도 했고요. 2개월 동안 집 밖에 안 나가고 공부만 했어요.
지난 시간을 돌아봤을 때 지키고 싶은 것과 털어내고 싶은 건 뭐예요?
지키고 싶은 건 사람이고요. 털어내고 싶은 건 저 자신의 두려움요.
2023년의 시간을 함축할 단어가 있을까요?
마무리. 외부에서 보기에는 새로운 시작일 수 있는데, 쉬는 동안 저를 돌아보고 마음의 정리를 했어요. 청하의 한 챕터를 마무리한 시간이었어요.
새해에도 열심히 달릴 건가요?
하고 싶은 음악을 질리도록 하고 싶어요. 쉬지 않고 활동했는데 그걸 1년 동안 참았다는 건 굉장히 많은 배터리가 충전되어 있다는 의미거든요. 아마 내년에 가열차게 달려도 반 정도 소모되려나?
음원 사이트에 청하를 검색하면 참여한 곡이 100개가 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잖아요. 7년 일했으니까 일단 14년만 더 해봐요!
하하하. 그렇게 달려도 음악이나 행사, 촬영 등 일에 있어서는 ‘그만하고 싶어요’라는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다 너무 재미있거든요. 올해는 그 말이 턱밑까지 차오를 정도로 열심히 하고 싶어요. 더 홀가분해졌으니 속도도 더 빨라질걸요?
무아지경으로 일하는 청하, 팬들이 가장 좋아하겠는걸요?
몇 년간 팬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진짜 많이 했어요. 앞으로 더 당당해지고 싶어요.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사랑해주시는 만큼 그 사랑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큰 논란 없이 꾸준히 잘 지내면 좋겠어요. 더 애틋하고 소중해졌어요.
I.O.I부터 오늘의 청하가 있기까지 한 편의 거대한 드라마 같아요.
제 인생을 옆에서 본 친구들은 시트콤 같다고 해요. 무슨 일 있었다고 하면 “팝콘 준비해 가면 되냐?” 해요. 어릴 때부터 순탄치 않았으니까요. 초본을 떼면 4장이 나와요. 미국과 기숙사에 살았던 10년, 숙소 생활한 것을 빼도 그 분량이에요.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옛날에는 TMI라고 생각했어요. 저를 설명할 시간이 많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시작’ 하면 떠오르는 풍경이 있어요?
일출요. 작업을 하느라 밤새우고 오늘도 못 잤다며 막막하다가도 일출을 보면 설레요. 새벽이 끝났다는 알람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