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도 지속가능? 서스테이너블 럭셔리의 시대
지속가능한 힘을 갖추고 또 한 번 진화한 ‘럭셔리’ 패션의 오늘과 내일.
Sustainable : 미래의 세대까지 환경적·사회적·경제적으로 지속가능한.
Heritage : 오랜 시간 쌓아온 문화유산을 가진.
Limited : 한정된 가치가 있는.
Artistic : 예술적 영감을 갖춘.
Craftmanship : 숙련된 장인의 세심한 손길이 깃든.
Offbeat : 평범한 제품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Accessible :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오늘날의 럭셔리.
당신이 생각하는 ‘명품‘은 무엇인가요?
대학 입학 선물로 루이 비통 모노그램 백을 받았을 때는 참 좋았다. 평소 스타일에 전혀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명품 브랜드니까. 하지만 내 첫 명품 브랜드는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초등학생 꼬꼬마 시절 처음 접한 오일릴리(Oilily). 조잡한 다른 꽃무늬 옷과 달리 오일릴리는 다양한 색이 섞여 있음에도 어느 하나 튀는 게 없고 값비싸 보였다. 그렇게 ‘좋은 옷’을 구별했다. 30대에 접어든 지금의 내게 오일릴리는 더 이상 명품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가질 수 있고, 그보다 더 갖고 싶은 옷과 신발, 가방이 위시 리스트에 수두룩하니까. 누군가에게 물었다. 네가 생각하는 명품은 무엇인지. 부쉐론 콰트로 링이라고 답한 그는 쉽게 가질 수 있으면 더 이상 명품으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값이 높지 않더라도 몇 피스 한정판으로 드롭돼 갖고 싶지만 구하기 어려운 아이템 역시 명품이라고.
명품, 즉 럭셔리는 개인의 가치관과 시대정신에 따라 천차만별로 평가된다. 고대부터 존재해온 럭셔리 스타일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휘황찬란한 보석으로 치장했던 왕족과 귀족만이 소유할 수 있었다. 황금, 은, 자개 같은 아름답고 희귀한 소재를 오랜 시간 공들여 깎아낸 복잡한 장식물이 주를 이뤘다. 그 옛 시절에도 럭셔리에 대한 양극 간의 대립은 팽배했는데, 그리스 철학자는 ‘미덕의 적’으로 선 긋는 부류와 ‘사회의 원동력’으로 받아들이는 부류로 나뉘어 이에 대해 적극 논의했다. 또 쾌락의 즐거움을 금기시하던 중세 시대에는 악으로 간주했으며,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을 즐기던 르네상스 시대엔 성취의 결과물이라 여겼다. 19세기 초에 접어들면서 럭셔리에 대한 사회 계층의 장벽이 조금씩 허물어졌다. 명품 브랜드에서 가치를 새기기 위해 주로 사용하는 로고나 패턴 표기도 이즈음부터 성행했다. 1854년 방돔 광장 근처에 첫 매장을 연 루이 비통은 옷이나 귀중품을 담는 박스 케이스가 상류층 고객의 품격 있는 여행 필수품으로 각광받자 모조품 방지책으로 정교한 특유의 문양을 새겼다. 처음엔 줄무늬로 시작했고, 그 후엔 바둑판 모양의 다미에, 그리고 루이 비통의 이니셜과 꽃, 별 패턴을 반복 배열한 상징적인 모노그램으로 이어졌다.
다양한 얼굴을 지닌 ‘럭셔리’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접근 가능한 럭셔리(Accessible Luxury)’ 시대에 접어들며 패션계는 지금의 시스템을 서서히 구축했고, 사람들은 솜씨 좋은 디자이너가 내놓은 트렌디한 제품에 열광했다. 그리고 브랜드들은 감성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잊을 수 없는 경험을 럭셔리 문화로 선사했다. 그렇다면 소위 말하는 명품의 조건은 무엇일까. 에르메스 회장을 역임한 장 루이 뒤마는 럭셔리 브랜드의 세 조건으로 “아름다운 물건을 만드는 것. 개인 홍보대사가 될 고객을 선별하는 것, 원하는 것은 자유롭게 결정하는 것”이라 밝혔다. 다른 제품과 뚜렷하게 차별화되는 정교함과 취향을 지닌 배타성, 넘볼 수 없는 품질과 이를 보증하는 약속, 소유자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는 쾌락주의적 이벤트, 독특하되 모두가 알아볼 수 있는 아이코닉한 이미지가 어우러질 때 럭셔리는 발현된다. 또 명품이라 칭해지는 제품도 이전처럼 까다롭지 않고 그 경계선이 크게 넓어졌다. 이를 두고 패션 전문가들은 럭셔리를 네 가지 카테고리로 나눈다. 먼저 숙련된 장인의 세심한 손길로 정교하게 다듬어 값이 높지만 그만한 가치를 지닌 어센틱(Authentic) 럭셔리, 자동화 시스템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수량을 생산하지만, 톡톡 튀는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를 가미해 브랜드의 이미지에 맞춰 정성스럽게 소개하는 인터미디에이트(Intermediate) 럭셔리, 한정 수량 생산하거나 독특한 디자인으로 평범한 제품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오프비트(Offbeat) 럭셔리, 합리적인 가격대로 상품 회전율이 높지만, 디자이너의 아이디어가 스며든 어포더블(Affordable) 럭셔리까지.
2024년, 시대는 한 번 더 쇄신돼 지속가능한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이 시점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서스테이너블(Sustainable)’ 럭셔리다. 세간의 시선으로부터 완벽한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점이 럭셔리 스타일의 숙명인 만큼 앞서 구축한 럭셔리의 기본 요소를 충족하는 수많은 디자인 중 무엇이 나를 더 ‘멋진’ 사람으로 보이게 할지 고심하는 때다. 재산이 아니라 가치에 중점을 두고 명품을 고르는 이들은 본인의 즐거움뿐 아니라 모두를 생각하는 더 좋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스스로 명품 문화를 선도한다. 10여 년 전만 해도 백화점 럭셔리 코너를 꽉 잡고 있던 모피 코트만 봐도 그렇다. 한때 부의 상징이던 모피의 수요 급증은 무분별한 동물 학살로 이어졌고, 산 채로 희생되는 비윤리적인 착취에 경각심을 느낀 사람들은 모피 퇴출 운동에 목소리를 높였다. 더 이상 ‘좋은 옷’이 아니게 된 모피 코트의 자리는 기술의 발전으로 그보다 더 알록달록하고 디자인의 한계치가 없는 페이크 퍼 코트가 차지한 지 오래다. 세계 럭셔리 업계를 주도하는 두 그룹, LVMH와 케어링 역시 대중의 선구적인 시선에 동참해 오래전부터 환경과 지속가능성을 중점으로 한 혁신에 심혈을 기울인다. 이미 25년 전부터 별도의 ESG 부서를 설립해 운영 중인 LVMH 그룹은 책임 있는 소싱, 친환경 재료 개발에 매진했고, 근래는 ‘라이프인스토어’란 프로그램으로 명품 매장의 임대 개발, 이노베이션, 운영 그리고 각종 이벤트에 이르기까지 ‘서스테이너블리티 가이드라인’하에 철저히 진행하고 있다. 케어링 그룹 역시 2020년 미래 럭셔리 창조 전략을 수립하고 지속가능성을 위한 보고서를 발간했다. 첫 경과 보고서 이후 3년 만에 2025년 사회적·환경적 목표를 조기 달성했고, 2035년까지 온실가스 절대 배출량을 40% 감축한다는 신규 목표를 발표했다.
지구도, 사람도 모두가 ‘럭셔리’한 그날까지
서스테이너블 럭셔리는 앞으로 나아갈 길이 먼 데다 발전 가능성까지 무궁무진하다. 또 실제로 손에 잡히지 않는 것에 비해 복잡하고 오랜 시간과 노력, 막대한 비용 투자를 동반한다. 그래서 소비자의 적극적인 관심을 열렬히 요구한다. 원재료를 선정하고 추적하는 것부터 순환론적 사고로 접근하는지, 또 최상의 품질과 내구성을 우선시하는지. 최적화된 프로덕션 시스템을 계속해서 업그레이드하며 사업과 공급망의 환경 발자국을 줄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깨닫는 순간 명품을 보는 시선도 달라질 터. 쇼케이스에 담긴 선망하는 예쁜 백이 제3세계의 아동 인력을 착취하거나 좁디좁은 공간에서 하루 종일 힘겹게 생산되는 과정을 거쳤다면 명품의 탈을 쓴 착취재에 불과할 뿐이니까. 제품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에서 직원의 복지도 책임져야 하고 올바른 생산 과정도 거쳐야 한다. 또 동물 가죽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환경을 오염시키면서까지 가짜 가죽을 고집하는 건 아닌지, 상품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지나치게 과도한 패키징을 선택하고 있지는 않은지 유심히 살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의류 폐기물로 온 지구가 뒤덮일 지경에 처한 시대에 수명이 다한 제품은 어떻게 분해하고 업사이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도 필요하다. 제품을 통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는 없어도 그보다 더 값진 의미를 지녔기에 좋은 미래를 만들 ‘서스테이너블 명품’의 진실된 가치는 전무후무한 힘을 갖췄다. 우리는 이미 알게 모르게 서스테이너블 럭셔리 문화를 향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올해도 열심히 살아갈 나를 위해 질 좋고 아름다운 ‘럭셔리’ 제품을 선물하고 싶은가? 사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면 그 예쁜 디자인 속에 어떤 ‘착한’ 면모를 갖추고 있는지 고심해보자. 값비싸더라도 알뜰살뜰 모아온 돈을 지불하기 아깝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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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최정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