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NEW ERA / 돌풍으로 찾아온 김희애
배우 김희애에게 돌풍처럼 찾아온 연기는 이제 인생의 희망이 됐다. <돌풍>으로 또 한 번 경신할 찬란한 리그.
A 오늘 의상이 꽤 파격적이었죠?
보는 분들의 손가락이 오그라들까 봐 걱정이에요.(웃음).
A 현장 곳곳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그나저나 흔쾌히 도전에 응해주셔서 기뻤어요.
좀 민망했지만, 배우라는 직업의 장점을 다시 한번 느꼈어요. 김희애라는 사람의 가면을 벗으면 또 다른 인생을 살아볼 수 있는 게 이 직업의 묘미라고 봐요.
A 6월 28일 공개를 앞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돌풍>에서는 굳건한 소신을 가진 경제부총리 정수진으로 변신했죠. 어떤 모습을 보여주나요?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국무총리 박동호(설경구 분)와 치열한 정쟁을 펼쳐요. 처음 책을 읽었을 때는 선과 악이 분명하다고 느꼈어요. 박동호가 선이고, 정수진은 악에 가깝다고 단순하게 생각한 거죠. 그런데 촬영할수록 그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시대와 상황에 의해 변하는 한 개인의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비극과 희극, 블랙코미디의 요소가 뒤엉켜요.
A 일찍이 시나리오의 완성도에 대한 소문이 업계에 자자했어요. ‘권력’에 일가견 있는 박경수 작가의 정치극이라는 점에서 기대가 크고요. 배우들 역시 마찬가지인가요?
작품의 흥행에는 여러 요소가 영향을 끼치지만, 결과를 떠나 굉장히 매력적인 작업이었어요. 정치, 경제 용어의 향연이라 대사 난도가 높았고요. 그래도 작품 자체가 좋으면 배우들은 신이 나요. 그만큼 깊이 있는 작품이었어요. 사실 얼마 전 사전 시사를 할 기회가 있어 작품을 미리 봤어요. 6월 28일에 오픈하면 분위기를 느끼면서 기다릴까 했는데 못 참겠더라고요.
A 어떠셨어요?
정말, 배우들의 연기가 압권이에요. ‘더 열심히 할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들 왜 이렇게 잘했는지.
A 공개된 포스터 속 박동호(설경구 분)와 맞선 수진의 강인함부터 압권이던 걸요.
여성 캐릭터가 남성의 힘을 빼앗기 위해 인간 대 인간으로서 맞서는 역할이 많지 않죠. 정수진은 박동호와 정면으로 맞서요. 그 당당함과 용맹함에 저 역시 짜릿한 희열을 느꼈어요.
A 2015년, <얼루어>와 만났을 때 “한국에서 여배우로 할 수 있는 역할이 별로 없어요. 특히 제 나이면 더 그래요”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허스토리> <윤희에게> <더문> <퀸메이커>까지. 그 말을 완전히 뒤집어버렸어요.
좋은 세월을 붙잡은 덕분이죠. 이렇게 길게 할 수 있다는 게 참 큰 행운이에요. 어떤 용기나 도전보다 이 나이에 이렇게 당당하게 한 인간으로 어엿하게 설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껴요.
A 정말 운뿐일까요? 전에 없는 길을 기꺼이 개척하고 있다는 생각은 없나요?
옛날 같았으면 이런 기회조차 오지 않았을 거예요.(웃음) 아무리 원하고 계획한다고 해도 모든 상황이 어우러지는 건 운의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저 역시 항상 준비돼 있어야겠죠. 그렇지만 운이 크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어요.
A 결국 견디는 자가 이기는 거네요?
인생이 그래요. 살아보니까.
A 뚫고 지나는 과정은 어떻게 견뎠어요?
버티기보다는 ‘이게 인생이지’ 하고 생각해봐요. 인생은 ‘도도도’가 아니라 ‘도레미파솔라시도’ 다양한 음을 내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거거든요. 지나갈 일은 다 지나가요. 제가 골프를 좋아하는데, 프로 골퍼는 골프를 잘 치는 사람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걸 해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좋은 페어웨이에만 가는 게 아니라 해저드도 가고, 오비를 내도 흔들리는 마음을 컨트롤하고 회복하며 우승을 해내는 게 진정한 프로더라고요. 쉽게 성공하고 안락한 길만 가는 것보다 이번에 실패도 해보고, 원하는 만큼 안 돼더라도 그걸 참고 지나는 게 진정한 과정인 거죠. 그 과정이 인생의 필수 과목이에요.
A 연기를 하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나요?
그런 거창한 생각을 해본 적은 없고요. ‘왜 저렇게 했을까, 이렇게 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도 풀어야 할 숙제가 생겼다는 생각을 해요. 뭔가 더 나아질 수 있는 기회죠.
A 아쉬움보다 설렘이 느껴지네요?
내 상태가 현재 진행형이라는 건 참 행복한 일이잖아요.
A 40년째 연기를 하고 있어요. 가늠조차 안 되는 이 시간을 지속하게 한 일의 기쁨이 있나요?
이렇게 오래 일할 줄 몰랐어요. 원치 않는 부분까지 노출되는 직업이다 보니 어릴 때는 힘들었어요. 전부 다 지겨워서 그만두려고 한 적도 있고요. 결혼과 출산을 겪으며 일과 뚝 떨어져 있을 때는 배우들을 보고 ‘내가 어떻게 연기를 했지?’라고 생각한 적도 있고요. 다시 이렇게 뛰어들어 푹 빠질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A 배우라는 업은 운명이었을까요?
그런 것 같아요. 배우라는 이 일이 인간으로서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더 절실했고 치열하게 했죠.
A 일 속에서 더 기대하게 되는 성취가 있어요?
‘과연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오래 하면 참 행운이겠다!’ 싶어요. 동시에 당장 내일 그만둬야 한다고 해도 여한은 없고요. 할 만큼 했으니까요.
A 그럼에도 오래오래 일하고 싶은 이유는 뭔가요?
인생에서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아서요. 허기가 져야 먹고 싶은 게 생기고 식사가 기대되잖아요. 저도 놀고 쉬는 거 좋아하는데 매일이 그렇다면 즐거울까요? 일이 소중해져야 노는 것도 더 재미있는 법이거든요.
A 여전히 욕심나는 역할도 있어요?
일상적이고 편안한 연기, 한껏 풀어지고 이완된 캐릭터를 만나고 싶어요. 유독 극적 요소가 강하고 각 잡힌 캐릭터를 많이 만난 것 같아요. “밥 먹었어?” “배고파!” 하는 말을 툭툭 내뱉을 수 있는 캐릭터요. 저 진짜 잘할 수 있거든요.
A 그러고 보니 예능 프로그램 외에는 배우 김희애의 자연스러움을 목격한 기억이 없네요?
언젠가 또 오겠죠 뭐!
A 제주도에서의 삶을 보여주는 건 어때요? 영어 학습과 운동 등 루틴 있는 일상을 보내잖아요. 요즘도 꾸준히 하시죠?
계속하고 있죠. 저에게는 대단한 공부 개념이 아니에요. 안 하면 머리가 답답하고 무거워요. 이걸 해야 기분이 좀 산뜻해져요. 살아 있는 게 느껴지는 것 같고요. 배운 걸 테스트해보면 다 틀리는데 짜증이 안 나요. ‘이게 아니라 이거구나’ 하면서 틀리는 것도 재미있어요. 너무 쉬운 걸 틀리면 ‘와, 이것도 모를 뻔했네. 진짜 큰일 날 뻔했다’ 싶어요.
A 제주 일상을 이야기하니 표정부터 달라지는데요?
제주 생활은 제 인생의 보물이라고 하고 싶어요. 너무 단순한 삶인데 그 속에서 행복이 가득 차요. 머리가 개운하고 산뜻해지고요. 일이 없을 때는 늘 내려가요.
A 제주 분들은 봄이면 퇴근하면 고사리 따러 가고, 자연의 속도가 곧 라이프스타일이 되더라고요.
아휴 고사리, 그건 시작을 말아야 해요. 한번 발을 들이면 멈출 수 없어요.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도 눈에 보이면 끌려요. 굳이 그렇게 채집하지 않아도 집 앞 마트에 가면 농부님 이름이 적힌 로컬 식재료가 한가득이에요. 당근, 비트, 감자 등은 찌기만 해도 단물이 뚝뚝 떨어져요. 요즘은 블루베리가 제철이에요. 가격도 저렴하니까 이것저것 사고 싶고 자연스럽게 요리도 하게 되더라고요. 세계 어디를 가도 제주도보다 좋은 곳은 없어요.
A 행복이 정말 별것 없네요?
내 마음 편한 게 제일이죠. 삶의 모든 순간이 물음표로 가득하지만 그 순간이 무탈하면 느낌표가 되지 않을까요? ‘좋았다! 감사하다! 무사히 잘 지나갔다!’ 이렇게요. 단순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언젠가 행복이 느껴지는 순간이 오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