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ITIVE+ /서퍼 조준희, 파도와 긍정의 이야기

서퍼 조준희의 찬란한 성과는 이제 선한 영향력을 향한다. 강원도 양양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떠올린 파도와 긍정의 이야기. 

크림 컬러 재킷과 팬츠, 니트 베스트는 모두 H&M. 주얼리와 플리플롭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화이트 셔츠와 쇼트 팬츠, 타이는 모두 발렌티노(Valentino). 샌들은 코스(Cos).

브라운 컬러 재킷과 팬츠, 벨트, 슈즈는 모두 제냐(Zegna). 네크리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블랙 재킷과 팬츠는 페라가모(Ferragamo).

A 서핑 국가대표 선수, 한국 최초의 빅 웨이브 서퍼, 미국 서핑 프로 리그 대한민국 최초 출전에 나자레 서프하우스 대표까지. 직함이 많아요. 어떻게 불리는 게 좋아요?
제 입으로 얘기하기 부끄러운 게 많네요.(웃음) ‘파도 타는 사람’이나 제 이름 ‘주니초’로 불리고 싶어요.

A 서핑과의 만남은 필연이었을까요?
서퍼의 삶을 꿈꾼 적은 없어요. 앞서 수식이 부끄러운 이유도 그런 삶을 상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에요.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거예요. 어린 시절 스노보드를 즐겨 탔는데, 어느 겨울에 ‘스노보드의 원류를 찾아서’라는 행사에 참가했어요. 그때 처음 서핑을 접했죠. 바다 위에서 파도를 타던 감각을 잊을 수 없어 2013년 서핑 숍에서 무작정 일을 시작했어요. 그 당시 대학교 1학년이었고요.

A 그 학생이 벌써 11년 차 서퍼가 됐어요. 서핑의 어떤 점에 매료됐어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듣기 전에 파도의 생애를 상상해보시면 좋겠어요. 지금 저기, 눈에 보이는 저 파도가 어디에서 왔는지 아세요?

A 아무도 모르죠.
맞아요. 저 파도가 이 양양까지 오는데 어떤 여행을 했는지 우리는 아무도 몰라요. 깨지지 않고 에너지를 내면서 양양까지 온 힘을 다해서 왔을 거예요. 그리고 곧 사라져요. 우리는 지금 파도의 여정이 끝나는 순간을 보고 있는 거예요. 서퍼는 파도의 여행이 끝나는 지점에서 마지막을 함께하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A 그러고 보니 운영 중인 서핑하우스 로고에도 파도가 있네요. 그런데 이 로고 속 파도는 끝보다 시작을 의미하는 듯해요.
파도가 돌고 돌아서 우리에게 온다고 생각해요. 이건 서핑을 시작하고 달라진 제 인생을 의미하기도 해요. 파도를 곁에 두고 살면서 힘든 순간 나도 모르게 그 친구가 생각나더라고요. 제게 나자레(Nazare)의 파도가 그런 존재였어요.

A 그 파도에 꽂힌 계기가 있었어요?
죽음을 생각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호텔 방에서 3일을 내리 울다가 난간에 섰는데, 순간 예전에 본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 떠올랐어요. ‘나자레에서는 8층 높이의 파도가 몰아칩니다’라는 장면이었는데, 당시 그 방이 8층 높이에 있었어요. 순간 어차피 죽을 거라면 그 파도를 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참 말도 안 되는데, 지금도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요. 그날 이후 나자레에서 빅 웨이브를 타야겠다는 목표 하나로 버텼어요.

A 나자레가 살린 목숨이네요?
맞아요. ‘나자레’가 저를 죽음의 문턱에서 끌어올린 거죠. 그때부터 그 단어가 다른 의미로 다가왔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외쳐요. 나자레! 나자레! 나자레!

A 빅 웨이브 서핑의 꿈에 어떻게 다가갔아요?
나자레를 꿈꾸던 당시 군복무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이미 나자레 파도를 탄 사람이다’를 상상하며 어떤 식으로 준비했을지 거꾸로 생각해봤어요. 매일 숨 참기를 연습하고 체력을 키우기 위해 훈련했어요. 할당량을 만들고 그걸 해내면 나자레 파도를 탄 것 같은 뿌듯함을 매일 느낀 거예요. 그렇게 500일을 버텼어요.

A 가장 도움이 된 훈련은 무엇이었나요?
빅 웨이브 서핑은 기술보다 중요한 게 생존력이에요. 내가 나를 믿지 못하면 아무도 날 믿어줄 사람이 없죠. ‘나는 할 수 있다’는 자기 효능감을 매일 적립하는 게 기술 훈련보다 더 중요했어요. 자기 자신한테 솔직하고 떳떳해야 파도 위에서 생존할 수 있거든요.

A 지난해 11월, 드디어 나자레 파도를 탔죠. 그 과정은 어땠어요?
비자가 허락하는 3개월 동안 매일 바다에 나갔어요. 그리고 꿈 같은 일이 매일 벌어졌죠. 훈련을 해보라는 듯 파도가 매일 고르게 커졌고, 우상이었던 영국 출신의 서퍼 앤드루 코튼(Andrew Cotton)이 도와줬어요. 지난해 나자레 파도가 치는 프라이아 두 노르트(Praia do Norte)행을 결정한 것도 그의 한마디 덕분이었어요.

A 어떤 이야기를 들었나요?
간절하게 나자레 파도를 꿈꾸며 구구절절 DM을 보냈는데, “와서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줄게”라는 답을 받았거든요. 도착해서 이틀 차에 한국에서 가져간 보드가 부러져서 그에게 도움을 구했는데, 선뜻 자기 보드를 빌려준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제 모습을 보고는 “너 나자레 파도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 그렇게 타면 죽어”라면서 파도의 충격을 흡수하는 임팩트 베스트, 구명조끼 역할을 하는 CO2 조끼 등 자기 장비를 빌려줬어요. 이후로도 가끔씩 제트스키로 파도를 태워주기도 했고요.

A 빅 웨이브 서핑은 F1만큼 자본이 몰리는 일이잖아요. 혈혈단신 바다에 나가는 게 무모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멋진 타이틀만큼 굉장한 비즈니스의 영역이죠. 보통 10m가 넘는 파도는 최소 3명이 팀을 이뤄서 타요. 파도에 휘말렸을 때 제트스키로 저를 구해줄 한 명, 그 제트스키가 전복됐을 때를 대비한 예비 세이프티 한 명, 멀리서 이 셋을 바라봐줄 한 명이 있어야 하죠. 포르쉐, 메르세데스-벤츠 등 스폰서가 있으면 선수 한 명을 위해 6~7명이 팀을 이루기도 해요. 맨땅에 헤딩한 저는 당연히 괴리감도 컸죠. 언젠가 이 말을 코튼에게 한 적이 있는데, “열심히 일해서 또 와서 타. 그러다 보면 너에게도 팀이 생길 거야”라고 하더라고요.

A 올해도 갈 예정인가요?
그럼요. 준비하고 있어요.

A 목표가 있나요?
어떤 결과로서 끝나는 게 아니라 나자레 파도를 타는 하나의 여정을 잘 이어가고 싶어요. 나자레에 가면 ‘Everyday is day 1’이라는 마음으로 임해요. 그 여정에서 조금씩 더 큰 파도를 타서 유명해진다면 누군가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어요. 절망의 순간 나자레가 저를 절망에서 끄집어낸 것처럼 ‘넌 할 수 있어’라는 에너지를 나누고 싶어요. 그래서 나자레 서프하우스라는 공간을 만든 거고요. 이곳에서는 누구나 위로와 희망이 될 힘을 얻길 바라요. 제가 그런 것처럼 파도를 타는 행위를 통해 그걸 찾길 바라고요.

A 인생에서 제일 즐거웠던 파도는 역시 나자레인가요?
꼽을 수 없어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과 멘타와이섬, 대만 타이동, 프랑스 비아리츠, 캘리포니아주 헌팅턴 비치, 호주에서는 5년간 머물며 골드코스트, 퍼스, 벨스 등 정말 많은 곳에서 파도를 탔는데 다 달라요. 같은 장소라도 날마다 다르고요.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해 파도를 탔다는 사실이 중요해요.

A 그 많은 곳 중에서 강원도 양양에 정착한 이유가 있어요?
파도만큼이나 중요한 게 그 지역의 삶과 분위기더라고요. 발리에서는 1~2년을 있어도 이방인이라고 느껴졌어요. 반면 호주에서는 저를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해주니 친구를 만들 수 있었어요. 끌려가는 게 아니라 나만의 속도로 삶을 꾸릴 수 있는 게 중요해요. 이곳 양양은 그런 면에서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곳이에요.

A 살아보니 어떤 점이 제일 좋아요?
하늘과 바다, 자연의 모든 색이 은은하게 어우러져 있어요. 이따 바다 넘어 해 지는 풍경을 꼭 보고 가세요. 파스텔 톤의 핑크빛이 드리우는 풍경이 그야말로 미쳤어요! 양양이라는 이름도 좋아요. 호주 친구에게 양양을 소개할 때 음양(Yin Yang)이라고 표현했어요. 발음도 비슷하잖아요. “양양은 좋은 거 더하기 좋은 거(Positive+Positive)야”라고 설명했어요. 면사무소에 가면 ‘고맙다! 양양’이라고 쓰여 있는데, 양양에 살 수 있는 이 삶이 저도 참 고마워요.

A 요즘은 파도를 타러 어디로 가나요?
집 앞으로 훌쩍 나가요. 정암해변부터 물치해변 사이가 전부 정암리예요. 서핑하는 사람도 많지 않아서 자전거 타다 파도가 좋아 보이면 보드 들고 뛰어 들어가요.

A 이곳에서 지키는 루틴이 있어요?
숨 참기를 계속 해요. 나자레에 가려면 자신감이 필요해요. 미래의 나에게 떳떳하려면 최소한의 저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하고요. 숙제한다는 생각으로 매일 이거 하나만큼은 하려고 해요.

A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일이네요?
맞아요.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래서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왜 거기로 가야 하는가? 이 세 질문을 스스로에게 수시로 던져요.

에디터
김정현
포토그래퍼
CHA HYE K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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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메이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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