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휴가는 어디로 향할까? 트렌드세터 10인의 목적지에서 찾은 새로운 좌표들. 

말과 함께 달린 80km에 달하는 콤포르타 해변.

시아두에서 들른 성의 내부.

몬사라즈 사막 가운데 숨어 있는 숙소 카사 나 테라(Casa Na Terra).

김아린 | 비 마이 게스트 대표

카펠라 오너스 라운지, 오설록 북촌을 비롯해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까지. 내로라하는 공간과 브랜드를 탄생시킨 브랜딩 그룹 비 마이 게스트를 이끈다.

어느 날, 그저 우연히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영화가 내게 왔다. ‘세상에 이런 도시도 있구나, 줄곧 이름만 듣던 리스본이 구석구석 우울한 운치로 나를 홀리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그곳에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리스본의 기차역, 바다처럼 넓은 테주강(Rio Tejo) 등 도시의 모든 것에 반해 충동적으로 여행을 예약했다. 벌써 6년 전의 일이다. 우리의 첫 숙소는 영화 속 그레고리우스가 묵는 소박한 호텔이 위치한 알파마(Alfama)로 리스본 구시가의 끝자락에 위치했다. 택시는 가까이 갈 수도 없는 외딴 골목길, 몇 백 년 전 깔린 마차용 돌길이 그 끝에 숨어 있었다.

팔라세트 샤파리즈 델 헤이(Palacete Chafariz d’El Rei)는 테주강을 정면으로 마주한 작은 성이다. 19세기 어느 가문의 웅장한 성은 방마다 다른 구조를 갖추고 살롱과 테라스 다이닝 룸은 말 그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1800년대로 돌아간 듯했다. 아무도 없는 거리는 우울한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막 하차한 기분을 선사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이제 도착해 시장하다는 우리에게 호텔 직원이 동네 작은 비스트로를 추천했다. 자리에 앉자 직원은 그린 와인을 권했다. 비뉴 베르드(Vinho Verde)라는 와인에선 아직 숙성되지 않는 신선함이 코끝을 스쳤다. 수확한 포도를 3~6개월 후 병에 담아 막 발효를 시작한 여린 기포는 어딘지 모르게 심금을 울리는 맛이었다. 바로 이런 앳된 한이 포르투갈의 정서가 아닐까 싶었다. ‘한’이라는 의미가 존재하는 단어를 쓰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포르투갈뿐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단순한 슬픔이나 우울함과 다른, 사무치는 한을 포르투갈어로 ‘사우다드(Saudade)’라고 한다. 언제나 항해열을 앓는 나라, 감성과 열정 가득한 탐험가, 그렇기에 이들에게는 그 한의 정서가 깊이 자리 잡고 있으리라.

취기와 함께 우리는 리스본시를 조금 벗어나 외딴 성에 당도했다. 프론테이라궁(Palacio dos Marqueses de Fronteira)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 성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안주인인 할머니가 그대로 살고 계시니 그의 사생활을 존중할 것, 그리고 거대한 스완을 만나면 절대 만지려 하지 말 것. 이 두 가지 주의 사항과 함께 우리는 거대한 영지를 마음대로 누빌 수 있다. 이곳은 1671년에 제1대 프론테이라 후작의 사냥용 파빌리온으로 지어졌다. 햇살이 쏟아지는 살롱, 모든 벽은 포르투갈의 상징 아줄레주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후작 가문의 전투와 영광의 역사가 그 아줄레주 위 가득히 고여 있다. 한참을 산책하고 시내로 돌아와 리스본에서 가장 우아한 번화가라는 동네, 시아두(Chiado)에 다다랐다. 가볍게 오후의 와인 한 잔이 생각나 추천받은 식당에 들어섰다. 이곳 또한 과거의 저택이었던 곳으로 광장을 향한 발코니, 벽화로 장식된 벽, 천장에는 가문의 상징인 사자 조각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781년에 지어진 이 성은 귀족과 호사가들이 술과 춤을 즐기던 곳으로, 그 호사로운 기운이 공간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역사와 함께 여러 귀족의 소유로 바뀌고, 용도도 변하고, 어마어마한 불도 났지만, 여전히 이곳은 가장 우아한 품격을 갖췄다. 시아두의 밤은 어딘지 모를 퇴폐함과 동시에 너무도 나른하다. 술기운과 강바람에 취해 어쩌면 이곳 성 어딘가의 주인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리스본의 첫 여행이 끝났다.

이후 1~2년 주기로 매년 여름이면 리스본으로 향한다. 땅끝의 나라, 유럽의 변방쯤으로 생각하던 리스본에 도착하면 그들만의 촘촘한 이야기와 문화, 특유의 안락한 분위기에 도취된다. 도심이 익숙해진 후, 남부 지방인 콤포르타, ‘다크 스카이 리졸브’라 불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있는 알렌테주, 에스토릴 등 더욱더 깊이 이 도시를 탐닉했다. 그곳에서 쌓은 기억은 곧 일의 동력이 된다. 자신의 브랜드를 오롯이 이해해야 한다는 철학으로 예약의 기본 단위가 1주일인 호텔, 80km에 달하는 콤포르타의 해변의 한 마구간에서 마돈나가 타던 말과 함께 승마를 즐기고, 양치기 떼를 바라보며 수영하고, 비치 클럽에서 기분 좋은 밤을 보내고, 우연한 기회에 돌고래 떼를 마주했던 그 기억 말이다. 한 편의 시처럼 들여다보고 곱씹을수록 사유의 시간이 충만해진다. 지루할 틈 없이 찾게 되는 이 나라는 나를 가장 포근하게 안아주는 요새 같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