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만과 마름 사이

단 한 번도 마른 적 없는 나, 이런 내가 평생 나도 모르게 특권을 누려왔다고? 마름과 비만 사이의 회색 지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친구들과 바닷가로 떠난 휴가에서 쇼핑 이야기를 하다 분위기를 망쳐버린 적이 있다. 친구 중 한 명이 “엉덩이에 비해 허리가 너무 가늘어서 맞는 바지를 찾기 힘들다”고 한탄했기 때문이다. 이 친구는 날씬하다.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친구들도 말랐다. 그중 스몰 사이즈를 입지 않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다른 말로, 내가 제일 뚱뚱했다. 친구는 별 뜻 없이 내뱉은 말이겠지만, 나는 “옷 가게에 맞는 청바지가 단 한 벌도 없어서 그냥 나오는 서러움을 알아?”라며 쏘아붙였다. 서로 기분이 상한 채로, 우리는 대화를 급히 마무리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하다. 친구를 매몰차게 몰아붙인 것이 부끄러워서는 아니다. 아직도 친구의 발언은 플러스 사이즈 사람 앞에서 하기엔 부적절했다고 생각한다. 화가 난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폭발해버린 것은 열등감 때문이다. 내가 그토록 부러워하는 ‘마름 특권(날씬한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누리는 특권)’의 주인공인 그가, 그런 부분에 대한 자각이 없다는 게 괘씸했다. 플러스 사이즈인 내게 친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시시콜콜한 불평을 토로한다. “요즘 살찐 것 같아” “맞는 옷이 없어” “오늘도 헬스장에 가느라 힘들었어” 같은 이야기들. 평생 스몰 사이즈를 입은 친구가 이런 불평을 하니 내 안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하지만 플러스 사이즈인 나도 누군가에게는 위선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나는 비만인 중에서 가장 작은 사이즈인 ‘스몰 팻(Small Fat)’에 속한다. 평균 여성보다 큰 신장에 몸무게는 90~97kg을 왔다 갔다 한다(초고도비만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미국에서 이 정도 사이즈는 스몰 팻으로 분류된다). 어릴 때부터 줄곧 통통했고, 내 몸무게는 가족의 골칫거리였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몸매를 조롱당하고, 옷 가게에서 쫓겨나고, 식이장애와 운동 강박을 겪었다. 이런 일련의 경험으로 인해 스스로를 ‘뚱뚱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나보다 큰 사람의 고충을 외면했다. 4XL를 입는 사람 앞에서 최대 3XL까지 취급하는 의류 브랜드를 ‘포용적’이라며 칭찬했다. 미디어가 플러스 사이즈 모델과 배우를 충분히 기용하지 않는다며 배부른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다. 초고도비만인에 비하면 나와 비슷한 체형의 유명인을 금세 떠올릴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이는 나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SNS를 슬쩍 둘러보기만 해도 나와 비슷한 행동을 일삼는 이들을 발견할 수 있다. 틱톡에 ‘스몰 팻’ 태그를 검색하면 이를 남용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그다지 뚱뚱하지 않은, 살집이 조금 있는 정도의 통통한 사람들이 비키니 입은 모습을 공개하며 자기 몸 긍정을 외친다. 외모지상주의의 피해자임을 호소하며 좀 더 포용적인 사회를 만들자고 전한다. 그리고 이 영상에 달리는 댓글은 대부분 긍정적이다. 그러나 초고도비만인이 같은 내용의 콘텐츠를 게시한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완전히 달라진다. 응원의 댓글은 사라지고, 다시금 조롱이 등장한다. 때로는 그들의 안일함을 꾸짖는 댓글도 보일 것이다. 게다가 비만 소재 콘텐츠는 영상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콘텐츠 규제나 제한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성희롱 신고, 도용 등의 문제가 일어나기도 한다고. 고도비만인의 이런 고충을 생각하면, 스몰 팻 친구들이 비키니 사진을 자유롭게 올릴 수 있는 것조차 호화롭게 느껴진다. 외모지상주의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던 스몰 팻 친구들이 고도비만인과 비교하면 분명 특권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지난 바캉스에서의 내 친구처럼 말이다.

나 또한 ‘스몰 팻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안 지 얼마 안 됐다. 나와 비슷한 체형의 여성이 미디어에 등장하는 것도 특권 중 하나다. 초고도비만 몸매를 가진 모델이나 배우는 아예 찾아볼 수 없다. 10년 전에는 스몰 팻 여성이 자유롭게 쇼핑하기 어려웠지만, 최근에는 일반 의류 브랜드에서 쉽게 쇼핑할 수 있게 되었다. 패션 업계가 과거에 비해 다양한 사이즈를 수용하기 시작했고, 우리가 그 변화의 첫 수혜자가 된 것이다. 고도비만인은 일반 옷 가게에서 여전히 씁쓸하게 돌아 나오는 일이 빈번하다. 체중으로 인한 직장 내 차별에 대한 법적 규제는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고, 고도비만인은 아무 이유 없이 해고당할 위험에 처해 있다. 의료계에서는 이들을 오진하는 경우가 잦고, 아예 치료를 거부할 때도 있다. 비만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학위 취득, 은행 대출, 자가 매매에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한다. 대중교통에서 편안하게 착석하는 것조차 어려운데, 다른 건 말해 뭐하겠는가? 보통 체구의 사람은 대중교통과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들에게는 치열한 투쟁을 통해 쟁취해야 하는 권리에 가깝다. 비만인 중 가장 왜소한 편인 스몰 팻은 포용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사회의 첫 수혜자다. 그렇기에 더 큰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혁명의 선봉에 서야 한다. 

스몰 팻 친구들이 그간 겪은 차별을 모른 체하려는 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마른 몸매가 우월한 것이라 외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피팅 룸에서의 참혹한 경험을 기억한다. 전 연인이 몸무게를 관리하고, 은근히 다이어트를 강요하기도 했다. 이런 나쁜 기억이 떠오르면 본능적으로 자기방어적인 태세를 취한다. 내가 지난 바캉스에서 그런 것처럼, 몸과 관련된 주제에 대해 깊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기를 거부하게 된다. 스스로 피해자가 되어 자기방어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과거에 몸에 대한 안 좋은 경험을 했다면 흑백논리에 빠지기 쉽다. 세상을 뚱뚱하거나 뚱뚱하지 않은 사람, 피해자와 피해자가 아닌 사람, 단 두 부류로 나눠버린다. 그 사이의 회색 지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못하게 된다. 트라우마에서 비롯한 비뚤어진 척도를 타인에게 적용하고, 두 부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무시한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가해자가 될 수 있음에도 스스로를 피해자라고만 여겼다. 지금은 이런 흑백논리를 타파하고자 심리치료를 받는 중이다.

스몰 팻에 속하는 이들도 때로는 신체적 특권을 누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통통하기도 하고, 정상 체중이기도 하다. 몸매로 놀림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실생활에 지장을 줄 만큼 극심한 차별을 겪지는 않는다. 스몰 팻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것이다. 그간 자기 몸 긍정주의를 위해 노력해온 것에 모자람이 있었을 수 있다. 이따금 올리는 비키니 사진 정도로는 뿌리 깊은 비만 혐오에 맞서기 어렵다. 피해의식은 접어두고, 비만 혐오적인 이야기가 나온다면 그것이 얼마나 그릇된 사고방식인지에 대해 충분히 대화하자. 그러면 언젠가는 자신의 몸을 검열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도래할 수 있지 않을까? 자유로운 미래를 위해 혁명의 선봉에 선 스몰 팻 친구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겪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인정하면서 타인의 경험도 너그럽게 포용해보자. 

에디터
신지수
NICOLA DALL’ASEN
일러스트레이터
CYNX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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