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 & SPACE / 김신록
“극장의 시간이 ‘산사태’ 같으면 좋겠습니다. 극장은 그래야만 합니다.” 연극에서 태어난 김신록이 연극의 모든 가능성 안에서 새로운 작품에 골몰한다.
우리 몇 번째 만남이죠? <얼루어>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즐겁습니다. <지옥2>며, <언더커버 하이스쿨>이며,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지금 가장 탐색할 이야기는 바로 이곳, 극장에 대한 것입니다.
언제부터 시작된 이야기냐고요. 스터디를 하는 그룹이 두 개 있었어요. 신유물론에 대해서, 극장과 공연 예술에 대해서 질문을 해나갔죠. 또 그것을 어떻게 배우의 몸으로 혹은 공연 예술의 언어로 구현할 수 있을까? 이런 실천적 질문을 던지며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두 개의 공부가 연결되기 시작했어요. 작년에는 예술의전당에서 ‘질료가 되는 기쁨’이라는 렉처 퍼포먼스를 했는데, 이번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공연 예술의 언어 안에서 싱크를 맞춰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되었죠, 콘셉트/구성/연출 김신록이.(웃음) 저는 배우와 연출의 영역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지금 만들어가는 과정은 제게도 굉장히 새로운 방식입니다. 관계의 바운더리 안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 탐색을 통해 어떻게 허구의 시간이 실재를 딛고 넘어가는지 실험해보고 싶었습니다.
요즘 ‘극장의 시간’을 자주 생각합니다. OTT, 유튜브, 쇼츠, 릴스의 시대에 왜 사람들은 미래의 시간을 선점해 공연을 예매하고 시간과 돈과 체력을 들여 극장에 올까요. 극장에 오면 한 시간 혹은 세 시간씩 스마트폰도 못하고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하는데요. 물론 ‘공연 중에 언제든지 나갔다 들어오셔도 됩니다. 편하게 누워서 보셔도 됩니다’라는 콘셉트의 공연도 등장했지만, 이 역시 극장이라는 곳은 한번 들어와서는 웬만하면 나갈 수 없는, 반강제적인 시공간이라는 관습을 전제하고 있을 겁니다. 이 시대에 사람들은 왜, 무엇을 경험하고 싶어 극장에 오는 걸까. 반대로 극장은 어떤 일이 벌어지는 곳이길래 한두 시간의 ‘문 닫힌 시간’이 필요할까.
‘극장의 시간’은 그곳에 모인, 사람과 사물을 포함한 모든 신체가, 서로를 침범하고 변화시키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고압의 블렌더가 재료를 뒤섞고 분쇄하듯, 극장이라는 시공간이 그곳에 모인 모든 신체의 잠든 몸을 일깨우고, 모두의 욕망이 충돌하고, 잊힌 기억을 불러내고, 감춰진 얼굴을 들춰내고, 의식과 무의식의 지형을 뒤엎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극장의 시간이 ‘산사태’ 같으면 좋겠습니다. 제게 극장은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의 시공간이고, 또 그럴 수 있을 때만 존재의 의미가 있는 시공간입니다. 그렇다면 ‘산사태 같은 시간’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세종문화회관의 ‘싱크넥스트’라는 기획 프로그램의 라인업 공연 중 하나인 <없는 시간>을 맡았습니다. 이곳 연습실에 아침부터 밤까지 머물곤 합니다. 공연을 준비하는 시간은 전부 이 질문에 답을 찾는 과정입니다. 극장의 시간이 뭘까, 그 시간은 어떻게 생길 수 있을까. 새로운 질문을 탐색하며 시각예술가인 손현선 작가와 협업하고 있습니다. 극장에서 만난 모두가 산사태의 시간을 온몸으로 맞이할 수 있다면, 산사태처럼 산산이 흩어져 내릴 수 있다면, 극장문을 나서면서 이전과는 다른 몸과 얼굴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역동적인 화보 촬영과 인터뷰가 줄곧 저를 흔들고 있습니다. 저에게 자유를 준 탈주의 의미는 ‘이곳을 떠나기’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변화시키기’입니다. 모두들 바쁘신 중에라도 시간이 나신다면, <없는 시간>에서 제 답을 확인해주시기를. 기분 좋게 흔들리는 밤 되시기를. 오늘 인터뷰를 하면서 이 단어를 말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요, 그리고 마침내 모두가 ‘기쁨의 정동’을 누릴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