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S IN LIFE / 손호준

손호준이 연극 무대에 다시 오르는 건 20년 만이다. 무뎌진 사랑을 깨우는 손호준의 프라이어. 

화이트 실크 셔츠는 아크네 스튜디오(Acne Studios).

실버 블라우스는 르메테크 (Lemeteque). 블랙 팬츠는 렉토 (Recto). 네크리스는 페페쥬 (Pepezoo). 글리터 슬리브리스와 링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화이트 실크 셔츠는 아크네 스튜디오.

펄 슈트 팬츠, 블랙 커머번드는 로드앤테일러(Load and Tailor). 오간자 블라우스와 글러브, 부츠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블랙 실크 블라우스, 허리 매듭 블라우스는 김서룡 (Kimseoryong). 블랙 와이드 팬츠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부끄러워하면서도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속 프라이어 월터를 연기했어요. 표정과 제스처가 자연스럽던 걸요?
연습이 5주 차에 이르다 보니 익숙해지긴 했나 봐요. 아휴, 그래도 처음 뵙는 분들 앞에선 창피했습니다.

‘성소수자와 에이즈’. 단어만 놓고 보면 파격적인 인물이죠. 출연을 결정하는 데 망설임은 없었어요?
100페이지에 달하는 대본을 단숨에 읽었어요. 짜임새 있게 잘 완성된 작품이에요. 성소수자와 에이즈 환자를 향한 선입견이 팽배하던 1985년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연극을 결심한 이유가 공부를 하고 싶어서였는데, 낯선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부할 게 더 많을 것 같았죠. 지금까지 경험한 캐릭터 중 저와 가장 다르거든요.

다름을 이해하는 과정은 어땠나요?
신기했어요. 인물의 세계를 이해하려고 드랙퀸 퍼포먼스를 보러 가기도 했고요.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1시간쯤 지났을까, 그 친구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백팔십도로 바뀌었어요. 자신을 당당하게 표현하는 모습이 멋지더라고요. 그때 제가 느낀 감정을 프라이어에 담고 싶은 욕심이 커요. 프라이어는 사랑스럽고 용감한 친구거든요. 낯선 감정이라 생각하던 것도 알면 알수록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느끼는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더라고요.

드라마 <나의 해피엔드> 이후 차기작으로 연극을 택했어요. 왜 이 타이밍에 무대로 향했나요?
무대에 대한 갈망은 늘 있었어요.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했으니까요. 그런데 데뷔 후 드라마와 영화에 치우쳐 활동해서인지 작품이 잘 들어오지 않더라고요. 어디서 어떻게 어떤 경로로 <엔젤스 인 아메리카>가 제게 왔는지 알 수 없지만, ‘연극’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일말의 거부감도 없었고요. 오히려 반가웠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한 것도 극단에 들어가기 위해서였죠?
맞아요. 당시 다니던 교회에서 1년에 한 번 연극제 행사가 열렸어요. 아버지가 교회의 청소년 부장 집사님이셨는데, 아들인 제가 무대에 꼭 올라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극‘I’ 성향이라 당연히 거절했는데 각종 협박과 회유로 결국 서게 됐어요. 연출을 맡은 교회 누나를 조르고 졸라 아주 작은 역할, 딱 세 마디의 대사를 받았어요.

배우 손호준의 연기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네요! 그 대사가 기억나요?
“두통! 치통! 생리통!” 극 중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이었어요. 이 세 마디를 던지고 관객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무대를 내려오는데 왠지 아쉽더라고요. 무대 뒤에 서서 ‘너무 짧다. 한 번 또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얘기를 연출 누나에게 했더니, 소속된 극단의 소극장 공연에 초대해줬어요. 그 공연을 보고 극단에서 함께 활동하게 됐죠.

돌고 돌아 다시 만난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기대하고 있는 건 뭔가요?
재미요. 최근 몇 년간 연기의 재미가 무뎌졌다고 느끼던 참이었어요. 데뷔하고 10~11년간 수입도 없고, 1년에 한 번 나만 찾을 수 있는 단역으로 출연하면서도 그때는 진짜 재미있게 했거든요.  그 기쁨을 다시 느끼고 싶었는데, 요즘 충분히 만끽하고 있어요.

어떤 점이 그렇게 재미있어요?
드라마나 영화는 대본을 받아 스스로 캐릭터를 고민하는 반면 연극은 몇 달간 배우들이 모여 함께 캐릭터를 분석해요. 서로가 서로에게 ‘어떻게 생각해?’라고 던지는 질문과 그 답에서 배울 게 천지죠. 유승호 배우와 더블 캐스팅인데, 같은 프라이어를 서로 다르게 표현하는 걸 볼 때면 막 짜릿해요. 어떤 배우랑 연기하느냐에 따라 느끼는 감정, 마음가짐, 리액션이 전부 다르고요.

두 분이 가장 다르게 해석한 지점은 뭔가요?
일단 세대가 다르니, 외모와 분위기의 차이가 있고요.(웃음) 승호 씨는 되게 귀엽고 보호 본능을 일으킨다면, 저는 농후하고 웃기다고 하더라고요. 살아온 환경이 다르다 보니 같은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크게 달라요.

배우에게는 연극 무대만의 매력이 분명히 있나 봐요.
여러 선배님과 선생님들이 연극을 놓지 못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삼시세끼>에 이순재 선생님이 방문하셨을 때, 저녁을 다 먹고 쉬는 시간에 연극 대본을 보고 계셨어요. 그 옆에서 “선생님, 연기를 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물었는데, “몰라, 나도 연기가 어려워”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연기에 대해 뭘 좀 안다고 할 수도, 정의 내리기에도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히 추측해보자면 배우가 연극 무대로 향하는 이유는 계속 공부하고 싶어서일 것 같아요. 연기는 끝이 없으니까요.

무려 10년 만에 무대를 앞둔 심정은 어때요?
10년 전 무대에서 했던 작품이 뮤지컬 <요셉 어메이징>이었으니까 연극은 20년 만이에요.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표현할까 기대되면서도 솔직히 많이 떨려요. 주변에 티는 안 내고 있는데, 얼마 전에는 악몽도 꾸었다니까요.

어떤 꿈이었어요?
1막이 끝나고 대기실에서 물을 마시고 커피를 찾는데, 갑자기 누가 “2막 지금 올라갑니다” 하더라고요. 아쉬운 마음으로 무대의 막이 걷히길 기다리는데 대사가 기억이 안 나요. 2막 첫 신, 첫 대사가 나인데 도저히 기억나지 않고, 옆의 동료 배우에게 물었더니 본인도 모른다고 해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온몸이 떨렸어요. ‘어떡하지? 이거 뭐지?’ 하며 무대로 꾸역꾸역 나가던 중 꿈에서 깼어요.

지독한 악몽이었네요.
생각보다 걱정과 압박이 큰가 봐요. 머리가 하얘지더라도 무의식중에 연기할 수 있도록 연습을 더 해야겠다고 뼈저리게 느꼈어요.

무명 배우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개인적으로 ‘바나바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죠? 계속하고 있나요?
지금은 멈췄어요. 더 잘됐어야 하는데 결과만 놓고 보면 아쉬워요. 과거 저와 비슷한 상황의 배우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시작했어요. 광주에서 혈혈단신 상경해서 이쪽 일을 하려고 했을 때 한없이 막막했거든요. 누군가의 미래를 책임질 수는 없지만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독백 영상, 인터뷰, 프로필, 연락처가 담긴 영상을 하나씩 제작해주는 작업이었어요. 아는 감독님들께 일일이 전달하고요. 무명 때는 내 연기를 보여주는 기회가 정말 고프거든요.

업계의 선순환을 위해 누구보다 노력하네요.
지금 함께 연습하는 동료 중에도 기회를 기다리는 친구들이 있어요. 그래서 얼마 전에 회식하자고 날 잡고 <소방서 옆 경찰서>를 함께한 신경수 감독을 초대했어요. 주변에 아는 분들 있으면 연습 때 보러 오라고 영업하기도 하고요.

연극이 개막하고 꼭 초대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중학생 때부터 친하게 지내는 친구 3명이 있어요. 사실 걔들 덕분에 제가 연기를 계속할 수 있었어요. 연기가 재미는 있지만 분장하고 무대에 오르는 게 이상하게 부끄럽더라고요. 한창 짓궂을 때라 누가 알면 놀릴까 무서웠고요. 남들한테 연극한다고 말 못하고 연습하다가 첫 공연을 올리는 날이 왔죠. 누군가를 초대해야 하는데 부를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때 큰 용기를 내서 이 친구들을 불렀어요. 놀림을 받더라도 얘네한테 당하자 싶어서요.

공연이 끝난 뒤 반응은 어땠어요?
“너무 멋있다, 언제 이런 걸 했느냐”면서 진심으로 축하해주더라고요. 그놈들이 꽃다발까지 사왔다니까요. 그때 그렇게 존중받지 못했다면, 축하받지 못했다면, 지속할 수 있었을까 종종 생각해요.

    에디터
    김정현
    포토그래퍼
    YOON SONG YI
    스타일리스트
    김선영
    헤어
    백승연(아우라)
    메이크업
    김도연(아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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