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동산>의 ‘막공’이 얼마 남지 않았죠. 실감하고 있나요?
오늘을 포함해 3회가 남았는데 실감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에요. 작품이 끝날 생각을 하면 그 감정에 젖어 두나에게 영향을 끼칠 것 같아서요.
화제의 작품이죠. 송도영(전도연 분)의 집에서 일하는 젊고 아름다운 가정부 두나와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요?
지난해 연극 <파우스트>를 관람했어요. 그 당시 박해수 선배님을 비롯해 무대 위 배우들을 보고 새로운 감정이 막 몰려오더라고요. 편집되지 않은 연기를 하는 것, 보는 것이 연극의 매력임을 처음 알았거든요. 막연하게 궁금하고 호기심이 일더라고요.
어떤 감각의 호기심이었어요?
일정 기간 똑같은 연기를 하는 건 어떨까, 그 과정은 어떨까 궁금했어요. 큰 무대에서 관객이 바라보고 있을 때 흔들리면 안 될 텐데 어떻게 뚝심 있게 균형을 잡고 이어갈까 하는 궁금증이 계속 생기더라고요. ‘언젠가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꿈을 품고 있었는데, 소속사에서 <벚꽃동산>이라는 작품을 소개해줬어요. 도전해 볼 의사가 있는지 물어보셔서 바로 좋다고 했죠.
이후 과정은 어땠어요?
연출가 사이먼 스톤과 줌 미팅이 성사됐어요. 제 작품을 미리 찾아 보셨더라고요. 이후 그가 연출한 연극 <메디아(Media)> 공연 실황을 관람하며 꼭 작업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다행히 저를 좋게 봐주셨어요.
소망이 이뤄졌네요. 함께하는 과정에서 특별함이 있었나요?
배우들과 허물없이 소통하려 하고 새로운 형식을 제시하고 틀을 깨는 연출가였어요.
그가 깨우쳐준 새로운 가치가 있나요?
무대에 오르면 ‘실수하지 말자’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사이먼은 자꾸 실수를 하라고 해요. 심지어 공연을 할 때도요. 실수를 해야 상대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고, 본인 역시 새로운 자극을 받으며 새로운 무언가가 탄생한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곧 <벚꽃동산>이라는 극의 완성이라 믿었고요.
배우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디렉션 같아요.
맞아요. 제가 느끼기에 사이먼 스톤은 배우를 너무 좋아해요. 좋아하는 걸 넘어 사랑하는 것 같아요. 언젠가 들은 얘기로는 사이먼은 캐스팅하고 글을 쓴다고 해요. 그가 쓰고 싶은 글과 배우에게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작품이 완성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일까요? 유림 씨와 대화하고 있는데, 두나와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말투와 작은 제스처 하나까지도요.
최근에 제 지인도 그 얘기를 하더라고요.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타인에게 이 이야기를 들으니까 무척 신기했어요.
일본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그리고 연극까지. 늘 새로운 현장을 탐닉하는 것 같아요. 동력이 무엇인가요?
누군가 제게 “도파민이 잘 안 도는 사람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연기할 때와 영화 볼 때, 여행할 때 말고는 자극을 잘 느끼지 못하더라고요. 도파민이 나오는 순간이 좋으니까 끊임없이 그 기회를 좇는 것 같아요.
연극을 하며 도파민이 폭발한 순간은 언제였어요?
공연이 끝나고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저도 모르게 함성이 터져 나와요. 그야말로 ‘미치게 재미있어요’. 아쉬울 때도 있지만 결국 재미있거든요.
기라성 같은 배우들과 모든 과정을 함께했어요. 그 현장은 어땠어요?
선배님들과 작업하며 ‘깊이’에 대해 고민하는 법을 배웠어요. 생각의 깊이, 상상하는 것의 깊이, 표현하는 것의 깊이,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를 더 고민한 것 같아요.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궁금해하는 선배님들을 보면서 안주하지 않고 안심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왠지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더 크게 느낄 것 같아요.
연극영화과를 전공하던 시기에도 연극 무대에 올랐어요. 당시와 비교하면 어때요?
무대에 오르긴 했지만 완전히 다른 경험이에요. 이번 연극을 하면서 스스로 배우라고 소개할 수도 있게 되었고요. 사실 지금까지 누가 직업을 물으면 ‘연기 공부를 하고 있어요, 연기하는 사람이에요’ 정도로 소개했거든요. 조금씩 배우의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해지고 있어요. 지금은 스스로 배우라고 당당히 소개하기도 해요.
일에 대한 확신인가요?
일이 더 좋아졌어요. 재미와 애정이 증폭된 것 같아요. 계속 나아가야겠다,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들어요.
몇 달간 두나와 지내며 첫인상과 크게 달라진 부분이 있어요?
두나에 대해 많이 알게 됐지만 완전히 알지는 못해요. 두나는 당돌하고 발칙하고 원하는 걸 확실하게 표현하는 친구예요. ‘왜 이렇게까지 사랑에 목매는 걸까? 이 상황에서 왜 이런 선택을 할까? 왜 두 남자 사이에 끼어 있는 걸까?’ 하는 고민을 했고, 하면 할수록 본인이 진짜 원하는 건 잘 모르는 친구 같더라고요.
왜 그토록 사랑에 목매는 것 같아요? 사랑을 책임지기 싫어하는 이주동(이주원 분)과 헌신적인 신예빈(이세준 분) 사이에서 치열하게 갈등해요.
20대에는 사랑이 너무 중요한 시기라는 생각도 들었고, 두나의 결핍은 사랑이 아닐까 싶었어요. ‘왜 예빈은 안 되고 주동이어야만 할까?’라는 질문도 끊임없이 쏟아졌고요. 두나의 과거를 생각하면서 이해하려고 애썼죠.
4막에서는 예빈을 선택하죠. 그 마음은 뭘까요?
4막을 대하는 마음은 저도 매번 달라요. 순수하게 예빈과 다시 잘해보려고 할 때도 있고, 주동에게 모진 말을 듣는데 그게 제가 예빈한테 했던 행동이거든요. 어느 순간 예빈에게 한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싶어서 갈 때도 있어요. 의식한 적은 없는데 무대 위에서만큼은 그 인물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무대 위 모든 배우들이 그래요.
매번 같은 걸 연기하는 반복의 과정이 낯설지는 않았나요?
어려웠죠. 어제의 두나, 오늘의 두나, 내일의 두나를 새롭게 받아들여야 하는 게 어려우면서도 재미있어요. 익숙한데 낯설게 받아들여야 하는 균형을 찾는 과정이 힘들었어요. 사이먼 역시 배우들이 역할에 익숙해지는 걸 원치 않았고요. 자꾸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과정이 정말 즐거웠어요. 연극이 진짜 재미있는 건‘상대의 눈을 본다’는 점 같아요. 상대 배우의 눈을 보면 제 감정인지 두나의 감정인지 헷갈릴 정도로 매료돼요.
연극을 하면서 처음으로 ‘출퇴근’을 경험했다고요. 순조로웠나요?
규칙적으로 일하다 보니 남는 시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희서 언니에게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고 물으니 운동도 하고, 공연이 늦은 시간이면 낮잠도 자면서 나름의 루틴이 있더라고요. “유림이 너만의 루틴도 만들어질 거야”라고 하셨는데, 어느 순간 저만의 방법도 생겼어요. 일어나서 스트레칭하고 대본 보고, 운동 갔다가 공연장으로 오는 차 안에서 잠을 좀 자고. 그 시간도 작품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인 것 같아요.
연극 무대에 또 서게 될 것 같아요?
영화든 드라마든 연극이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제가 연기할 수 있는 곳이라면, 그리고 새로운 흥미를 돋우는 작품이라면 뭐든 하고 싶어요. 이렇게 좋은 선배님들과 동료, 연출과 함께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에요.
기억에 남는 응원이 있어요?
많은 말을 해주지는 않아도 다 느껴져요. 희서 언니는 항상 “오늘도 우리는 재미있을 거야!”라고 외쳐주고, 도연 선배님은 눈으로 말씀해주세요. ‘우리 오늘 너무 재미있게 잘 했구나’하는 감정이 느껴져요, 해수 선배님은 엄지척하고 지나가세요. 선배님들이 저를 바라보는 눈이 너무 좋아요. 내가 틀리지 않았구나, 우리가 같이 잘 맞춰서 가고 있다는 든든함이 채워지는 것 같아요. 제가 평소에 ‘소속감’을 느끼는 속도가 느린데 지금은 불이 화르르 지펴졌어요.
사랑이 더 커진 것 같아요.
이번 작품을 하면서 증폭됐어요. 이 기분, 이 느낌 때문에 작업을 사랑하는구나. 선배님들도 마찬가지고요. 원래 사랑은 함께 있어야 더 커지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