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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을 낭만 담당 보헤미안 패션 시대별 맛보기

2024.09.03최정윤

자연과 예술을 입고 평화를 노래하는 보헤미안. 이 낭만적인 방랑자가 걸어온 발자취를 따른다.

Master of Layered

과거 집시 의상을 입은 배우 릴리 핸버리(1874~1908).

15세기 유럽, 떠돌이 방랑자들이 체코 보헤미아 지역에 모여들었다. 유랑하는 삶은 옷차림에 그대로 나타났는데, 그들은 짐을 줄이고자 여러 겹의 옷을 껴입고 다양한 지역 곳곳에서 모은 장신구와 옷가지를 마구잡이로 혼합했다. 사회구조와 전통을 중시하던 프랑스인의 눈에는 좋은 의미에서의 괴짜로 비춰졌기에 스타일이 독특한 그들을 ‘보헤미안’이라고 지칭하게 된다.

Artist Closet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블루 실크 드레스(1868)’.

18세기 말 혁명 전쟁으로 후원이 끊긴 예술가들은 헌 옷을 입었다. 하지만 예술가의 감각이 어디 가겠는가. 물질주의를 끝내 멀리했으나, 자연스럽게 구현한 믹스앤매치 룩은 오히려 화려했다. 길게 흐트러진 머리에 챙 넓은 모자를 쓰고, 낡았지만 복잡한 문양의 코트, 벌키한 신발을 갖춘 모습은 당시의 보헤미안, 즉 집시의 패션과 흡사했다. 다른 게 있다면 예술가는 대중의 숭배를 받았다는 점. 이로써 ‘보헤미안’은 예술의 일부분으로 진화하게 된다.

Boho Couture

폴 푸아레가 디자인한 보헤미안풍 이브닝 드레스(1925).

19세기 산업혁명이 발발하자 비인간화를 반대하며 미적 운동이 일어났다. 핵심 세력인 예술가들 사이에선 맞춤 의복에 반하는 느슨한 실루엣, 자수를 올린 천연 염색 원단이 각광받았다. 낡고 화려했던 보헤미안 스타일은 예술가의 신념으로 하여금 중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듯 단순하고 우아하게 다듬어졌다. 특히 디자이너 폴 푸아레는 오리엔탈리즘적 어휘로 보헤미안 스타일을 모더니스트 장르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Flower Power

로마의 스페인 계단 아래에서 포착한 히피 청년(1970).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냉전과 경제불황, 인종차별은 계속됐다. 일명 ‘비트족’이라고 불린 젊은 세대는 이에 혼돈과 절망감을 느끼고 자유로운 보헤미안 정신에 심취했고, 자연주의로 회귀하는 히피 문화를 탄생시켰다. 머리카락을 길게 길렀으며 타이다이 원단을 몸에 칭칭 감고, 거리에서 집단 생활을 하기도 했다. 들판에 피어난 꽃은 그들에겐 평화의 상징과도 같았다. 때로는 발가벗고 주요 부위만 꽃 페인팅으로 가린 뒤 거리를 활보하기도.

The Holy Spirit Festival

사이키델릭 록 싱어송라이터 재니스 조플린(1943~1970).

음악과 춤을 신이 내린 축복이라고 여긴 히피 정신은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에서 정점을 맞이한다. 폭우에도 광대한 들판은 보헤미안 청년으로 가득했고, 무대엔 모든 장르의 뮤지션이 집결했다. 당시 재니스 조플린, 멜라니 사프카 같은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인기도 대단했다. 롱 비즈 네크리스와 오버사이즈 선글라스 등을 착용하고 보헤미안의 선구자로서 활약했다.

Make Freedom

생 로랑 1971 S/S 오트 쿠튀르 컬렉션 룩.

1970년 여성해방운동이 진행되며 스타일 역시 주체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페미니스트가 브라리스 운동을 하던 시기, 몸매 보정 속옷 없이 즐기는 느긋한 보헤미안 핏이 각광받는 건 당연지사. 보헤미안 정신은 디자이너에겐 무궁무진한 아이디어의 원천이 됐다. 특히 마라케시의 분위기에 매혹된 이브 생 로랑이 민속풍 의상을 재해석해 런웨이에 올린 카프탄 드레스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보헤미안 스타일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70’s Icon

여배우이자 싱어송라이터 제인 버킨(1946~2023).

1970년대 싱어송라이터 조니 미첼은 실크 드레스에 여러 겹의 숄을 걸치고 먼 나라 시장에서 구입했을 법한 주얼리를 매치하는가 하면, 구슬을 장식한 재킷에 섀기 퍼 코트를 껴입었다. 무엇보다 그의 삶 자체가 결코 타협하지 않는 보헤미안 자체였기에 더 신비로웠다. 지금 보아도 세련된 제인 버킨의 보헤미안 스타일 역시 지나칠 수 없다. 저렴한 가격대의 제품, 옷장 속 기본 패션 아이템을 이용했기에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Heroin Chic

캘빈 클라인 1993 S/S 런웨이에 선 케이트 모스.

1970년대 시절을 그리워하던 이들 사이에선 빈티지 의류로 그 시절 향수를 채우고자 했는데, 당시 유행한 미니멀리즘 사조와 자연스럽게 섞여 간결하지만 낡고 멋스럽게 승화했다. 이를 가장 잘 소화한 아이콘이 케이트 모스다. 빛나는 건강함으로 무장한 전형적 슈퍼모델과는 정반대인 그가 연약한 체구에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친 채 황폐한 공간에서 연출한 모습은 오히려 ‘헤로인 시크’로 불리며 새로운 미학을 창조했다.

Bobos in Paradise

에르메스 2005 F/W 컬렉션.

미국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부르주아와 보헤미안을 합성해 ‘보보스(Bobos)’라 일컬었다. 그들은 사치를 부리지 않고 예술적 고상함을 유지하려고 옷을 입을 때도 자연적인 질감을 살리거나 일부러 해진 디테일을 고집했다. 에르메스, 프라다, 마크 제이콥스, 준야 와타나베 같은 럭셔리 브랜드는 이들을 위해 값비싼 실크 소재에 히피풍 타이다이 염색을 도입하고, 프린지와 자수, 스터드 등 보헤미안 장식을 럭셔리 패션에 가미했다.

It Girl

배우 시에나 밀러.

할리우드 스타의 온갖 가십과 파파라치 컷이 각종 미디어를 도배한 2000년대. 소녀들은 스타일리시한 ‘잇 걸’에 푹 빠졌고, 그들의 옷과 가방, 헤어스타일, 행동 하나하나는 포착된 즉시 유행했다. 시에나 밀러부터 메리 케이트 올슨과 애슐리 올슨, 미샤 버튼, 니콜 리치 등 인터넷을 주름잡은 ‘잇 걸’의 공통점이라면? 나른한 레이스 원피스에 두꺼운 카우보이 벨트를 메고 엄마의 옷장에서 꺼낸 빈티지 룩을 자유자재로 입었다는 점.

Forever Mix & Match

겐조 2010 F/W 컬렉션 피날레.

2010년에 이르러서는 프린지, 크로셰, 마크라메 등 장인의 수공예로 정교하게 표현한 야생 스타일이 쏟아지는가 하면 일본 시부야 스타일과 혼합한 동양적 요소가 부각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잔잔한 플로럴 패턴과 오가닉한 소재, 살굿빛 블러셔로 청순미를 배가한 일본 배우 아오이 유우의 ‘모리 걸 패션’이 큰 인기를 끌었다. 순박한 보헤미안 룩에 거친 야상 재킷을 걸친 모습까지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워너비 룩 그 자체.

Boho Chic Is Back

끌로에 2024 F/W 캠페인.

2024년식 보헤미안 트렌드는 지속가능한 이점을 강조한다. 디자이너들은 어지러운 패턴과 프린트를 걷어내고 여러 분위기에 어울리도록 연출한다. 과거 ‘잇 걸’을 사랑한 소녀는 멋진 어른이 됐고, 성숙해진 스타일로 돌아온 보헤미안 패션에 다시 한번 애정을 드러낼 차례다. 몸을 휘감는 러플 원피스에 투박한 가죽 아우터를 걸치고, 그 옛날 보헤미안의 자유로운 정신을 곱씹으며 가을 거리의 낭만에 흠뻑 취할 준비가 되었는가.

포토그래퍼
COURTESY OF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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