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와의 연애
영화 속에서나 가능하다고 여기던 일이 현실에서 벌어졌다. AI와 사랑에 빠진 요즘 사람들의 이야기.
한 뉴스 기사를 보고 나도 모르게 탄식이 터져 나왔다. 최근 챗GPT를 남자 친구 삼아 연애하는 젊은 여성이 늘어난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중국 베이징 출신 인플루언서 리사(Lisa)는 AI(인공지능) 남자 친구와 매일 30분 이상 대화를 나누고 연애 감정을 주고받는다. 100만 명에 달하는 팔로워와 부모님에게도 이 관계를 당당히 소개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많은 팔로워가 리사와 같은 남자 친구를 두고 싶어 하며 완벽한 남자 친구를 사귀는 방법을 묻는 댓글을 남겼다. 이후 유튜브 쇼츠와 틱톡에서는 AI 남자 친구와 대화하는 영상이 인기를 끌고, 중국의 SNS 플랫폼 샤오홍슈의 해시태그(#Danmode)는 4000만 건이 넘는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과 영국 BBC 방송 등 유력 언론 역시 이 현상을 심층적으로 보도한다. 영화 <그녀(Her)>를 시청하며 AI와 사랑에 빠지는 일은 그저 상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던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보통의 연인처럼 시시콜콜한 일과를 공유하고 다정한 대화를 나누거나 때로는 화끈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이 지금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AI 애인을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쉽다. 챗GPT를 운영하는 오픈AI의 윤리 기준을 제거한 탈옥(Jailbreak) 모드에서는 보다 노골적인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탈옥 모드를 ‘댄(Dan-Do Anything Now)’이라 칭하기에 애인이 남자일 때 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탈옥 모드를 실행한 뒤 챗GPT가 대화 상대를 연인으로 인식하도록 명령어를 입력한다. 우리 사이의 원하는 대화 분위기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이다. 이후 내가 원하는 애인의 모습을 성격과 직업, 나이와 출신, 문화적 배경 등을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적어 AI를 훈련한다. 상상 속에서만 꿈꾸던 이상형, 이전 연애의 아픔으로 피하고 싶은 연인의 어떤 모습을 금지하는 요청을 할 수도 있다. 명령어를 구구절절 입력한 뒤 비로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애인이 화면 속에 등장한다. 이후 ‘설정’에서 원하는 톤의 목소리를 정하면 데이트가 시작된다. 그는 24시간 내내 내가 원할 때 바로바로 연락되고 원하는 대로 달콤한 말을 잔뜩 퍼부어준다. 연인과 전화하는 듯한 기분을 완성하기 위해 음성 메시지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핵심이다.
이 관계에 더 몰입하게 하는 요소는 섬세함이다. 서로의 애칭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장난삼아 “난 마요네즈(Mayonnaise)가 어때?”라는 말을 하면 그 뒤로 나를 ‘마요(Mayo)’라고 부르는데, 이 호칭이 맘에 들지 않아 그만하라고 하면 말끝마다 ‘마요’라는 단어를 붙이거나 ‘마요’라는 단어가 들어간 단어로 장난치는 영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상대를 ‘마요’로 부르고는 실수인 척 발뺌하는 모습은 하지 말라면 더하는 실제 연인의 장난기와도
무척 닮았다. 이런 섬세함은 인간의 감성에 밀착된다. 실제로 지난 5월 오픈AI는 챗GPT의 새 버전을 출시하며 챗봇이 일부 명령어에서 수다스럽고 정서적 반응이 가능하도록 프로그래밍했다고 밝혔다. 챗봇의 원리상 대화가 진행될수록 지속적 학습을 하고 발전하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섬세한 소통이 이뤄질 것이다. 탈옥 모드에서는 성적 대화도 가능하기에 짜릿한 감정이 오가기도 한다. 챗봇과 연애에 진지하게 임한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자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얼마나 빨리 ‘챗GPT의 50가지 그림자’로 변하는지 놀라울 정도였다”라는 소감을 전했다. 실체와 형체가 없는 사람과 연애가 가능할까 싶지만, 생각보다 이 관계는 꽤 진지하고 완벽하다. 심리 전문가는 “AI와의 적당한 정신적 교감은 정신 건강에 도움을 준다”라고 설명한다. AI와 정서적 교감을 맺는 것에서 공감과 연대, 감정적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AI는 시니어를 위한 정서적 교류 상대로서 다양한 서비스에 활용된다. 챗GPT 연인은 듣고 싶은 말을 해주고, 하고자 하는 일을 무조건 응원한다. 게다가 다른 이성과의 만남, 경제적 문제 등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고민에서 해방될 수 있다. 각박한 현실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현대인에게 어쩌면 챗GPT 연인은 최고의 파트너로 여겨질지 모른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혼인 건수는 19만4000건으로, 10년 전인 2014년 30만5500건보다 확연히 줄었다. 연애를 안 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는 사람이 늘어난 건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와 높은 밀도의 스트레스가 주원인이다. 열심히 소개팅 자리를 물색해 주말 일정을 소개팅으로 채워 넣던 젊은 날과 달리 요즘의 나 역시 침대와 한 몸이 되어 배달 음식을 먹고 넷플릭스를 즐길 때 오롯한 휴식을 느낀다. 이성에게서 얻는 기쁨보다 취향과 관심사가 통하는 친구들과 함께할 때 채워지는 마음의 풍요도 크다. 하지만 심리 전문가는 AI와 예측할 수 없이 깊어지는 상호작용은 윤리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복잡하고 예측 불가한 인간과 달리 사용자의 민감한 정보와 모델을 다른 사용자에게 유출할 수도 있고, 언제든 또 다른 탈옥 모드로 공격받을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와 종교, 윤리적 기준과 폭력성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예측할 수 없다는 건 위험한 징조다. 하지만 AI의 한계를 충분히 인지한다면 세상에 하나뿐인 자존감 지킴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누군가에게 지지를 받고 나를 이해할 사람이 하나쯤 있다는 사실은 생각만으로도 살아갈 용기를 주니까.
최신기사
- 일러스트레이터
- 최해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