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에서 하나의 긴 테이블에 모인 사람들이 함께 음식을 나누는 ‘아웃스탠딩 인 더 필드’가 한국 최초로 포항 죽장연에서 열렸다. 풍요로운 가을 끝에 걸려 있던 따스한 만찬 속으로.
포항 하면 ‘철강’이 먼저 떠오르지만 포항만큼 모든 것을 두루 갖춘 도시도 드물다. 바다, 산, 들판까지 포항역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자연의 풍경이 펼쳐진다. 빨갛게 열린 청송 사과 과수원을 지나 포항 죽장면 산꼭대기에 오르면 거기 죽장연이, 간장과 된장, 고추장을 품고 줄 지어 늘어선 옹기 수백 개가 있다. 한국의 장맛을 소개하며 셰프와 미식가의 사랑을 듬뿍 받은 죽장연 마당에 120명이 오직 한 끼의 식사를 위해 모였다. 한국 최초로 열리는 미식 행사 ‘아웃스탠딩 인 더 필드(Outstanding in the Field)’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자연 속의 만찬, ‘아웃스탠딩 인 더 필드’
‘아웃스탠딩 인 더 필드’는 환경미술가 짐 데니반(Jim Denevan)이 시작한 프로젝트다. 자연, 농장과 가까운 야외에서 만찬을 즐기는 이 프로젝트는 ‘팜투테이블(Farm-to-table)’에 대한 관심과 함께 큰 호응을 얻게 된다. 실내가 아닌 자연 그대로를 느끼는 이 방식은 음식을 통해 사람과 연결하고, 농업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지역 농부와 문화를 가꾸는 식품 장인에게 존경을 표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참여하는 사람이 100명이든 500명이든 하나로 이어진 긴 테이블에 앉는 것이 가장 큰 특징. 이 테이블에 앉는 순간만큼 모두가 하나 된 ‘가족’으로 연결된다는 거다. 이번 죽장연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한 짐 데니반은 “음식, 문화, 사람들 그리고 유능한 셰프가 모인 이곳이야말로 아웃스탠딩 인 더 필드의 철학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말했다.
뉴욕 키친을 떠나 죽장연의 가마솥을 휘휘 젓고 있던 김훈이(후니킴) 셰프는 “오늘 코스는 모두 죽장연의 장이 주인공이에요”라고 말했다. “마침 방어 시즌이죠. 그래서 방어와 광어, 가자미를 준비했습니다. 간장, 초고추창, 쌈장까지 세 가지 장을 곁들여 맛보실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코스인 송학농장 토종 돼지 삼겹살찜은 간장이 전면에 나서죠. 무가 너무 맛있을 때라 넉넉히 넣었습니다. 지금 만들고 있는 건 강된장입니다. 죽장연 빈티지 된장을 사용했어요. 2015년 된장을 75%, 2018년 된장을 25% 섞어 만들었죠. 한우를 넣어서 5시간을 끓이는 중입니다.” 김훈이 셰프는 2011년 뉴욕에서 운영하는 한식당 최초로 미슐랭 1스타를 획득한 식당 ‘Danji(단지)’에 이어 장에 집중한‘Meju(메주)’를 열었다. ‘메주’라는 이름답게 한국의 장을 적극 사용했다. 미국에서 장맛을 소개하는 동시에, 그 자신이 된장 마니아기도 하다. “죽장연의 장을 사용한 지 벌써 12년쯤 됐어요. 이런 된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요. 저는 된장은 약이라고 생각해요. 아침마다 된장을 먹어요. 단, 그러려면 좋은 된장이어야 하죠. 차이가 크거든요.” 김훈이 셰프의 음식에는 대몽제 1779 청주와 청슬 전통 소주, 와인이 곁들여졌고, 요리연구가 노영희의 전통 한과 모둠이 마지막 디저트를 장식했다.
지속가능한 방식의 미식
단풍으로 물든 먼 산을 바라보며 음식을 나누는 경험은 그 자체로 특별하지만, ‘아웃스탠딩 인 더 필드’는 한발 더 나아가 탄소발자국을 줄이고 지속가능성을 도모하는 자리다. 지역의 먹거리, 지역의 노하우에 대한 존중은 곧 환경을 생각하는 일이기도 하다. 소담스럽게 담은 사과는 같은 산에서 재배된 청송 사과이고, 광어와 방어, 가자미는 모두 포항 앞바다에서 잡은 것. 쌀 역시 죽장면에서 재배한 죽장쌀이다. 죽장연의 장을 담그는 데 들어가는 재료는 전통 방식 그대로 콩·소금·물 세 가지뿐. 콩은 포항·청송 등 죽장연 인근 지역에서 생산한 것이고, 물은 지하 200m에서 끌어올린 암반수다. “죽장연은 지역과는 떨어질 수 없습니다. 장을 담그는 전통 방식은 죽장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조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고, 우리의 엄마, 할머니, 증조할머니를 거치면서 2000년이나 된 것입니다. 우린 그저 한국 어머님들의 지혜를 계승한 것뿐이죠. 죽장연에서는 20여 명의 상사리 어머님들이 다 같이 일합니다. 전부 훌륭한 농부고, 진심을 다해 좋은 장을 만들죠. 또 이곳의 자연환경은 와인의 테루아(Terroir)와 같습니다.” 죽장연의 대표이자 오늘 행사의 또 다른 주역인 정연태 대표의 설명이다. 더불어 그는 “사람과 자연환경이 맛있는 장맛을 좌우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죽장연이 위치한 곳은 태백산으로, 해발 450m에 달한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뚜렷하고, 햇빛과 바닷바람까지 장의 완성에 일조한다. “모든 옹기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정렬되었습니다. 한국의 전통 된장은 시간과 자연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한국 어머님들의 헌신으로 완성되죠.” 매일 햇빛을 쬐는 게 일인 장독대 사이에서, 햇빛을 쬘 일 없는 사람들이 앉아 서로 자기소개를 하며 술과 음식을 나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햇빛이 기울면 기우는 대로 즐기는 사이 해가 뉘엿뉘엿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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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토그래퍼
- 우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