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를 향한 어느 에디터의 고백

시대적 흐름의 선한 의지에 따라 리얼 퍼 구입을 그만둔 지 오래. 그러나 겨울마다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은 과연 무엇으로 달랠 수 있을까?

에디터 J는 모피를 좋아했다. 물론 모피가 한여름 티셔츠처럼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아이템도 아니고, 때때로 사치품으로 분류되는 품목이기에 이왕이면 합리적 금액으로 좋은 모피 아이템을 사려고 동분서주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니까 추운 겨울이면 모피 코트에 머플러를 두르고 특유의 탐스러움과 극강의 따뜻함에 탐복하며 모피는 다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아이템이라고 떠들고 다니던 때가 불과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신입 시절, 겁도 없이 할부로 좋은 모피 베스트를 사고 몇 달 동안 힘겹게 지냈던 것, 모 브랜드에서 세일한다고 먼 곳까지 차를 끌고 갔다가 광고에 속아 빈손으로 돌아온 것, 체격 차가 있는 엄마의 모피 코트를 몰래 입고 나가 하나는 겨드랑이를 찢어먹고, 다른 하나는 난롯불에 그을려 크게 혼난 것 등 모피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차고도 넘친다.

하지만 근 10년 동안 세상도, 에디터 J도 변했다. 여전히 모피를 찬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후변화에 관심을 갖고, 지속가능성을 따지고, 동물보호에 힘써야 하는 것이 화두인 요즘, 리얼 퍼의 입지는 한결 좁아졌다. 에디터 J 역시 어느 순간 모피의 따뜻함이 양심의 가책을 받는 지난함으로 둔갑했다. ‘남의 털이 제일 따뜻해’라며 모피를 두고 쉽게 한 말들이 생각할수록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때부터는 모피의 대체품을 찾아 발품을 팔았다. 이른바 ‘에코 퍼’라 불리는, 이름만으로도 환경보호에 일조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신세계로의 입문. 새로운 에코 퍼 브랜드가 론칭하면 가장 먼저 달려가 입어보았고, 국내 디자이너 에코 브랜드를 응원하고 격려하기 위해 기획 기사로 구성해 웹사이트에 싣기도 했다.

그러나 에코 퍼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이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많은 브랜드에서 ‘에코 퍼’라고 홍보하는 아이템 중 친환경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극소수이고, 대부분이 화학섬유로 제작하는 인조 모피인 것. 그야말로 그린워싱으로 수혜를 입은 브랜드들의 민낯을 마주하기도 했다. 인조 모피는 동물의 희생은 막았을지언정, 화학섬유도 엄연히 플라스틱이라는 점에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고 할 수는 없다. 그나마 이미 존재하는 플라스틱을 재사용해 만든 인조 모피는 쓰레기 자원을 다시 사용했다는 점에서 비교적 친환경적이다. 그리고 이런 에코 퍼의 또 하나의 허들은 대부분 예쁘다는 기준을 밑돈다는 것. 아무리 ‘진짜 같은 모피’라고 홍보한들 진짜가 가진 윤기를 100% 구현할 리 만무하고, 털이 뭉치거나 빠지는 소재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제한적 디자인만 채택하는 까닭이다. 지구를 생각한다면 에코 퍼 아이템을 이용하는 게 맞지만, 심적으로 끌리지 않는 에디터 J는 결국 빈티지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빈티지 모피가 해답일까

왕년에(?) 광장시장에서 가죽 재킷과 무스탕을 사던 가락은 어디 가지 않았다. 그것이 온라인으로 자연스럽게 옮겨왔을 뿐. 참고로 잘파세대(Z세대와 알파세대를 함께 부르는 용어)의 소비 트렌드 중 하나 역시 빈티지 패션이다. 소비를 과시하던 밀레니얼세대와는 극명히 다른 잘파세대. 그들은 이미 세상에 쏟아져 나온 많은 옷을 두고 왜 굳이 또 새 옷을 사야 하는가, 스스로에게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경제적 손실과 환경파괴를 모두 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는 빈티지 마켓에서 산 옷으로 스타일링하는 틱톡도 대유행!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국의 모피 브랜드 ‘에드워즈-로웰 퍼(Edwards-Lowell Furs)’는 급감하는 매출의 반등을 노리고자 회사의 방향성을 수정했다. 이미 가지고 있는 모피를 더 오래 지속가능하게 입을 수 있도록 특수 클리닝, 냉장 보관, 수리와 리폼은 물론 렌탈 서비스까지 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 오래된 재고는 중고 경매를 통해 상상을 초월하는 매출을 올렸으니, 고급스럽고 소중한 아이템은 그에 맞게 보관하고, 그렇지 못한 것에는 새 생명을 불어넣으라는 그들의 모토는 판세를 백팔십도 뒤집어 새로운 차원의 쇼핑을 경험하게 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미국 내 고객만 대상으로 한다는 것. 한편, 업사이클 빈티지 퍼를 표방하는 네레하(Nereja)는 <하퍼스 바자>와 <보그> 패션 디렉터였던 스베타 바쉬엔약(Sveta Vashenyak)이 2020년에 시작한 브랜드다. 심각한 기후위기 속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네레하는 중고 모피 아이템을 캐주얼하고 힙한 느낌으로 스타일링해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었다. 카일리 제너가 네레하 광고 캠페인에 나온 스타일을 똑같이 재현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는데, 시즌제가 아닌 드롭 방식으로 새로운 컬렉션이 드롭될 때마다 새로운 퍼는 물론 그만의 퍼 스타일링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빈티지 퍼를 전문적으로 업사이클해 신뢰 있게 판매하는 곳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당근마켓’이나 ‘번개장터’ 등 중고 마켓에서 활발히 거래되고 있으며, 인스타그램에서 #VintageFurs 같은 해시태그를 이용해 빈티지 모피를 판매하는 셀러를 만날 수 있다. 또 중고 모피 매입만 전문으로 해 옷장에 하릴없이 잠들어 있는 모피를 현금화할 수 있는 사이트도 성행 중이다. 최근 이 같은 알고리즘의 영향 덕분인지 ‘동묘에서 중고 모피 찾기’ ‘동묘의 패셔니스타’ 같은 콘텐츠가 SNS에 자꾸 떠서 오랜만에 가보았는데, 역시 동묘는 시간이 아주 여유롭고 하나하나 뒤져볼 수 있는 인내심과 수많은 아이템 중 좋은 것을 알아보는 눈썰미 있는 사람만 보물을 찾을 수 있겠다는 것이 에디터 J의 결론이다(그는 ‘여유로운 시간’ 단계에서 포기).

그러나 빈티지 모피가 윤리적 측면에서 반드시 면죄부를 얻는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빈티지 모피를 구입하는 행위 역시 동물을 사용한 비도덕적 맥락을 긍정하는 셈이 된다고 한다. 빈티지 모피가 아름답게 소개될수록 리얼 퍼의 필요를 부추기며, 새로운 모피 생산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비판적 시각이다. 매 시즌 패션위크 기간, 런웨이에 난입해 모피 사용 중지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경파의 마음이 이럴 것이다. 갖고 싶은 빈티지 모피를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긴긴 시간 결제하지 못하는 에디터 J의 마음 한편에도 이것이 과연 바람직한 대안이 맞는지, 더 나은 방법은 없는지에 대한 정확한 답을 내리지 못해서는 아닐까?

해소되지 않는 마음을 품고 오늘도 온라인 빈티지 모피 마켓을 기웃거린다. 이번에는 숄과 머플러가 더해져 어떤 아우터에나 쓱 걸치기만 해도 돋보이게 할 모피 아이템 하나를 골랐는데, 역시 결제는 아직 하지 않았다. 이미 생산된 제품을 재사용해 만든 아이템이니 기분 좋게 구입할지, 지금보다 더 발품을 팔아 생산과정에서 환경 영향이 적고 디자인도 퍽 마음에 드는 에코 퍼를 찾을지, 그도 아니면 모피에 관한 한 진짜든, 가짜든, 에코든 기억에서 싹 지우고 마음을 뺏길 다른 소재를 찾아 망망대해로 떠날지. 만약 이것이 자신의 이야기라면, 당신의 선택은?

    포토그래퍼
    현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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