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국’ 우울증
어수선한 시국과 비극적인 사고까지. 2025년을 시작하는 마음이 가벼울 수 없는 이유다. 모두가 입을 모아 우울감과 무기력감에 빠졌다고 하는 요즘, 외부 사건으로 인해 요동치는 마음을 어떻게 다독일지 정신과전문의에게 조언을 구했다.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상담할 때는 두 가지에 주목한다. 하나는 그들이 상상으로 불안해하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를 따진다. 비행공포증이 있는 사람에게 그가 염려하는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을 일깨움으로써 안심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희박한 가능성에 불과하다고 믿었던 사건이 실제로 발생하면 이런 식의 접근법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두 번째는 자기 효능감을 키우게 한다. 주어진 현실과 다가올 미래를 부분적으로나마 개인이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강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가 파괴적일 정도로 극적일 경우에는 자기 효능감에만 기대면서 정신 건강을 지켜낼 수 없다. 가벼운 스트레스에는 효과적이지만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갑자기 닥치면 자기 효능감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요즘이 그렇다.
공기가 오염되면 몸이 아픈 것처럼, 사회가 오염되면 정신에 병이 든다. 자기 마음만 챙겨서는 정신 건강이 담보되지 않는 이유다. 이럴 때 마음에서만 문제를 찾으면 ‘내가 못 나서 그런 거야, 내가 더 노력해야 했어’라며 괜한 자책감만 조장한다.
상상치 못한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면 불안해하는 게 당연하다. 그럴 때 “나는 왜 이렇게 마음이 약한 거야!”라고 자신을 타박하면 안 된다. 시국이 어수선하면 기분도 요동칠 수밖에 없다. ‘어, 이러다 우울증이 재발하는 거 아니야!’라고 겁부터 먹어선 안 된다. 충격적인 뉴스를 보고 나면 그 장면이 자꾸 생각나 잠들기 힘들어지는데, 이걸 두고 “수면장애가 생겼어!”라고 단정하면 곤란하다.
슬픔과 실의에 빠진 이들을 우리는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자신이 무정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져 보고 나면 더 괴로워지는데도 관련 동영상을 계속 찾아보는 환자가 있었다. 나는 그에게 “영상은 보지 마세요. 충격적인 사진도 금물이에요. 꼭 보고 싶다면 밝은 낮에 시간을 정해놓고 보세요”라고 조언했다. 정서적으로 민감한 이라면 애통함에 젖어 심리적으로 휘청거리지 않게끔 자신을 보호할 수도 있어야 한다. 분노를 자극하는 뉴스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심리적으로 튼튼한 사람도 정신 건강에 빨간불이 켜진다. 언젠가부터 나는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보기는 하지만 작정하고 TV 뉴스를 시청하지는 않게 되었다. 기사로만 뉴스를 읽는다. 즉각적으로 판단하거나 반응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상사가 변해가는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는 편이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자신조차 구원하지 못하면서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인간에게 관심 가질 필요를 못 느껴서다. 그러다 보니 환자에게도 “평정심을 유지하려면 정치 문제, 사회 이슈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세요”라고 조언한다. 정치인과 사회 참여적 사람이라면 이런 나의 태도를 탐탁지 않아 하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개개인의 정신 건강을 돌보는 일이 이 세상 무엇보다 먼저라고 믿기 때문이다.
해묵은 정치 갈등은 해결 기미가 안 보이고, 상상도 못한 비상계엄으로 사회는 극도로 분열되고, 물가와 환율은 솟구치고, 주가는 급락하고, 이전에 겪은 적 없는 경기 한파에 모두가 괴롭다며 아우성친다. 참혹한 현실 안에서 자신이 무능하고 티끌처럼 느껴질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픽션에서만 존재할 것 같던 상황이 현실이 된다면 어떤 태도로 견뎌야 할까? 세상은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와 같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삶은 흘러간다. 괴롭다고 하루 종일 얼굴을 찌푸리고 있어선 안 된다. 겁에 질려 우왕좌왕하기보다는 주어진 일과를 마무리하고, 운동하고, 음악 듣고, 책을 읽고, 친구와 수다 떨고, 따뜻한 물로 목욕하고, 기도하고, 가족과 함께 밥을 먹어야 한다. 이런 일상이 비록 폭풍우를 잠재우진 못해도 상처 난 우리의 영혼을 달래줄 수는 있다. 성난 파도에 떠밀린 채 위태로운 배 위에서 겁에 질려 있더라도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찾아 우리는 멈추지 말고 노를 저어야 한다. 문득 폴 오스터의 소설 <4 3 2 1>의 구절이 떠오른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유일한 건 똥뿐이다, 얘야. 모두들 매일매일 발목까지 똥에 담그고 사는 거지. 하지만 가끔씩, 그 똥이 무릎이나 허리까지 차오르면 말이야, 그냥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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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김병수(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