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필터가 뭐길래
‘패션 필터’를 쓰면 더 재미있거나 색다른 아름다움이 발견된다고?
그녀는 예쁘지 않아
크리스마스와 새해 사이 톰 홀랜드는 젠데이아 콜먼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젠데이아처럼 예쁘고 멋진 여자를 사로잡다니 톰 홀랜드 완전 럭키비키잖아? 이 설레는 소식에 “젠데이아 너무 예뻐!”를 연신 외쳐댄 나. 한 공간에 있었지만 각자의 취향을 즐기던 친구는 들뜬 기분을 와장창 깨듯 무신경한 목소리로 일침을 날렸다. “젠데이아는 예쁜 게 아니야.” 마치 나에게 한 말처럼 욱해서 되물었다. “What???” 그리고 이어진 대문자 ‘T’ 의 연설은 이랬다. 젠데이아는 누군가에게겐 매력적인 사람일 수 있지만 ‘예쁘다’라는 형용사로 수식될 수 없는 생김새라는 것이다. 화장기 하나 없는 <유포리아> 속 젠데이아의 그 반항미마저 사랑한 나에겐 용납될 수 없는 말. ‘훗, 젠데이아를 잘 모르는 친구군. 널 ‘젠’며들게 만들겠어!’란 생각으로 사진첩에 차곡차곡 저장해둔 예쁜 젠데이아의 모습을 들이밀었다.
제82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레드 카펫에서 농익은 귤색 드레스를 어찌나 우아하게 소화했는지, 휘황찬란 불가리 하이 주얼리 네크리스를 목에 걸고도 기죽지 않던 당당한 애티튜드, 영화 <위대한 쇼맨>에서 분홍 머리를 소화한 그가 공중제비를 도는 몸짓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지만 친구는 나만큼이나 젠데이아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젠데이아는 예쁘지 않아. 넌 지금 ‘패션 필터’를 눈에 끼고 젠데이아를 보고 있어.” 패션 필터(?)라니. 자신을 지극히 평범한 회사원이라고 소개하는 그의 눈엔 오히려 별종으로 보인 패션계 종사자 1人, 바로 나였다. 그는 젠데이아를 ‘예쁘다’라고 수식하는 건 패션 필드에서 ‘예쁜 인물’로 포장하기 때문이라 피력했다. 마치 나를 광고와 미디어에 가스라이팅 당한 사람으로 치부하는 그의 말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우리의 유치뽕짝 티키타카는 급기야 표준국어대사전을 들춰보기에 이르렀다. 사전에 실린 예쁘다의 뜻은 ‘생긴 모양이 아름다워 눈으로 보기에 좋다, 행동이나 동작이 보기에 사랑스럽거나 귀엽다’로 정의하고 있다. 사전적 의미를 곱씹어도 여전히 좁혀지지 않는 두 인간의 논쟁. 눈, 코, 입, 손짓, 발짓, 얼굴을 찌푸리는 근육까지 안 예쁜 구석이 없을 만큼 젠데이아에게 푹 빠진 이와 세상이 본인을 속이고 있다며 도무지 어디가 예쁜지 모르겠다는 이의 생각 차이에는 오롯이 ‘패션 필터’ 존재가 전부일까? – 패션 에디터 C
발이 너무해
애틋한 눈빛과 미묘한 감정이 오가던, 현 남편이 구 남친이던 시절을 떠올린다. 태평양처럼 널찍한 파워 숄더와 바닥에 닿을락 말락 한 길이의 드라마틱한 실루엣을 연출하는 가죽 롱 코트를 걸친 첫 만남 스타일에 고개를 갸우뚱하던 반응을 보인 그. 고밀도의 트렌디한 옷차림은 당분간 자제하겠다고 신경을 곤두세울 때였다. 퇴근 후 만나면 어떻겠느냐는 갑작스러운 데이트 요청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그날도, 스케줄 체크보다 먼저 무얼 입고 출근했는지 거울로 다가가 ‘외모췍’부터 했다. “오늘은 단정한 블랙 룩! 음 좋아~” 신나게 나선 데이트는 맛 좋은 식사까지 곁들여 완벽하게 끝나는 듯 보였다. 이후 집으로 향하는 길. 약간의 음주를 한 탓에 택시를 기다리던 내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도로로 몸이 쏠리던 순간, 시종일관 나이스하던 그는 역시나 나의 몸을 잽싸게 낚아챘고 시선은 자연스레 발 쪽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이어진 의문의 외마디 비명. “으아아아악 발이 왜 그래요?”
그렇다. 나는 파리 출장에서 공수해온 메종 마르지엘라의 신상 타비 슈즈를 신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신은 신발을 발견한 구 남친은 엄지 쪽이 쩍 갈라진 기이하고 낯선(적어도 그에게는) 형태를 보고선 반사적으로 나를 걱정(?)해줬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르고 서로의 얼굴은 동시에 붉어졌으며 그런 디자인의 신발이라는 것을 뒤늦게 이해한 후 멋쩍은 듯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이 귀여운 해프닝은 15세기 일본 전통 나막신 ‘게다’와 짝을 이룬 양말에서 영감 받은 디자이너 마틴 마르지엘라의 시그너처 아이템이라는 설명과 타비 슈즈를 신으면 발이 얼마나 편한지에 대한 덧붙임 말로 일단락됐다. 자칫 짐승의 발처럼 보일 수 있지만 ‘패션 필터’를 쓴 눈으로 보면 정형화된 슈즈 디자인에서 벗어난 획기적인 디테일로 단순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스타일을 완성하는 ‘핵귀요미’ 아이템이라고. 몇 년이 지난 후 바쁘디바쁜 커리어 우먼의 일거수일투족까지 서포트하는 자상한 남편이 된 그는 나만큼이나 패션 트렌드에 통달한 자로 거듭났다. 어느 날 예뻐 보이려 유행하는 눈 밑 블러셔를 톡톡 바른 내게 “수고했다. 눈 밑이 벌겋게 오를 만큼 일하다니”라며 토닥거리는 걸 보면 아직 ‘뷰티 필터’ 장착은 이른 모양이다. – 패션 에디터 K
‘지못미’ 키티
여고생 시절로 돌아간 듯 희희낙락 ‘아무 말 대잔치’를 난발했던 동창 모임. 간만에 ‘으른’으로서의 무게를 내려놓았던 순간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이 스쳤다. “난 가방에 ‘키티’ 달고 다니는 사람은 거르잖아.” 이 무슨 ‘엥?’스러운 소리인지. 가자미눈을 하고 키티를 비롯한 각종 백 참이 주렁주렁 달려 있던 나의 잇백 지방시 부아유 백을 높이 흔들어 보이며 되받아쳤다. “난 이제 아웃이니?” 친구는 뒤늦게 뱉은 말을 주워 담았지만, 또 다른 한 친구는 “온라인에선 자주 거론돼. 특히 쿠로미는 ‘멘헤라’의 특징이라던가?”라며 논쟁을 거들었다. 순식간에 모임은 캐릭터 패션에 찬반하는 두 그룹으로 갈렸다. 순수한 마음이 정신적으로 케어가 필요한 이들을 지칭하는 ‘멘헤라’로 이어진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더 나아가 그들의 독특한 스타일 역시 취향과 개성으로 인정하기에 부정적인 시선은 아쉬울 따름이었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키티’에게 멘탈 케어를 받고 있었을지도. 지난해 키티 50주년을 맞아 출시된 다양한 컬래버레이션 에디션이 유년 시절을 추억하는 즐거움을 전한 건 의심할 여지 없는 진실이니까. ‘키티’ 사건 후 어느 패션 행사장을 방문했다. 오밀조밀 ‘백꾸’를 하지 않은 사람을 찾기 힘들었던 그곳에서 한 선배가 시선 강탈 키티를 장식한 폰을 알록달록한 네일 아트를 한 손으로 소중하게 붙들고 있었다. ‘역시 패션을 사랑하는 사람은 순수함을 제대로 즐긴다니까.’ – 패션 에디터 L
‘패피’와 ‘관종’ 사이
패션위크 기간 도시 곳곳에는 수많은 패션 피플이 몰리기 마련. 2024 F/W 베트멍 컬렉션이 열린 파리의 캉봉 거리도 그러했다. 좁은 골목에서 숨 막힌 정체가 지속돼. 정신이 아득해질 찰나 나의 레이더망에 디자이너 해리 하리크리샨의 고무 튜브 룩으로 빼입은 토미 캐시가 잡혔다. 국내에선 ‘쌈디 옆 베개남’으로 잘 알려진 비주얼 아티스트로 지쳐 있던 내게 그의 신박한 패션은 ‘빅’ 웃음을 선사했다. 그런데 그때, 한 중년 남성이 토미의 튜브 옷을 주먹으로 ‘쾅!’ 치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토미도, 옆에 있던 나도 깜짝 놀라 얼어붙은 순간을 여전히 잊지 못한다. 종종 ‘패션 필터’를 몇 겹이나 쓴 눈에도 도통 이해되지 않는 스타일이 발견된다. 정체성을 드러내는 건지, 화제의 중심이 되고 싶은 ‘관종’인지 해석은 저마다 분분하다.
요즘 ‘패션 업계가 거품인 이유’라는 타이틀로 5년 전에 촬영된 유튜버 잭앤제이쇼의 한 실험이 숏폼으로 회자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보통의 청년 맥스를 값은 저렴하지만 유니크한 아이템으로 치장한 후 주위 반응을 살피는 것이다. 올 핑크 룩에 포장 완충재를 목에 끼고 화보 속에서 볼 법한 포즈를 취하는 그. 실험을 진행하는 유튜버가 바람잡이 역할을 했고 스트리트 전문 포토그래퍼들을 속이는 데 성공했다. 그날 저녁 SNS에 ‘가짜 모델’ 맥스가 도배됐고 패션계의 인기는 허상이란 결론을 도출하며 영상은 끝이 난다. 개인적으로 ‘패션 필터’는 자아를 부정하지 않는 자신감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한다. 맥스가 ‘가짜’였을지라도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진짜’처럼 당당했다. 비난은 넣어두고 좀 더 넓은 시각을 갖춘다면 보다 유쾌하고 행복한 패션 월드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 패션 에디터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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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트 디자이너
- 이청미
-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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