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THREE CITIES / 아이슬란드
<얼루어> 에디터들이 모처럼 휴가를 찾아 떠난 곳은? 아이슬란드, 샌프란시스코, 홍콩에서 보낸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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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언제 예약할 거야?” “이번 주 토요일에 만나서 계획 세우자.” “렌터카는 내가 할 테니 숙소는 네가 해.” 세 문장으로 짐작했겠지만, 여행 출발 한 달 전부터 독촉을 밥 먹듯 하는 나는 파워 ‘J’다. 심지어 일정을 소화하기 힘들 정도로 빡빡하게 짜기를 즐기는 극악무도한 계획형 인간. 족히 2주가 넘게 걸린다는 겨울 아이슬란드 링로드 투어를 8박 9일 일정에 욱여넣은 이번 여행을 봐도 그렇다. 가야 할 곳을 구글 맵에 표시하고 목적지 간 이동 시간과 거리를 계산해 일정을 빼곡하게 짰다. 직항 편이 없어 최소 17시간을 이코노미석에 앉아 옴짝달싹 못하는 경험을 자주 할 수는 없는 일. 언제 또 갈지 모르는데 뽕을 뽑아야지. 그래서 계획처럼 제대로 뽕 뽑았느냐고? 결론부터 말하면 완벽하게 실패했다. 아이슬란드는 스스로를 쉬이 내어주지 않았다.
선택받은 자만이 누리는 곳
아이슬란드 여행은 운칠기삼이 확실하다. 여행자의 순발력도 중요하지만, 여행의 만족도를 좌우하는 건 맑은 하늘을 몰고 오는 ‘날씨요정’의 존재다. 극지방에 가까운 데다 섬이기 때문에 북유럽 나라 중 특히 날씨가 변화무쌍하기 때문. 따뜻한 해가 내리쬐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고 눈비가 몰아쳐 방수·방풍이 가능한 기능성 옷이 필수다. 바람도 많이 분다. 겨울에는 실제 기온이 영상 1℃ 내외인데도, 체감온도가 영하 15℃까지 떨어질 정도로 매섭다. 그래서 평균기온이 영상 15℃ 정도로 비교적 쾌적한 여름이 아이슬란드의 성수기다. 그래도 나라 이름에 ‘Ice’가 붙을 정도면 흰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에 가는 게 맞겠다 싶어 과감히 12월 말에 떠났다. 하지만 날씨요정은 내 편이 아니었다. 그 대신 ‘날씨요괴’가 붙었는지 머무르는 내내 돌풍을 동반한 폭우와 폭설이 찾아왔다.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차를 빌리려 찾은 렌터카 회사 직원에게 섬 전체를 한 바퀴 도는 링로드 투어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더니 눈을 휘둥그레 뜨며 “Are you crazy?”라 할 정도? 심한 눈보라로 눈앞이 전부 하얘지는 화이트아웃을 매일 겪었고, 새벽엔 지붕이 날아갈 듯 날마다 불어대는 바람 소리가 알람을 대신했다. 눈보라와 사투를 벌이다 숙소에 들어가면 하루를 정리할 새도 없이 침대에 쓰러졌다. 도로 중간중간 눈밭에 처박힌 채 도움을 기다리는 차가 심심찮게 발견되는, 사람이 쉽게 누비기 어려운, 실로 대단한 곳이다.
무시무시한 날씨는 여행 4일 차, 남동쪽 거점 도시인 회픈(Hofn)에서 정점을 찍었다. 도로는 이미 눈과 얼음으로 통행 상태가 좋지 못했고, 문 밖에는 회오리바람이 몰아쳤다. 게다가 극야로 하루 중 해가 떠 있는 시간은 고작 5시간 남짓. 남은 5일 안에 섬 3분의 2를 완주하는 건 불가능했다. 서쪽에 위치한 수도 레이캬비크(Reykjavik)로 돌아가기로 한 순간, 이번 여행은 계획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애초에 계획적인 여행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가장 중요한 숙소를 출발 전에 하나도 예약하지 않았으니까. 여름은 몰라도 겨울의 아이슬란드는 도로 통제가 비일비재하고 날씨로 인한 변수가 많아 대부분 당일 목적지를 정하고, 적당한 곳에 숙소를 잡는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도시 전체가 하트로 꾸며졌다는 북쪽 거점 도시 아퀴레이리(Akureyri)와 아늑한 분위기의 미바튼 온천, 거대한 규모의 폭포인 데티포스와 고다포스를 모두 포기했다.
그래도 오로라는 보지 않았느냐고? 천만의 말씀. 오로라 지수가 높은 시기라 쉽게 볼 수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3대가 덕을 쌓아야 만날 수 있다는 오로라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휴대폰에 오로라 알림 앱을 깔고 매일 밤 모니터링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노르웨이와 핀란드 등 주변 나라에서 선명하게 보이던 오로라는 우리를 일부러 피하는 것 같았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야 아이슬란드에 오로라가 떴다는 알림이 미친 듯이 울려댔다.
불과 얼음이 공존하는 땅
지구상의 어느 땅보다 오랜 세월을 견뎠을 듯한 모습이지만, 사실 가장 젊은 땅이라는 아이슬란드는 화산활동 탓에 여전히 뜨겁게 끓고 있다. 2024년에만 7차례나 화산이 폭발했다고. 지열로 형성된 온천수 덕에 섬 곳곳에는 잘 관리한 대규모 온천이 발달했고, 동네 사람끼리 이용하는 작은 무료 온천도 흔하다. 가장 유명한 온천인 블루 라군과 최근 새롭게 문을 연 스카이 라군은 아이슬란드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자리매김했다. 온천마다 편차는 있지만 한국의 10배에 달하는 비싼 물가(덕분에 외식은커녕 매일 마트에서 산 식재료로 핫도그를 만들어 먹었다. 진정 핫도그의 나라!) 탓에 가장 저렴한 입장권이 10만원을 웃돌 정도. 하지만 종일 찬 바람을 맞은 여행객이 따뜻한 온천수에서 피로를 풀기 위해 모여들어 입장권은 매진 행렬을 이룬다. 나는 스카이 라군을 찾아 개인 탈의실과 리추얼 프로그램 7가지가 포함된 ‘Ser 패스’를 이용했다. 하늘을 가득 채운 별을 바라보며 즐긴 온천뿐 아니라, 북유럽 스타일의 건식 사우나부터 스팀 사우나, 보디 스크럽, 크로베리로 만든 허브티 시음까지 나를 돌보기에 안성맞춤인 리추얼 프로그램으로 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다. 간헐천이 터지는 게이시르(Geysir)에서는 유황 냄새가 풍기는데, 레이캬비크에서 사용되는 수돗물도 온천수를 끌어다 쓰는지 은은한 유황 냄새가 났다.
이 뜨거운 땅은 엄청난 양의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다. 어딜 가든 보이는 설산과 빙하는 지역과 지형에 따라 서로 다른 풍경을 자아낸다. 스카프타펠(Skaftafell) 국립공원에서 3시간에 걸쳐 체험한 빙하 트레킹(이 또한 일정이 하루 밀려 미리 예약해둔 걸 날리고 다음 날로 다시 예약했다. 완벽한 즉흥 여행의 순간!)은 꽁꽁 얼어붙은 빙산을 오르는 진귀한 경험이었다. 빙벽을 오를 때 사용하는 크램폰 아이젠을 신고 혹시 모를 비상 상황에 대비해 하네스를 착용한 채 미끄러지지 않도록 한발 한발 얼음 파편이 튀어오를 정도로 세게 내디뎌야 한다. 좁고 굴곡진 빙하 사이를 비집고 지나갈 때는 커다란 빙하 안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다이아몬드 비치의 검은 모래 해변 위에는 반짝이는 얼음 조각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파도에 떠밀려온 빙산 조각들이 빛나는 모습에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오랜 시간 파도를 맞아 크리스털처럼 투명하고 반들반들한 얼음 덩어리를 깨서 위스키에 넣어 먹어야 진짜 아이슬란드를 여행한 거라는 말도 있다.
다이아몬드 비치 맞은편에 위치한 요쿨살론(Jokulsarlon)은 고요하고 잠잠한 여느 호수들과는 달리 푸르딩딩한 ‘뽕따색’ 빙산이 둥둥 떠 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경험을 하고 싶다면 스코가포스, 굴포스 같은 아이슬란드의 폭포를 꼭 방문해보길. 사계절 내내 얼지도 않고 시원한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는 모습이 장관이다. 모든 걸 해내려 애쓰지 않고 자연이 허락한 만큼만 누려도 충분할 때가 있다. 자연의 흐름과 변화를 온전히 간직한 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이곳에서 링로드 완주, 오로라 헌팅 어느 것도 이루지 못했지만, 마음만은 어떤 여행보다 풍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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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
-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