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컬트의 나라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오컬트 문화.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라는 질문의 답 중 하나는 ‘오컬트’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합리적 오컬트주의자’도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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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타고 가다, 교차로에 걸린 현수막을 보았다. 구청 문화원에서 ‘관상, 손금 보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광고였다. 엄마는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손금, 관상 배워서 어디에 써?” 나는 힘주어 대답했다. “정말 쓸 데가 있어. 저런 기술 중에선 제일 돈이 될걸.”

저런 예측의 기술은 정말로 돈이 된다. 지금 카톡 대화를 열어서 타로, 사주, 손금 등을 검색해보고 오픈 채팅방 목록을 확인해보라. 수없이 많은 사람이 포춘텔러로서 영업을 하는 걸 발견할 수 있다. 복채는 카카오페이로 입금하면 된다. 최근 친구가 그 채널에서 타로 영업을 시작했다. 친구는 진지하게 말했다. “질문 하나에 9백90원, 1천원을 받는 사람들도 있어. 생태계 파괴지.” 많은 걸 시사하는 말이었다. 이미 이런 사업은 하나의 ‘계’를 이루고 있다는 데 아무도 의심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나 뛰어들 수 있다. 인류의 역사와 늘 함께했던 오컬트의 거대 사업은 삶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다.

이것은 내가 첫 소설 <나의 오컬트한 일상>을 쓸 때 기본으로 한 전제였다. 우리의 일상은 오컬트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오컬트를 나와 달리 이해하는 사람들은 내 책을 읽고 내던지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오컬트야! 시시하다고!” 독자와 작가 사이에 이해의 갭이 있는 건 참으로 쓰라리지만 어쩔 수 없다. 그들이 기대한 오컬트는 멀기로는 <퇴마록>, 가까이는 <사바하>, <사자> 같은 영화에 나오는 거대 악령, 종교적 예식, 극적으로 신비로운 사건들이었을 것이다. 엄격한 의미의 오컬트는 악마에 씐 영혼, 뱀파이어, 이세계로 향하는 문, 그 외 온갖 신비로운 존재로 정의된다. 내가 주목한 오컬트는 오히려 산타클로스적인 것에 가깝다. 세상에서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너무 깊숙이 우리 삶에 스며들어 있어서 의아하게 여기지도 않는 초과학적인 개념들이다. 역학과 점성술을 포함한 각종 인생 예측의 기술, 부적처럼 행운과 안전을 바라며 하는 작은 관행들. 빨간 펜으로 자기 이름을 쓰지 않는 금기와 미신. 요정이나 수호신 같은 아름다운 환상들. 원래 오컬트의 어원처럼 세상에 존재하지만, 알 수 없는 비밀들이 세계에 있다.

과학이 모든 걸 증명할 수 없다는 생각은 새롭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진실이지만, 이것이 주류의 진실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요새 우리 주위의 메이저한 서사들은 대체로 오컬트에 기반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추리 수사물은 초과학을 배격하고 이성을 신뢰하는 풍조에서 탄생했지만 최근 TV에서 볼 수 있는 수사물의 대부분이 특별한 오컬트적 요소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많다. 이유 없이 신비한 물건에 의해 과거로 연결되고, 죽었지만 생명의 구슬에 의해 살아나고, 혜성이 떨어지면 두 사람의 몸이 뒤바뀌기도 한다. 인간의 몸에 빙의할 수 있는 악령이 살인을 저지르고, 오컬트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그를 막는다. 로맨스 장르도 마찬가지, 불사의 존재인 도깨비나 천사와 연애하기도 하고, 기이한 능력이 생기기도 한다. 오컬트라고 인식도 못할 정도로 일상적인 서사 구조이다. 오컬트가 지배한 건 OCN 채널만이 아니라는 얘기다.

오컬트가 있는 건 사람들이 그게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세계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 여기에 어떤 신비로운 설명이 존재할 수 있다면? 게다가 과학적인 설명보다 매혹적이다! 몇 달 전에 흥미로운 글을 인터넷에서 보았다. 지금 여러 문제로 시끄러운 엠넷의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X>의 최종 순위 발표식을 앞둔 날이었다. 글쓴이는 무당인 어머니와 함께 해당 프로그램을 보았다며, 엄마가 연습생들을 보고 옆에서 신이 한 말을 옮겼다고 했다. 그 밑에는 금방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렸다. 주로 자신이 응원하는 연습생들의 데뷔 가능성을 물어보았지만, 의외로 자신의 인생 진로를 묻는 글도 꽤 많았다. “내가 요새 힘들어서 그러는데, 엄마 만나볼 수 있어?” 나는 이런 댓글에 대해서 꽤 충격을 받았다. 미신을 많이 믿는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어떻게 인터넷에서 아무 점쟁이나 믿을 수 있어? 역설적인 용어지만 ‘합리적인 오컬트주의자’라면, 추천의 네트워크에 의해서 입증된 점쟁이만 신뢰해야 한다. 그러나 그때는 팬들의 데뷔 염원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 팬들은 불안을 가라앉혀줄 수 있다면 무엇이든 쉽게 믿을 수 있었다. 오컬트적 정서가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다. 불안과 바람이 있으면 어떤 신비로운 힘이든 믿게 된다. 최종 순위가 결정된 후, 다시 그 글로 가보았다. 예측 결과가 완전히 어긋났다고 비난하는 댓글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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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상가 사사키 아타루는 사회가 불안할 때 오컬트적인 신앙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고 했다. 재난에 직면했을 때 인간은 기적을 믿고 싶어 하고, 여기로 파고드는 초자연적인 신념들이 있다. 우리가 언제든 안전하고 평온했던 적이 있었나? 진학, 취업, 결혼 등 인생에서는 늘 결과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사건이 있다. 사회는 합리적인 원리로만 운영되지 않는다.

이성으로 정면 대결하지 않고 오컬트에 대처하는 방식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너무나 확실한 답, 종교이다. 오컬트를 역사적 사상과 철학으로서 승화하고 공부하여 체계화하는 노력이다. 다른 하나는 초과학을 인정하는 방식이다.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미래를 볼 수 있는 특수능력자들이 있겠지. 설명할 수 없는 논리가 있겠지만, 신비의 물건이 존재하겠지. 지금까지 내가 만난 점쟁이들은 죄다 사이비였지만, 어딘가에 100%의 점쟁이가 있기는 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세 번째는 마술적 사고 정도로 오컬트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매슈 허트슨의 <왜 우리는 미신에 빠져드는가>에 보면 마술적 사고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미신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마술이 실재한다고 믿으면 자기 암시로 인해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세상을 떠난 유명한 음악가가 썼던 악기로 연주한 곡을 들으면 감동이 훨씬 깊다. 간절한 사람들의 염원이 모이면 기적이 이루어진다. 인형 같은 물건을 보면 거기에 사람의 정신이 깃든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이를 긍정적으로 이용해서 삶을 이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오컬트를 보통의 사람들이 행하는 일상적 사회 관습으로 받아들여도 어느 정도 선은 있다. 이 모든 것이 입증되지 않은 비과학적 태도를 과학과 나란히 놓거나 맹신하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며칠 전 JTBC에서 방영하는 <오늘의 운세>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과연 한국인에게 운세는 뭘까 생각했다. 최근 유행하는 데이트 프로그램의 변형인데, 두 남녀가 소개팅하면 명리학, 관상, 점성술, 심리학의 전문가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나와 그들의 직업이나 성격, 행동을 분석한다. 행동예측의 전문 기술로 명리학, 관상, 점성술을 방송으로 불러온 것도 놀랍지만, 이를 과학의 분과인 심리학과 나란히 놓는다는 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용도를 인정해도 오컬트적 관습과 과학적 학문의 자리는 따로 있으며, 그들의 자리는 심지어 데이트 중인 남녀의 직업을 맞히는 일도 아니다.

불확정성으로 정의된 우주 속에서 살아가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오컬트는 그런 사람들에게 위안이 된다. 누구나 어떤 지침이 필요하고, 그게 의학이든 과학이든 신비주의든 기대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재의 학문으로 증명할 수 없는 일들엔 외롭고 힘든 사람을 이용하려는 의도가 깃들기 마련이다. 오컬트는 본질적 정의상 그 무엇도 확실하진 않지만 딱 하나만은 확실하다. 그런 신비주의적 능력을 갖춘 사람이 많을 리가 없다는 것. 숫자는 몰라도 오픈 카톡에 그렇게 포진하고 있을 만큼 많을 리는 없다.

나는 이 전에 소설을 쓰려고 타로와 사주를 조금 배웠다. 이 얘기를 하면 많은 사람이 ‘나도 한번 봐줘요!’라고 말한다. 한때 사주 선생님에게 “기감이 좋다” 라는 칭찬도 들었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게 오컬트적 능력은 전혀 없다는 걸. 그렇지만 모두가 인생의 불안에 대항하는 미약한 저항의 일환으로 긍정적인 스토리를 듣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는 합리적인 오컬트주의자를 넘어, 어떤 비의적인 일도 내 인생에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회의적인 오컬트주의자에 가깝지만, 사람의 인생에 설명할 수 없다는 기적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은 버리지 않고 있다.

    에디터
    허윤선
    박현주( 작가)
    포토그래퍼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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