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쉼 / 김예원
2년여간 매일 라디오로 자신의 목소리를 전해온 배우 김예원이 긴 여행을 떠났다. 이번에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익숙한 목소리예요. DJ를 맡았던 <볼륨을 높여요>와 <설레는 밤, 김예원입니다>를 즐겨 들었거든요.
와…가끔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을 만나면 너무 기뻐요. 누군가 듣고 있다는 게 라디오의 매력인 것 같아요.
처음 라디오를 들었을 땐 ‘그 김예원’일까 한참 생각했어요. 궁금하더라고요. 라디오국에서는 어떻게 알고 섭외를 했을까?
예전에 뮤지컬 홍보차 라디오 게스트로 출연한 것을 PD님이 듣고 기억하고 계셨어요. 그 후에 SNL을 통해 생방송에서의 제 호흡을 보셨다고 하더라고요. 그 후에 제가 최종적으로 확정됐죠.
라디오로 당신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되었단 사람이 많지 않았나요?
제 원래 성격대로 차분하게 연기할 수 있는 캐릭터가 많지 않았어요. <써니> 같은 모습, 혹은 베트남 처녀를 연기한 모습을 많이 기억하시니까요. 라디오를 하면서 캐릭터로서가 아닌 제 본모습으로 청취자 분들을 만날 수 있어서 라디오를 하는 게 훨씬 값지게 느껴졌어요. 연기로는 저의 모습을 많이 투영시킬 수 없었는데, 라디오도 분명 방송이지만 조금 더 저의 모습으로 있을 수 있었어요.
유튜브의 시대에 라디오 DJ를 하는 건 어땠어요?
아날로그적 감성을 가지고 있다는 면에서 라디오가 참 좋았어요. 연기라는 일은 굉장히 불규칙하지만 저는 원칙을 지키는 걸 좋아하는 성향이거든요. 늘 같은 시간에 방송하는 규칙적인 스케줄을 하면서, 배우 일에서는 채우지 못했던 안정감도 느낄 수 있었고요.
떠날 때에는 퇴사하는 기분이 들었겠어요. 매일 출근하던 회사에 안 가면 한동안은 어색하듯이.
2년을 했던 터라 처음에는 많은 빈자리가 느껴졌어요. 마지막 방송 전에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방송할 때는 거짓말처럼 잘 참았거든요. 얼마 동안 실감이 안 났었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게 거의 10년 만에 처음이더라고요. 운명적으로 다가온 정화의 시간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작품을 바로 할까 고민하다가 한번 쉬어보기로 했어요.
미국에 다녀왔다고요. 여행을 떠난 건가요?
3주 정도 미국에 다녀왔어요. 그림 보는 걸 좋아해서 뉴욕에서 그림도 많이 보고 왔어요. 원화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더라고요. 한번 티켓을 사면 3일을 관람할 수 있었는데 워낙 규모가 크니까 다음에 가면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보고 싶어요. 다음에는 런던에 꼭 가고 싶어요.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하고, 또 어떤 걸 좋아해요?
제가 ‘집순이’ 스타일이에요. 작년 발리 여행에서 처음으로 제가 원하는 여행을 만났어요. 조용하고, 아늑하고, 편안하고, 자연과 함께하는… 시애틀에서는 화려하지 않지만 산책하고 건강한 음식 만들어 먹는 게 대부분인 일정이었는데 너무 행복한 거예요. 다시 태어나면 나무로 태어나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 했었는데 시애틀에 나무가 정말 많더라고요. 건물이 다 낮아서 하늘이 가까이 있는 느낌이었어요. 어디를 가든 자연과 함께하는 느낌이요.
아름다운 것에서 영감을 채워요?
아름다운 거 좋아해요.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것에서 힐링을 많이 받아요. 요즘 세상에 그렇지 않은 것이 너무 많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길가에 피어 있는 흔한 꽃도 아름답고요. 그림을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하고 좋은 글을 좋아해요.
직접 쓰기도 하고요?
일기 쓰는 걸 좋아해서 종종 확실하게 느껴지는 감정이 있거나 새로운 여행지에 갔을 때 글을 남겨놓는 편이에요. 사람들에게 보여줄 만한 설득력 있는 내용은 아니고, 그냥 끼적이는 거죠. 라디오에서 ‘그때의 나’라는 코너의 글이 참 좋았거든요. 책으로 한번 엮어보자고 작가님과 얘기를 하고 있긴 한데 어떻게 될진 모르겠어요.
오늘은 화보 촬영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 우리가 쉬는 걸 방해하는 건 아니겠죠?
제가 원래 하던 일의 양에 비하면 휴식기인 것 같아요.(웃음) 최근에 <개똥이 철학관>이라는 예능에도 출연했는데 알고 보니 주제가 ‘인싸’ 더라고요. 인싸와는 거리가 먼데 제작진 분들이 저를 여러 사람과 잘 어울리는 ‘인싸’로 섭외를 해주셨어요.
주변 사람들에게는 어떤 사람인가요?
늘 한결같은 모습이 중요한 것 같아요. 들어주는 걸 잘하는 편이에요. 우리 모두 인생에 굴곡이 있잖아요. 슬픈 일이 있거나, 좋은 일이 있을 때 진짜 친구를 알 수 있다고들 하는데, 상대방도 나름의 사정과 상황이 있는데 그런 순간을 꼭 함께해야 알아볼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사람의 마음에 대해 정확히 정의 내릴 수 있는 건 없다고 생각해서, 웬만하면 이해하고 좋은 면을 많이 보려고 하는 편이에요.
그럼에도 관계를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긴다면요?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관계를 끊거나, 끊어진 관계를 다시 잡으려고 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물론 서로 서운한 부분이 생길 수 있지만 어떻게 지나가느냐인 것 같아요. 자연스러운 게 좋은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러운 걸 추구하게 되는 것 같고…일에서나 관계, 사랑에 있어서도 자연스러운 거만큼 아름다운 게 없다고 생각해요.
배우가 된 것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인가요?
저는 운명론자고, 운명 얘기를 많이 하는데요. 원래 무용가를 꿈꿔왔고 그 외에는 다른 걸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음악과 춤을 사랑하면서 이 세계는 신세계이고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세계라고 생각했는데 부상을 당하게 됐죠.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큰 충격이었어요. 그러다 기획사 대표님이 제 사진을 보게 되면서 배우가 됐어요. 하나의 꿈이 져가는 시기에 다른 꿈이 피어난 거죠. 내성적인 성격에 춤이 탈출구가 되었다면, 연기를 시작하면서는 연기로 많이 표출했던 것 같아요.
최근에는 시트콤 <으라차차 와이키키>를 했죠? 그러고 보면 정말 다양한 장르의 연기를 해왔어요. 드라마, 뮤지컬 그리고 시트콤까지.
조금 진부할 수 있지만 항상 나의 지금이 황금 같은 시간이고 나의 오늘이 가장 행복해야 하니 중요하다, 어떤 나이든 지금이 나의 청춘이다, 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하는데 그래서인지 그때만 할 수 있는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청춘이 끝나간다고 생각해요?
그건 아니에요. 저는 마흔이 돼도 지금 내가 사는 때가 청춘이라고 생각하니까.(웃음)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청춘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이 자주 찾아오는 건 아니거든요. 지금이 아니면 이런 작품에 도전할 수 있을까? 지금이 아니면 못 할 것 같더라고요. 작가님이 제가 여러 가지 감정선을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주셔서 좋았어요.
연기한 캐릭터와 실제 모습이 아주 달라요. 연기한 캐릭터 중 실제 성격과 가장 비슷한 캐릭터가 있긴 했나요?
제가 가장 애정하는 캐릭터는 단막극 <내 아내 네이트리의 첫사랑>의 네이트리예요. 국제결혼을 소재로 하는 작품인데요, 해외에서 시집온 네이트리가 보건소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굉장히 순수한 캐릭터예요. 저와 어느 정도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저도 아직 사랑을 모르겠고.(웃음) <흉부외과: 심장을 훔친 의사들>의 심장외과의 역할도 진지한 역할이라 조금 비슷한 것 같아요.
캐릭터에 대한 목마름이 항상 있을 것 같은데요.
제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이 캐릭터의 희로애락이 조금 더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어떤 캐릭터든 그 캐릭터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 것에 대한 갈증이죠.
마음껏 쉬는 김에 더 해보고 싶은 게 있나요?
못 했던 집 정리도 하고 가구도 보러 다녀요. 제가 좋아하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워가는 시간이 될 것 같아요. 사실 스스로에 대해 제대로 알려고 한 지 얼마 안 됐거든요.(웃음)
휴식이라는 것, 해보니 꼭 필요한 거죠?
그 전에는 일하다 잠깐 쉬면 그 시간조차 불편했어요. 너무 생각이 많아서. 이번에 쉬면서 생각을 비울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 것 같고 이래서 비우는 시간이 필요하구나, 이래야 다시 채울 공간이 생기는구나, 싶어요. 원래 쉬는 걸 정말 못 했는데 지금은 그냥 쉬고만 싶어요. 처음으로 나한테 집중하는 휴식시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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