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브래지어를 하지 않을 자유
내 몸을 옥죄는 속옷으로부터의 탈피. 여성의 브래지어를 하지 않을 자유, 그 해방감 또는 불편함에 대하여. 패션계에 몸담고 있는 여성 3인으로부터 그들이 겪은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편견을 벗을까?
‘노브라. 신체가 편할 자유에 대하여’가 주제인데 어때요?” “어머. 지금 제가 그런 상태예요. 물론 집이지만요.” 웃으며 답을 했지만 뻔하지 않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잠시 멈칫했다. 집에 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브래지어를 벗는 거라 말하는 다수의 여성들.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 TV 먹방 프로그램에서 ‘브래지어를 풀고 마음껏 먹어요’라는 말에 많은 이들이 박수를 치며 공감하지만 막상 실천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노브라가 새롭기보다는 건강상의 이유, 신체의 자유를 두고 반복된 논쟁 속에 ‘선택의 자유’로 답이 정해진 듯했고, 나 역시 노브라를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상태로 집밖으로 나가기에는 ‘무방비 상태’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1930~40년대 서양 의복이 우리나라에 등장하면서 브래지어도 함께 소개됐지만 생산할 환경도 여의치 않았고, 속옷을 챙길 여유도 없었다. 그 당시 여성들 스스로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1960년대를 지나오면서 ‘국제적인 품격을 갖춘 우아한 여성은 브래지어를 착용한다’는 메시지가 등장했다. 그 즈음 브래지어를 하면 건강에 좋다는 기사 역시 쏟아졌다. 그 후 긴 시간 동안 많은 여성은 십대부터 삶을 마감할 때까지 브래지어와 함께했다. ‘받쳐주고, 올려주고, 조여주고.’ 여성과 남성의 몸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부터 아무런 의심 없이 보고 들었던 브래지어 광고의 단골 카피다. 백화점 란제리 매장에는 벽면을 꽉 채운 푸시 업, 볼륨 업, 셰이프 업 브라가 진열되어 있고, A, B, C, D로 여성의 가슴 크기를 나눈다. 그중 내 몸에 꼭 맞는 속옷을 고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만 번번이 실패하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꼼꼼히 따져본다. 속옷 하나를 사기 위해 겪어야 하는 수고는 이렇게 만만치 않다. 그리고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런 내가 광고의 타깃이 된 건 어쩌면 자연스럽다. 그들은 브래지어를 입으라고 부추긴다. 가슴은 중력에 저항해야 하고, 유두는 가리는 것이라고. 편안할 자유는 아름다움을 위해, 적어도 집밖에서는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좋다고. 이렇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미디어 속 여성들의 가슴에 익숙해졌다. 그들이 말하는 이상적인 가슴에 부합하지 않으면 어딘가 모르게 뒤처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수가 말하는 이상적인 가슴의 모습 때문에 타인의 시선에서도 나의 시선에서도 내 가슴은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는 와중에 선택지가 더 늘었다. 보정 기능이 없는 보드랍고 얇은 브래지어, 움직임이 편한 스포츠 브라. 여기에 하나 더, ‘노브라’가 등장한 것이다. 답답하고 조이는 속옷보다 편안함을 우선시하는 여성들에게 반가운 소식이었다. 여성의 브래지어 착용이 관습처럼 굳어진 우리나라지만 많은 여성이 탈코르셋을 선언하고 신체가 자유로울 권리를 누리기 시작했다. 브래지어 착용은 세련된 여성의 상징, 기능성 속옷을 착용하면 여성성이 살아난다는 미디어의 메시지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그것만이 정답인 양 믿고 살아온 내게는 여전히 낯선 문제였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번 칼럼을 위해 기꺼이 무방비 상태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우선 맨몸에 감촉 좋은 내의를 입었다. 그 위에 스웨터를 입은 다음 오버사이즈 핏의 아우터를 하나 더 걸쳤다. 한여름이 아닌 것이 참 다행이다. ‘대한민국 서울 강남 한복판을 노브라로 얇은 티셔츠와 청바지만 입고 당당하게 거닐 수 있는 여자가 몇이나 될까?’ 생각하며 명치가 허전하다는 비밀을 숨기고 옷깃을 여민 채 길을 나섰다. 우선 편했다. 집에서나 누리던 기분을 밖에서 누리는데 뭔가 허전하면서도 불안함이 공존하는 편안함이다. 일종의 일탈에서 오는 쾌감도 잠시, 마주 오는 사람들에 괜히 움찔한다. 어깨와 등이 구부정해졌다. 어린 시절 달리기를 할 때처럼 양팔의 각도를 더욱 크게 만들어 힘차게 흔들면서 나의 가슴 쪽을 가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옷의 두께 때문에 타인이 알아차리기엔 힘들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마주하는 시선에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굳이 왜?’ 하고 물어올 것 같았고, 그 질문들은 나를 번거롭게 할 거라는 생각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게다가 창가에 언뜻 비친 나의 실루엣은 그저 그랬다. 힘 있는 패드가 사라진 나의 상반신은 오늘따라 자신감 없고 피곤해 보인다. 나의 첫 노브라 외출은 이렇게 한 시간이 안 되어 마무리됐다. 집에 돌아와서야 마음이 놓인다. 여성의 몸이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는 데 당연히 공감한다고 생각했다. 막상 노브라를 행동으로 옮기고 보니 개인의 선택이니 존중해야 한다는 모범 답안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실제로 내 속옷에 관심 없을 지나치는 타인의 시선에서조차 나는 자유롭지 못했다. 그뿐이 아니다. 나조차도 노브라인 나의 모습을 아름답게 바라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은 가슴 모양이 덜 아름답다는 인식이 내 안에 버젓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당연하다고 여겨왔기에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너무나 자연스러워 의심하지 못했던 편견 하나가 사라진 기분이다. 타인의 시선보다는 내 몸과 마음에 집중하고, 편협하고 강요된 미의 기준보다는 다양하게 공존할 수 있는 아름다움에 가치를 둘 것. 우리는 그럴 때에야 비로소 더 쉽고 자연스럽게 신체가 편안할 권리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할 수 있지 않을까?
– 도현영(<요즘 여자> 저자)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하여
불행한 일은 대체로 한번에 찾아온다. 서른 살이 되자마자 많은 것이 단숨에 무너졌다. 원인 모를 병이 예고 없는 눈사태처럼 무차별적으로 쏟아졌다. 건강 이상은 정신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기분은 늘 바닥 언저리에 있었고 붕괴된 자아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서른 살이 되던 겨울,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홀로 서 있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자책하는 날이 늘었다.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불평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며 출구 없는 동굴 속에 스스로를 가뒀다. 자신을 고립시키는 일이 완고해질수록 더욱 맹렬하게 모든 에너지를 미워하는 일에 쏟았다. 좋아하는 식당의 음식과 자주 걷는 거리는 물론 사랑하는 사람까지 미워졌던 어느 여름날, 우연히 보게 된 수첩 가장 뒷장에 적어둔 글귀가 마음을 비집고 들어와 뒤흔들었다. ‘타고난 것을 결정할 수 없지만 어떻게 살아갈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작가이자 철학가인 페터 비에리가 쓴 문장이었다. 선천적으로 나약한 면역력을 타고났지만, 더 이상 나를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느닷없이 술과 담배를 끊었고 채소와 생선 위주의 식사를 일상으로 삼았다. 매일 유산소 운동과 근력 운동을 번갈아했다면 누가 믿을까. 갑작스러운 생활패턴의 변화는 사람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여러 모임에 온갖 핑계를 대고 나가지 않았고, 불필요한 에너지 소비를 줄이기 위해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를 가능한 한 줄이려고 마음먹었다. 건강을 위해 규칙적인 삶에 홀로 매진할수록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서 안부를 물어오는 날이 늘었다. 그들은 대체로 건강 악화에 대한 걱정과 더불어 건강을 회복하는 방안에 대해 나름의 조언을 하곤 했다. 대다수가 좋은 약이나 훌륭한 병원, 신선한 음식이나 새로운 운동을 추천했지만 믿을 수 있는 근거나 증거가 부족했고 쉽게 따분해졌다. 그러던 중 누가 브래지어를 입지 않는 건 어떠냐는 희한한 조언을 건네왔다. 그의 부모님은 누나가 중학생이던 시절부터 항상 브래지어를 벗고 다니는 것이 건강에 좋다며 그것을 벗고 다니기를 강조했다고 했다. 실제로 그의 누나는 습관처럼 어린 시절부터 브래지어를 벗고 지냈고, 마흔 남짓한 나이까지 질병 하나 없을뿐더러 정신적으로도 굉장히 해방된 듯 건강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가 남자라 아주 야릇한 측면에서 흥미로운 방안처럼 다가왔고, 그의 부모님이 여성 의학 전문가라는 점에서도 꽤나 신뢰가 갔다. 그의 말을 들은 날 밤, 집에 돌아와 습관처럼 브래지어를 벗어 세탁함에 넣은 뒤 침대에 누웠다. 생각해보니 젖가슴이 불룩해질 시점부터 지금까지 수년간 브래지어를 벗고 대문을 나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습관처럼 입고 나선 브래지어를 입은 자리가 마치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음식을 먹은 듯 가려웠다. 명치까지 무엇인가 차오르는 듯 거북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왜 브래지어를 입는가에 대해 혼자 되뇌었다. 가슴이 처진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그건 그저 핑계에 불과해 보였다. 어떤 사회적 통념이 나로 하여금 브래지어를 입게 만드는 것 같았다. 브래지어를 입지 않은 채 사람들 앞에 나설 엄두가 좀처럼 나지 않았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을까 두려웠다. 한국에서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채 상의 위로 불룩하게 유두를 드러내는 여자는 성적으로 불결하고 싸구려 취급을 받는 것 같았다. 그 곱지 않은 시선은 혈액 순환과 독소 배출을 방해하고 피부 질환을 촉진하는 브래지어를 좀처럼 벗을 수 없게 만드는 것 같았다. 불현듯 매달 생경한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담아내기 위해 모델에게 브래지어를 벗고 촬영하자 요구하면서 실제로는 그와 반대로 살고 있는 내가 혐오스러워졌다. 사회적 통념에 갇히고 관습에 찌들어버린 내가 싫어졌다. 그 후 브래지어를 입는 일에 대한 생각을 멈췄고 몇 달 뒤 건강상의 이유로 회사를 그만뒀다. 형식적인 출근을 하지 않게 되며 편하고 안락한 차림으로 동네를 활보했다. 그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브래지어를 벗는 것이었다. 마침 계절은 가을이었고 두툼한 옷을 꺼내 입을 시점이었다. 브래지어 하나 하지 않는다고 티 날 만큼 큰 가슴을 가지지도 않아서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 동네에서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외투를 가슴팍으로 동여맸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나는 브래지어를 하고 다닌다. 유두를 드러내는 일이 여전히 불편하다. 그건 스스로에 대한 불편이 아닌, 사회적 불편함에 가깝다 할 수 있다. 나로 인해 시선을 어디에 둘 지 모르는 사람들이 신경 쓰였다. 여전히 나는 서울에 살고, 서울의 관습 속에 숨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채 유두를 드러내는 여자를 혐오하거나 경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더욱 자유롭고 분방한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여긴다. 최근 많은 사람과 마스크를 낀 채 대화를 나눴다. 좀처럼 대화에 집중하지 못한 채 온통 머릿속에서 그간 봤던 좀비 영화나 재난 영화를 떠올렸다. 마스크를 착용한 채 생활하는 것이 당연하게 될 줄 몰랐다. 무엇보다 세상은 언제 멸망할지 모르고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러니 조금 더 불합리한 일에 당당해지고 싶어졌다. 좀처럼 정산해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업자들이나 나이가 벼슬인 줄 아는 어른들 앞에서다. 그리고 거기엔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채 다니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 김선영(프리랜스 에디터)
속옷과 헤어지다
“너 오늘 브래지어 안 했어? 와, 부럽다야!” 여고동창생들을 만나러 나가서 5분쯤 흘렀을까? 내 흉부를 확인한 친구들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다. 그렇다. 요즘은 ‘노브라’, 격한 표현으로 ‘탈브라’를 부러워하는 시대가 되었다. 예전에는 내 생각도 포함해서 암묵적으로 다소 꺼림칙한 처사였다. 나는 80C, 다이어트로 몸이 작아졌을 때도 75C의 바스트 사이즈를 가졌던 나름 ‘왕가슴녀’다. 그래서 브래지어란 내 삶의 한 부분을 지지해주는, 삶 전반에서 빠지면 안 되는 하나의 상징적인 아이템이었다. 옛날 말로 ‘옷 맵시’를 살려주는 필수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어느덧 과거형이 됐다. 만 35세의 한계령을 넘자마자 나는 호로몬의 풍을 맞았다. 내 몸과 마음, 그리고 ‘가슴’도 변했다. 이효리가 한 프로그램에 나와 말했다. “나 이제는 예전처럼 가슴도 없어.” 나는 이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실제로 여성 호르몬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변화해 풍만했던 가슴을 꽤나 차분하게 만들었다. 장 폴 고티에 의상을 입은 마돈나급은 아니었지만, 정면 위쪽을 바라보며 당당했던 나의 유두는(이하, BP)는 어느새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뿐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소화기능이 많이 약해졌고 장 기능도 떨어졌다. 각종 유산균을 비롯해 저하된 면역력과 항산화까지 챙기기에 바쁘다. 기력도 쇠하고 뭐든 불편한 건 질색이 됐다. 그러고 나니 가슴 가리개 이상으로 내게는 소중한 키 아이템이었던 ‘꼭 맞는’ 브래지어가 이제는 헤어지고 싶은 지루한 연인처럼 여겨졌다. 남녀 성비가 비슷했던 대기업 건물에 자리한 잡지사로 매일 출근할 때 나와 내 모든 여성 동료에게 브래지어는 아주 당연하게 챙겨 입어야 할 아이템이었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고 패션 트렌드도 바뀌었다. 현재의 패션을 이분화할 수는 없겠지만, 불과 4~5년 전과 비교한다면, 이제 르메르 같은 낙낙한 옷을 입는 여자가 멋있는 여자로 읽혀지고, 세실리에 반센 같은 펑퍼짐한 원피스를 입는 여자를 예쁜 여자로 조명하게 됐다. 이렇게만 본다면 모든 면에서 세상이 여성들 편이 되고 있음을 느낀다. 킬힐, 하이웨이스트 스키니진 같은 아이템은 이 땅에서 외면받고 있지 않은가. 모든 압박으로부터 자유를 외치는 여자들은 당연한 수순처럼 브래지어를 벗어 던지게 되었다. 나 역시 회사를 관두고 프리랜서로 살며 노브라의 삶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여름에 반팔 티셔츠 한 장을 입어야 할 때 빼고는 봄과 가을, 특히나 겨울엔 일주일에 4일 정도를 노브라로 지내고 있다. 해외 여행을 갈 때는 아주 당연하고 국내에서는 남들 눈에 띄지 않게 몰래 즐긴다. 하지만 노브라의 단점은 소프트 브라를 착용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놈의 ‘꼭지’다. 어쩔 수 없이 BP가 비치기 때문에 아주 신경이 안 쓰이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동대문 속옷가게부터 올리브영에서 판매하는 누브라를 비롯해 니플패치 종류 대부분을 섭렵했다. 탁월한 방법으로 ‘유두’를 제대로 가려야 하기에. 그러나 몇 년간 찾아다녔지만 완벽한 제품은 발견하지 못했다. 세상에 없는 이상형 찾기 랄까. 싸고 얇은 거즈밴드는 여름에 하루 종일 붙이고 다니다 살점이 떨어져나가 반달 모양의 흉터가 남는 아찔한 상처를 남겼고, 스킨 컬러의 실리콘 누브라는 때가 많이 타고 습도를 못 이겨 가슴살에서 꽤 자주 이탈해 바닥에 떨어지는 민망한 해프닝을 선사한 적이 있다. 그래서 조금 비싼 감이 있지만 겉은 폴리스판, 안은 폴리오레핀 소재로 된 에메필의 패치 누브라를 착용하는데 이 제품 또한 영구적이지도 아주 편하지도 않다.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만들어줬으면 혹은 알려줬으면 좋겠다. 최근 여행에서 나는 역시나 노브라에 블랙 니트, 낙낙한 코트로 가슴을 교묘하게 가리고 100% 캐시미어 소재로 빚은 오라 리(Aura Lee)의 영롱한 블랙 스웨터를 마주쳤다. 그것도 세일 칸에서 말이다. 정말 사고 싶었기에 피팅을 해보기로 했다. 피팅 후 바깥으로 나와 친구에게 “이거 괜찮아?”라고 묻는데 속마음으로 아주 자신이 없었다. 형편없이 내려앉은 가슴 위치에 스스로가 민망했다. 그야말로 아줌마 느낌인데… 이렇게 내 청춘이 저물어가는 건가… 생각하며 기분이 좋지 않았고 그 아름다운 캐시미어 니트는 결국 내 것이 되지 않았다. 탄탄하게 내 가슴을 받쳐주는 진초록색 그 브래지어를 챙겨 입고 나왔다면 내 선택은 달라졌을까? 잘 모르겠다. 10여 년간의 바람대로 결국 10kg의 살이 빠지고 근육형의 탄탄한 몸매를 갖게 된다면 풍만한 가슴은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이다. 이제는 납작한 가슴이 더 시크해 보이기 때문이다. A컵과 B컵을 오가는 적당한 가슴에 1990년대 슈퍼모델들의 파파라치 사진 속처럼 실키한 슬립 톱을 입고 BP를 당당히 그러낸 채 포르투와 베니스의 해변을 누빌 수 있을까? 그게 내 영원한 소원이 됐다면 크게 달라진 것이 아닐까?
– 강국화(스타일리스트)
- 에디터
- 김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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