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지나가다 / 윤시윤
윤시윤은 손에 대본을 쥘 때면 매번 뜨거워진다. 더위 때문이 아니다.
어느 순간 힘이 빠지면서 정말 좋은 배우로 가야 하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지금의 제 모습이 싫지는 않아요. 힘을 줄 줄 알아야 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어떻게 하면 힘을 뺄까보다는 그냥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힘이 빠지겠죠. 저도 언젠가 힘을 빼고 싶어요. 그래서 힘을 열심히 주고 있어요. 제대로 힘주는 법을.
힘을 빼는 연기를 하던데요. 적어도 <녹두꽃>에서 제가 본 연기는 그랬어요.
<녹두꽃>은 연기하기가 너무 재미있었어요. 처음으로 악역을 해봤는데 내가 이렇게 악한 인간이었구나를 알게 됐어요. 저는 힘을 줘야 악한 게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힘을 안 줬는데도 악한 게 나오더라고요. 저를 조심하세요.(웃음) <녹두꽃>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 눈이 조정석 배우에게 있었어요. 좋은 의미에서 저에게 너무나 자극 이상의 무언가를 주었어요. 연기로 계속 감동을 줬어요. 물론 그 전에도 훌륭한 배우들과 해봤지만 그냥 진짜 위대한 배우는 바로 앞에 있는 배우도 울려버리는구나.
동료의 평이 가장 냉정한 법이죠. 최고의 찬사네요.
너무 좋은 형이자 너무 무서운 사람이기도 해요. 너무 존경하는 선배이니까 제가 뭐 하나 허투루 할까봐 너무 무섭더라고요. 매 순간 정말 열심히 연습하고 갔어요. 정석이 형은 소름 돋게 연기로 감동을 줘놓고 컷 하고 나면 정말 좋은 사람이 돼요. 실력 좋은 사람이 인성까지 좋으면 감동이 제곱이 되는 것 같아요.
당신도 그런 배우가 되고 싶나요?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렇게 되고 싶어요. 좋은 사람이고 싶어요. 매번 말하는데, 제가 신인 때 말도 안 되는 연기를 하는데도 현장에서 다 수습해주셔서 결과물로 망신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죠.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열심히 따라 해요. 하다 보면 피곤할 때는 예민해질 때도 있는데, 그 선배들처럼 되고 싶으니까 따라 하는 중이에요.
언제 어떤 선배를 만난 건가요?
<지붕 뚫고 하이킥> 때도 선배들이 저를 혼 한 번 안 냈었어요. 정말 엔지 많이 냈었거든요. 제가 아무리 신인이라고 해도 엄청나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인공을 맡았다는 거고, 되게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거든요. 두고두고 그 시절을 부끄러워하면서 다시는 그러지 않도록 해야 되는 거예요. 이게 배우로서는 정말 미안하고 나쁜 거거든요. 그런 상황에서도 저를 계속 북돋아주면서 같이 했었거든요. 되게 멋있어요. 저도 그런 선배가 되고 싶은 거죠.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을 알아본다고 하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 거예요. 특히 뒤를 돌아보는 일이요.
이 사람한테 사랑받고 싶어서 아무리 노력해도 이 사람이 저한테 사랑을 안 줄 수 있고, 오히려 별거 안 했는데도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어요.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준다는 건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인연이고, ‘복’인 것 같아요. 사람에게 상처를 받을 때 반대로 내 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소홀히 대했나를 생각해요. 옆에 있어주는 게 얼마나 큰 건지 상처를 통해서 깨닫게 되죠.
가족 중의 한 명이 아직도 <지붕 뚫고 하이킥>을 봐요. 그에게는 최고의 작품인 거죠. 그렇게 계속 보게 되는 작품이 있어요.
너무 감사한 일이죠. 저는 <불멸의 이순신>을 계속 봐요. 혼자만의 고독한 순간을 이겨내는 방식이 멋진 사람들을 많이 보거든요. 얼마 전엔 피오 씨가 넷플릭스에 <라스트 댄스>를 추천해주면서 “형 이거 보잖아? 그럼 지금보다 더 팍팍하게 살 수 있어” 그러더라고요. 그 얘기 듣고 어제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벌써 밤새 6회를 봤어요.
요즘은 10%만 넘어도 성공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10년 전에 50%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어요. 어떤 기분이 들어요?
어휴. 10%씩이나요?(웃음) 2%만 넘어도… 겸손이 아니라 <제빵왕 김탁구>는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정말 운이 좋게 그 자리에 제가 앉아 있었을 뿐이에요. 비즈니스석에 앉아 있었다 보니 사람들에게 잘 보였을 뿐이죠.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남녀노소 모두가 본 작품이 빨리 찾아온 것에 대한 장점도 단점도 충분히 느꼈겠네요.
장단점이 대단히 있는데요. 가장 중요한 건, 배우로서 관객들에게 한 번이라도 어떠한 기억을 줬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 행복한 일이라는 거예요. 저보다 실력 있는 분들도 그때를 만나지 못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이미 배우로서 최고의 행복을 누렸다고 생각해요. 어제도 밤새워 자갈밭에서 구르면서 액션하고 있는데, 어떤 할머니가 오셔서 “아유 김탁구 씨 왜 테레비 안 나와?” 하시더라고요. 속으로는 ‘계속 나오고 있는데요…’(웃음) 하지만 그분의 뇌리에 김탁구로 남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해요. 더 열심히 해서 그분들에게 김탁구 지우고 다른 역할을 드리는 거죠. 지워내는 건 제 보너스 꿈. 평생 김탁구를 지워내지 못한다고 해도, 감사해요.
그분에게 최근 작품을 직접 추천한다면요?
저희 할머니도 재미있게 보고 계시는 <하트 시그널>. 관록으로 러브라인을 맞춰보시면 어떨까요?
<하트 시그널> MC 소식은 의외였어요.
저도 의외였어요. ‘왜 나한테 들어오지?’ 그런데 재미있어요. 내 사랑은 아프잖아요. 남의 연애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게 제일 재미있어요. 하지만 녹화할 때 너무 힘들어요. 감정을 거기에 이입해야 느껴지잖아요.
그것도 잔뜩 힘줘서 하고 있어요?
그럼요, 일인데요.(웃음) 녹화 끝나면 목 쉬어요.
자신의 연애도 못 한다면서 타인의 연애에 감 놔라 배 놔라 하고 있군요? 그래서 <하트 시그널>을 통해 느끼는 바가 있나요? 생각이 많은 사람이잖아요.
저는 좋아하는 여자에 대한 그 어떤 것도 눈치 못 채겠어요. 제 예상과 항상 정반대더라고요. 그래서 예상을 멈췄어요. 누가 글이라는 건 완성이 돼 있는 게 아니라 그때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 거라고 했는데, 사랑도 그런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20대 때 사랑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짓도 하고 이불 킥 할 만한 짓도 했지만 그때 할 수 있는 사랑이 있고 지금 할 수 있는 사랑이 있는 것 같아요. <하트 시그널>을 보면서 제일 느끼는 건 용기를 내지 않고 안 하는 것이 가장 손해라는 것. 그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을 그냥 겪는 게 제일 예쁜 것 같아요.
결국은 모든 걸 긍정적인 연료로 삼는군요. 당신 안에 어둠은 없나요? 뭐가 가장 두려워요?
뭔가에 함몰돼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 되게 두려워요. 집에 혼자 있으면 엄청 어두워요. 긍정적이라기보다는 영감을 얻어 나아가고 싶은 사람이니까요. 부정적인 기운은 저를 나아가게 하지 못하잖아요. 부정적인 기운이 웃긴 게 본질은 작은데 얘가 점점 곁다리로 커져요. 그럴 때는 글로 쓰거나 본질을 파악하려고 노력해요. 주변에 되게 생각 없는 애들 있잖아요. 그 사람들은 큰 고민을 아주 간단하게 만들어버리는 능력이 있어요. 그런데 그게 되게 본질적일 때가 있어요. 그래서 반대되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 것 같아요.
이제 조금 알겠어요. 윤시윤은 무인도에 떨어져도 가장 먼저 먹을 걸 구하러 뛰어갈 사람이군요.
그럼요 빨리 해야죠. (웃음) 감성적으로 배구공에 그림 그리고 있을 일은 절대 없어요. 살아야죠!
- 포토그래퍼
- Kim S. 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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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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