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말아요, 김완선
현대 음률 속에서, 김완선은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불완전한 노래를 완전하게 부른다.
김완선 씨라는 호칭 어때요?
아유, 난 그런 거 싫어요. 그냥 누나라고 해요, 편하게.
스튜디오에 오자마자 시원하게 맥주 한 잔을 들이켤 때부터 시작해 마지막까지 화끈하네요.
원래 일할 때는 술 안 마셔요. 촬영하면서 맥주 마시는 거 오늘이 처음이에요. 들어보니까 촬영할 때 한 잔 마시면서 하는 사람도 있다더라고요. 나는 왜 그러지 못했지, 못 할 건 뭐야? 나도 한 잔 마시면서 하지 뭐.
잘하셨습니다. 술의 힘인지는 몰라도 내내 가뿐해 보여 덩달아 좋았어요.
일한다는 느낌보단 재미있게 논다는 마음이 들어서 저도 좋더라고요. 스튜디오에 들어올 때부터 딱 기분이 좋았어. 분위기가 살아 있는 느낌이었거든요. 흐르는 음악도 좋고, 의상도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입어보지 않은 옷들이라 신선했어요. 촬영하면서 보니까 내가 좀 낯설어 보이더라고요. 지금 업된 상태랍니다.(웃음)
‘김완선’으로 살면서 안 해본 게 없을 텐데 여전히 낯선 게 있어요?
오늘이 그렇다니까요.(웃음) 늘 새롭고 전위적인 걸 하고 싶어요. 근데 사람들이 나한테 기대하는 모습이 다 비슷비슷해요. 뭔지 알잖아요? 오늘은 새로워서 좋았어요. 점점 이런 순간이 소중해져요. 흘러가는 내 시절을 영원히 기록해둔다는 의미도 있어요.
그 기록을 전부 모아놓으면 어마어마하겠네요.
한창 활동할 때 방송국이 KBS, MBC 딱 두 개였어요. 그땐 SBS도 없었어.(웃음) 진짜 옛날이죠. 비디오테이프에 녹화를 해도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래서 볼 수가 없어요. 그러니 활동하는 모습을 기억하거나 기록한다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죠.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지는 게 순리라고 생각했어요. 기억에서조차 사라진 무대도 많아요.
유튜브에 ‘김완선’을 검색하면 당신의 지난 무대가 생생하게 살아 있어요.
그땐 이런 생각 못 했죠. 유튜브가 참 고마워요. 잊고 살던 순간이 거기 다 있더라고요. 근데 누가 그렇게 수고로운 일을 하는 걸까요? 얼굴이라도 알면 고맙다는 인사라도 할 텐데요. 지금부터라도 김완선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려고 해요. 저도 유튜브를 시작했어요. 내가 죽고 나면 내 음악과 사진, 영상이 남겠죠. 그런 생각을 하면 오늘 같은 촬영도 그렇고 삶의 모든 순간순간이 소중해져요.
멀리서 음악이 퍼지자 마치 조건반사처럼 몸이 반응할 때 빛이 나 보였어요.
음악은 내 삶이니까요. 인간이 만든 것 중 가장 위대한 게 음악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 말에 백 퍼센트, 아니 만 퍼센트 동의해요. 음악만 있으면 혼자여도 혼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위로를 받을 수도 있고, 응원을 받을 수도 있고, 더 강해질 수도 있어요. 음악의 힘은 진짜 대단하지 않아요?
유튜브에서 1986년 데뷔곡인 ‘오늘 밤’을 열창하는 무대 영상을 봤어요. 카메라가 객석을 비췄는데 다들 얼어붙어 있더군요. 레드벨벳의 평양 공연 풍경과 판박이라는 댓글이 달렸고요. 그만큼 낯선 등장이었다고 봐야겠죠?
정말 아무 반응이 없었어요.(웃음) 대체 저건 뭐지? 박수를 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런 얼굴이 대부분이었죠. 열심히 준비한 무대에 아무 반응이 없다고 상상해보세요. 하지만 매니저였던 우리 이모가 정신 교육을 철저히 했기 때문에 상처받진 않았어요. 주눅 들지도 않았고요. 이모가 늘 ‘무대는 전쟁이다. 지면 끝장이다. 무조건 이기고 돌아와야 한다’고 가르치셨거든요. 꿋꿋하게 내 무대 잘했어요. 관객 대신 카메라를 잡아먹었지.(웃음) 그때 난 뭐든 다 잘했어요.
“네 눈이 더 무서워요” 그런 유행어도 있었다면서요?
가사 중에 ‘오늘 밤은 어둠이 무서워요’가 있잖아요. 내가 그 노래를 부르면 텔레비전을 보던 사람들이 다 그랬다잖아요. “네 눈이 더 무서워요”. 당시엔 그게 유머였대요. 그게 웃겨요? 난 하나도 안 웃기던데.
그 눈빛을 직접 목격할 땐 괜히 좀 감동적이던데요.
감동? 어쩌면 감동일 수도 있겠다. 올해로 데뷔 35년째예요. 내 자랑 같지만 여전히 살아 있고 별다른 이질감을 주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내가. 칭찬받을 자격 충분한 거 같아요. 많이 감동해주세요.
김완선 하면 역시 ‘댄싱 퀸’이지만 그 말이 빼앗아간 게 ‘김완선의 음악’은 아닐까 생각해요.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데 계속 과거에 묶여 있는지도 모르죠. 사람들이 내 모습을 보거나 내 노래를 들으면 곧장 1980년대로 돌아가버린다고 말할 때 좋기도 하지만 서운하기도 해요. 나는 그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여전히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서 내놓고 있는데 사람들은 지금 김완선의 음악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아요. 화를 내면서 떠난 팬도 많아요.(웃음) 김완선 하면 떠오르는 그때의 음악을 내놓지 않으니까요. 저는 결정을 해야 했어요. 사람들이 원하는 김완선 대신, 내가 진짜 원하는 인생을 택한 것뿐이에요.
탄탄대로 대신 비포장길을 걷는 마음은 어떤 건가요?
난 똑같은 거에 매력을 못 느끼는 사람이에요. 재미가 없어. 그럼 아무리 좋은 거라도 하기가 싫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거죠.(웃음) 힘들긴 하지만 이게 내 행복이기도 해요. 다 자기한테 맞는 삶을 사는 거예요. 2011년부터 매년 싱글 앨범을 발표하고 있거든요. 남들이 알아주든 몰라주든 상관없이 꾸준히.
김완선만의 목소리, 김완선만의 노래가 있어요. 지금 들어도 새로워요. 자신의 목소리를 어떻게 생각해요?
난 내 목소리 너무 좋아해요. 자기 목소리가 싫고, 자기 노래가 듣기 싫으면 어떻게 지금까지 노래하면서 살 수 있겠어요? 물론 내가 뛰어나게 가창력이 좋은 가수는 아니에요. 하지만 분명한 장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담백하잖아요. 나는 그런 보컬이 좋아요. 나 같은 목소리가 많이 들어도 안 질려요.(웃음)
2016년에 나온 ‘미르(Mir)’는 현대의 김완선을 대변하는 노래라고 생각해요. 소비에트 신스팝과 당신의 보컬이 독보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요.
처음 데모를 들었을 때 느낌이 딱 왔어요. 녹음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딱 3번 부르고 끝냈어요. 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가사를 좋아해요. ‘리듬 속의 그 춤을’도 그렇고 ‘피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도 그렇잖아요. 우주 공간에 버려진 이들의 간절함을 담은 ‘미르’의 가사도 참 좋아요. 또 ‘Oz on the Moon’도 좋지 않아요? 그건 내가 직접 편곡까지 했어요. 20번 가까이 믹싱하면서 작업한 곡이에요. 나는 내 앨범 프로듀싱을 직접 하고 있어요. 내가 죽으면 남는 건 이거밖에 없다는 마음으로 정말 죽을힘을 다해요. 김완선의 피, 땀, 눈물이 다 들어 있어요.
당신은 단순한 사람인가요?
하하. 세상 심플하죠. 말해서 뭐해요. 나는 그렇게 살기로 결심한 사람이에요. 아무 생각 없이 산다고 말하죠. 근데 어떻게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살 수 있겠어요? 순간을 사는 거예요. 지금 내 몸과 마음과 머리가 여기에만 살아 있게 하려고 노력해요. 다른 데 가서 엉뚱한 짓 못 하게요. 그럼 삶이 되게 심플해져요.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미래를 염려하지 않는다는 말로 들리네요.
맞아요. 다들 이런저런 걱정이나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거 같아요. 백날 걱정해봤자 뭐가 달라져요? 똑같아요. 제가 뭘 깜빡깜빡 잘 잊거든요. 그거도 참 좋은 습관인 거 같아요.(웃음) 너무 많은 걸 저장하고 살면 피곤해요.
‘꼰대’라는 말은 어때요?
꼰대라는 게 쓸데없이 아는 척하는 거잖아요. 난 아는 척하며 나댈 만큼 뭘 아는 게 없어요. 뭐라도 좀 알았으면 좋겠어.(웃음)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죠. 꼰대들과는 애초에 함께하지도 않아요.
여러 인터뷰에서 인생 영화로 <쇼생크 탈출>을 언급했더군요. 덕분에 자유를 찾아 용기 낼 수 있었다고요.
난 자유 없이 살 수 없어요. 매니저였던 우리 이모 품에서 13년 만에 뛰쳐나올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요? 어쩌면 길거리에서 굶어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진심으로요. 그전까지 나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사회랑 내가 직접 부딪힌 경험이 전무했어요. 얼마를 벌고 얼마를 쓰는지도 몰랐고, 은행 ATM을 쓸 줄도 몰랐어요.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었어요. 똥물을 뒤집어쓰더라도 내 자유를 찾아야만 했어요. 이모랑 헤어지고 예상대로 힘들더라고요. 힘들게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래도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에요.
결국 자유를 쟁취했네요.
그런 셈이네요. 가끔 눈물 날 정도로 나 자신이 대견해요. 돈은 많지 않지만 죽을 때 싸서 갈 것도 아니잖아요?(웃음) 재미있고 즐겁게 살고 있으니 됐어요.
죽음에 대해 생각해요?
죽음은 나를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예요. 죽음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요. 오히려 분명해지죠. 모든 게 다 선명해져요. 죽음을 생각하면 쓸모없는 고민은 다 사라지고 진짜 내가 원하는 거, 중요한 것만 남게 돼요.
나중에 진짜 그 순간이 오면 그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동시대의 뮤지션으로 기억해줘요. 근데 내가 죽은 다음 기억해서 뭐해요? 나중에 기억할 생각 말고 살아 있을 때 많이 예뻐해줘요. 지금 김완선의 노래를요.
김완선은 역시 다르군요.
그럼, 김완선 아직 안 죽었어요.
- 포토그래퍼
- Lee Jun K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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