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박은빈과 김민재의 경계에서
한바탕 폭우가 쏟아진 대낮.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배우 박은빈과 김민재는 함께였지만, 또한 혼자인 것처럼 보였다. 갑작스러운 여름 날이 어떤 의미로 남게 될지.
[ 김 민 재 ]
작품이 끝난 후 찍는 화보도 있고, 오늘처럼 새 작품이 공개되기 전에 함께하는 경우도 있죠. 좀 다른 마음인가요?
아무래도 그렇죠. 작품이 끝난 후나 끝날 즈음이라면 작품에 관한 평가나 의견이 명확한 상태일 테니까요. 결과가 좋든 아니든 좀 더 후련한 마음으로 이야기 나눌 수 있죠. 근데 오늘 같은 자리도 좋네요. ‘박은빈과 김민재’의 화보 촬영이기도 하지만 극 중 역할인 ‘송아’와 ‘준영’이가 잠깐 재미있는 일탈을 한다고 생각하니 재미있더라고요.
여름 내내 SBS 월화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찍고 있나요?
8월 31일 첫 방송 예정인데요. 4월부터 쭉 촬영하고 있어요. 촬영 분량을 놓고 보면 이제 막 중반을 넘어선 것 같아요. 함께하는 배우 은빈 씨와의 호흡이 정말 좋아요. 너무 좋은 사람이라서 즐겁게 촬영하고 있어요.
어떤 면이 그렇게 좋아요?
어, 이건 잘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데.(웃음) 진짜 좋은 사람이라는 표현이 딱 맞아요. 엄청난 배려심과 그에 버금가는 깊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함께 일하면서 단 한 번도 트러블이 없었고, 트러블이 생길 것 같은 조짐도 없었어요. 그냥 모든 게 다 잘 흘러가는 느낌이 들어요. 은빈 씨가 현장에 오면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해져요. 아무것도 안 해도 그렇게 돼요.
그런 사람이 있죠, 그런 기운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
정말 그래요. 같이 있으면 그냥 웃음이 나고 힘이 나고 그래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 관해 알려진 건 약간의 시놉시스와 몹시 구체적인 인물 관계도, 짤막한 티저 영상이 전부예요. 봄의 풍경이 따뜻하게 담겨 있던데요.
색감이 정말 예쁘지 않아요? 저도 되게 좋았어요. 현장에서의 느낌과 감성이 결과물까지 그대로 잘 연결된 것 같더라고요.
스튜디오에 들어올 땐 천재 피아니스트 ‘준영’의 모습이 엿보였는데 이제야 김민재라는 개인이 겹쳐 보이기 시작하네요. 표정이나 말투, 제스처에서 묻어나는 특유의 스웨그가 흥미롭고요.
하하. 제가 지금 제스처를 좀 크게 했네요. 오늘은 ‘준영’을 연기하는 자리는 아니니까 자연스럽게 원래 제 모습이 나오는 거 같아요. 현장에 가면 그런 게 다 사라져요. 이런 힙합 제스처도 안 하게 되고요.(웃음) 캐릭터와 자연스럽게 동기화된다고 보시면 돼요.
클래식 피아니스트를 연기하는 건 어때요?
꼭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평소에도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하거든요. 준영이라는 캐릭터에도 욕심이 났어요. 한국인 최초로 쇼팽 콩쿠르에서 1등 한 친구거든요. 누가 봐도 멋지고 화려한 삶인데 내면은 전혀 그렇지 않은 친구죠. 말 못 할 여러 문제를 안고 살아요. 저도 그랬던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 마음이 뭔지 누구보다 잘 알아요.
악기 연주에 관한 기술적인 부분은 괜찮아요?
엄청난 부담감이 있어요. 피아노를 좋아하는 것과 피아니스트를 연기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니까요. 할 수 있는 건 연습밖에 없어요. 그냥 최선을 다하는 거죠. 기술도 중요하지만 그걸 표현하는 감정도 중요해요.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한 달 정도밖에 안 됐지만 작품 속에서 정말 중요한 연주 장면은 제가 직접 할 수 있게 됐어요.
촬영 현장은 어떤가요?
긴 장마도 그렇고 코로나19 때문에 쉽지 않아요. 너무 당연한 거지만 모든 스태프가 마스크를 꼭 착용하고 있고요. 수시로 체온도 체크해요. 촬영 장소 협조가 쉽지 않다고 들었어요. 굉장히 조심스럽죠. 감독님이 그러셨어요. 우리 드라마는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작품인데 촬영 현장이 삭막한 건 옳지 않은 일 같다고요. 현장에 따뜻한 휴머니즘이 넘쳐요. 다들 너무 착한 사람들이 모였어요. 그런 온기가 작품에 다 묻어날 거라고 믿어요.
문득 궁금하네요. 당신은 자신을 잘 인내하는 편인가요?
원래는 채찍질하기 바빴던 것 같아요. 저 자신을 칭찬해본 일이 없어요. 그렇게 하면 사람이 망가지더라고요. 어떤 식으로든. 요즘엔 아이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채찍 대신 ‘당근’도 많이 주면서, 너무 깊이 파고들지 않으려고 해요.
막상 행동하기엔 또 쉽지 않은 문제죠.
쉽지 않지만 노력하는 거죠. 안 좋은 감정이 올라올 땐 그냥 회피해버리기도 해요. ‘아 몰라’ 하고 눈을 돌리거나 지워버리는 식으로요. 감정의 끝엔 뭐가 있을지 줄기차게 되묻고 고민한 적도 있지만 사실 감정 그 자체를 완전히 해결하는 건 불가능하거든요. 잘 회피하는 것, 그냥 보내버릴 수 있는 것 또한 용기 내는 일이자 성장의 한 방법이라고 믿어요.
‘회피’라는 단어를 몇 번 사용했는데 그 단어가 새삼 낯설게 들리네요. 다들 돌파하라고만 하지, 회피를 권하지는 않으니까요.
부정적인 의미를 품고 있는 단어죠. 근데 좀 부정적이면 어때요? 안 좋은 상황이 닥쳐올 때 그냥 도망가면 왜 안 돼요? 저는 ‘회피’의 긍정적인 영향력을 믿어요.
우리는 모두 늘 어떤 경계 위에 있는 셈이죠. 당신은 지금 어디에?
경계 위에 있다는 건 어느 쪽으로든 선택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겠네요. 지금 제가 어디 있는지, 어느 경계에 서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저도 그게 궁금해요. 아직 계속 나아가고 성장하는 입장이라는 건 알아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 등장하는 인물도 다 그런 사람이에요. 경계와 경계 사이에서 순간순간 선택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요. 이 작품에 끌린 이유이기도 한 것 같아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당연히, 제 작품이니까요. 마지막 물음표에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섣불리 단정 짓지 않는 태도도 마음에 들어요. 브람스와 클라라, 슈만의 삼각관계와 그들의 삶을 통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정말 잘 지은 제목인 것 같아요.
[ 박 은 빈 ]
귀엽고 큼직한 가방 하나를 옆에 두고 있네요?
그러고 보니 4년 전 <얼루어> 촬영 때도 이런 가방을 들고 갔어요. 그때랑 똑같은 건 아니고요. 이건 ‘신상’이에요. 롤링 백팩이라고 캐리어처럼 끌 수도 있고 배낭처럼 멜 수도 있어요. 초등학생들이 많이 쓰는 그거 맞아요.(웃음) 밤이 되면 바퀴에 불도 들어오고 아주 멋져요.
가방 안엔 뭐가 들었나요?
촬영 현장에 다닐 때 개인 소지품을 많이 챙겨 다녀요. 언제 뭐가 필요할지 모르니까요. 매번 누구에게 부탁하기도 좀 그래서 필요할지도 모르는 물건을 가지고 다녀요. 헤어롤도 있고 이어폰, 대본, 오늘 촬영의 시안도 들어 있네요.
핫핑크 꽃 패턴의 가방과 검은색 꽃무늬가 새겨진 옷이 마치 한 세트로 보일 정도네요.
제가 꽃을 좋아합니다. 꽃이라는 게 마음을 참 설레게 하는 존재인 것 같아요. 물론 이 꽃무늬 가방을 보고 설렌 적은 없습니다만.(웃음)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떤 생각을 해요?
그냥 참 수수하고 무난하게 생겼구나.(웃음)
촬영할 때 보니까 스타일링이나 헤어, 메이크업, 얼굴 각도에 따라 전혀 낯선 얼굴이 불쑥 떠오르더군요.
좋은, 아주 좋은 칭찬이라고 생각합니다.(웃음) 감사하고요. 어린 시절부터 그런 말을 많이 들으면서 자랐어요. ‘나는 화려한 장미보단 안개꽃 같은 사람인가 보다’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배우에게는 아주 큰 장점이죠. 약간의 변화만으로도 큰 효과를 볼 수 있으니까요.
1998년 드라마 <백야 3.98>로 데뷔 후 지금까지 40여 편의 영화와 드라마에 이름을 올렸더군요. 양도 양이지만 필모그래피가 참 깔끔하고 단단하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작품을 고를 때 뭘 봐요?
그때그때 당시의 상황과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졌던 것 같아요. 캐릭터를 맨 먼저 볼 때가 있었고, 어떨 때는 작품 전체의 메시지를 중요하게 생각한 적도 있고요. 시기적으로 내가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나누기도 하면서요. 대체로 저의 자유 의지가 많은 영향을 끼치는 편이지만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구할 때도 있고요. 결과적으로 제가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작품들에 참여했던 것 같아요. 어떤 작품은 너무 하고 싶었지만, 저랑 인연이 닿지 않아서 놓친 것도 있어요. 요즘은 그게 다 내 운명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작품의 기준은?
흥행이나 작품성 등 결과에 상관없이 내 시간을 온전히 잘 보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이요. 시놉시스를 보면 그 작품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지 잘 녹아 있어요. 그걸 잘 읽어보고 결정해요. 작품에 참여했을 때 내게 어떤 의미가 남을지 생각해요. 그 경험을 통해 나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는 어떤 의미를 찾았나요?
요즘 워낙 빠르고, 강하고, 날카로운 ‘킬러 콘텐츠’가 많잖아요. 보고 나면 오히려 힘들고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요. 저희 작품은 그런 정서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요. 빠른 현대인들에게는 너무 느리게 여겨질 수도 있을 만큼 서정적이고 소소해요. 요즘 유행하는 ‘마라’처럼 자극적인 맛도 없고요. 슴슴하지만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것 같았어요.
착한 사람들의 이야기인가요?
착한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그 착하다는 게 “저 다 괜찮아요. 뭐든 다 이해하고, 뭐든 다 용서해요” 같은 건 아니에요. 그냥 일상적인 느낌인 거 같아요. 제가 연기하는 ‘송아’도 그렇고 민재 씨가 연기하는 ‘준영’이도 그렇고 조금은 소심한 상태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편적인 사람일 뿐이에요. 다들 그렇듯 꿈만 바라보고 노력하지만 잘 안 되는 게 있기 마련이고요. 사랑도 마찬가지죠. 내 이야기 같아서 공감하면서, 위로도 받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늦깎이 바이올리니스트를 연기하는 건 어때요?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향한 동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아주 잠깐 배운 적도 있고요. 바이올린은 얼굴과 너무 착 붙어 있어서 CG 작업 하기가 어렵다더라고요. 실패했어요. 드라마에 등장하는 연주 장면을 직접 소화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뒤 3~4개월 정도 내리 연습만 한 거 같아요. 대역 선생님 없이 연주 장면을 직접 소화해내고 있긴 한데 촬영이 있는 날은 일찍부터 신경 쓰이죠. 민재 씨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
드라마 시놉시스에 ‘스물아홉 경계에 선 클래식 음악 학도들의 꿈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는 문장이 있어요. 스물아홉, 실제 당신의 나이이기도 하죠.
맞아요. 스물아홉 박은빈이 스물아홉 채송아를 연기하는 건 행운이에요. 제 마지막 20대를 오롯이 기록해둔다는 생각에 촬영장으로 가는 길에 늘 예쁜 마음을 먹고 있어요. 영원히 남는 거니까.
스물아홉이라는 경계에 선 기분은 어때요?
서른을 잘 준비해야죠. 다행인 건 이제 제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경계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어요. 저만의 안전지대요. 경계에 서 있는 일이 버거울 때도 있었고, 상처받은 시간도 있을 텐데 안전지대 덕분에 버틸 만해요.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저 자신을 지킬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훨씬 단단해졌어요. 그런 느낌이 들어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브람스가 누군지 잘 몰랐어요. 알고 보니 삶도 음악도 굉장히 낭만적이었던 사람이더라고요. 그게 멋있는 것 같아요. 음악이든, 사랑이든 뭔가에 평생을 바쳐 열중할 수 있다는 게요. 어쩌면 제가 바라는 이상향 같은 사람이 아닐까 싶어요, 브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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